소설리스트

91화 (91/110)

“……그럴 리가 있나요.”

신이었으면 병으로 돌아가셨을 리는 없다. 그리고 또, 무슨 절대자? 시골 영지의 평민 출신 자작 부인이 그거랑 무슨 관련이 있겠어. 둘 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글로리아 선배는 예언서와 엄마의 책 모두 자기 전생에서 읽은 책이라지만, 내가 보기에 엄마의 책은 그냥 실화 기반 연애 소설이고 예언서는 예언서다. 내용이 조금 하찮기는 하지만.

자, 그럼 여기서 우리가 대화가 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 바로 글로리아 선배가 하고 있는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다.

글로리아 선배가 원체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기는 했지만 나는 그녀의 진담과 농담을 구분할 줄은 알았다. 그리고 느물느물하고 조금 경박스럽기까지 한 평소와는 달리 지금 글로리아 선배는 그 어떤 때보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선배의 설명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지금 그녀의 말을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대로 설명이라도 더 해 줬으면 어느 정도 말이 통하긴 했으리라.

그래, 일단 대화를 하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내가 애써 갈무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

“미안, 케이트. 나 이것들 좀 빌려 가도 돼?”

“그, 그러세요.”

내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글로리아 선배가 몸을 휙 돌렸다.

나는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선배는 무언가에 정신을 팔린 사람처럼 휙 지나쳐 갔다.

“저기, 선배. 잠깐만…….”

“나 오늘은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 나중에 꼭 찾아갈게.”

나무로 된 방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닫혔다. 글로리아 선배는 그렇게 의문만 남기고 떠나 버렸다.

책들도 다 뺏기고 혼자 남겨진 나는 황망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대화……, 대화를 하려고 했는데.

* * *

글로리아 선배를 다시 본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여기, 이거 돌려줄게.”

“아, 감사합니다. 이걸로 뭘 하셨어요?”

예언서와 엄마의 책을 돌려받은 나는 두 눈을 껌뻑거리며 글로리아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냥 뭐…….”

잠시 뜸을 들이던 선배가 간절한 눈빛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케이트, 우리 중앙 신전에 가 보자.”

“네?”

우리 교실 앞에 대뜸 찾아와서 기껏 한다는 말이 저건가.

글로리아 선배가 복도에 굳건한 자세로 선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문가에 서 있던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교실 문을 닫았다.

“이번 주말에 시간 돼?”

“어, 이번 주는 제가 약속이 있는데요. 다음에……. 아니, 그보다 갑자기 중앙 신전이라니 무슨 소리예요. 거긴 왜 가시려는데요?”

여기서 신성국에 있는 중앙 신전까지 오가는 데는 못해도 하루는 걸릴 텐데 이렇게 갑자기?

내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자 글로리아 선배가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간절한 얼굴로 내 손을 콱 잡아왔다.

“제발 부탁이야, 케이트.”

“윽, 일단 이것 좀 놓고…….”

그 엄청난 악력에 신음하며 인상을 찌푸리자 글로리아 선배가 아차 하는 얼굴로 손을 놓았다.

“미, 미안.”

묘한 표정으로 얼얼한 손을 만지작거리던 내가 한숨 섞인 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언제 어떻게 갈 건데요?”

“! 정말 고마워, 케이트!”

내 양손을 꼭 쥔 선배의 파란 눈동자가 감격한 듯 반짝거렸다. 그에 나는 별것 아니라는 뜻을 담아 어깨를 으쓱했다.

“됐어요, 뭘.”

“토요일 아침 10시에 기숙사 앞에서 만나자. 다른 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렇게 말하곤 몸을 돌린 글로리아 선배가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나는 영 찜찜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뭘까.

“에취.”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서 있던 나는 이내 코를 문지르며 교실로 돌아갔다.

어째 날씨가 더 추워지는 것 같네.

“……어라?”

옷깃을 여미던 나는 들고 있던 책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슨 짓을 해도 망가지지 않던 예언서의 귀퉁이가 조금 찢어져 있었다.

* * *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노아 선배의 얼굴을 힐끗거렸다.

“응?”

내 시선을 느꼈는지 선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알을 굴렸다.

입꼬리가 평소보다 5도 정도 올라가 있다. 저건 분명 엄청 기대하는 표정이다.

……저 얼굴에 대고 토요일에 약속을 깨야 한다고 어떻게 말하지.

“음, 선배.”

한참을 머뭇거리던 내가 입을 열었다.

“저 주말에 못 만날 것 같아요, 죄송해요.”

“그래?”

선배는 모처럼 시험이 끝났는데 못 만난다니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깐이라도 볼까? 도서관이라도…….”

“아뇨, 저 주말에 아카데미에 없어요.”

나는 볼이 책상에 눌리는 것을 느끼며 웅얼거렸다. 노아 선배가 놀란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주말 내내?”

“네, 아마 월요일 아침 일찍 도착하지 않을까 싶어요. 주말에 글로리아 선배랑 어디 가기로 했거든요.”

내가 앓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선배가 시무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흐엉.”

노아 선배랑 놀고 싶었단 말이야. 글로리아 선배는 대체 무슨 볼일이 있길래.

나는 서러운 얼굴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혹시 가기 싫은데 말 못 하는 거야? 그러면 내가 뭐라고 해 줄게.”

노아 선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좀 중요한…… 일이라서.”

나에게는 저렇게 상냥해도, 아주 약간의 빌미만 있어도 살벌하게 투닥거리는 두 선배였다. 내가 그 계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

“음, 비밀입니다.”

내가 어물쩍 윙크를 하며 대답을 거부하자, 노아 선배가 피식 웃으며 내 볼을 콕 찔렀다.

“뭐라고 안 하니까 윙크는 안 해도 돼.”

“아앗, 들켰나.”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하는데, 노아 선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많이 추울 텐데 따뜻하게 입고 가고. 감기 걸린다.”

감기 한번 걸렸다고 유난이라니까. 뭐, 날이 워낙 추운지라 걱정이 되는 거겠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선배가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네에.”

나는 말끝을 늘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 * *

그리고 대망의 토요일 아침, 겉옷을 두껍게 챙겨 입고 기숙사 밖으로 나온 나는 초점이 죽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하늘에서 역시나 하얀 눈이 펑펑 오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 옆에 선 글로리아 선배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욕을 지껄였다.

“……괜찮을까요.”

“괜찮아, 우리 마차 비싼 거라 눈 와도 잘 가니까.”

글로리아 선배는 나와 달리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과연 우리 앞에 서 있는 마차는 웅장하고 고급스러웠다. 저기에 감히 내 엉덩이가 닿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

“선배가 빌린 거예요……?”

“응, 오늘 저녁쯤이면 신전에 도착할 거야. 중간에 멈춰서 밥도 먹고 가자.”

“얼마예요? 저도 타는 거니까 금액은 반반으로 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불안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더듬었다. 저렇게 크고 좋은 마차는 얼마나 할까? 반으로 나눈다고 해도 그 금액이 적지는 않을 텐데.

“에이, 됐어. 내가 너 억지로 끌고 가는 건데, 뭐.”

알긴 아시는군요.

글로리아 선배가 괜찮다며 고개를 젓자 나는 슬쩍 눈을 굴리며 겉옷 주머니에 차가운 손을 넣었다.

“자, 잡아 줄게.”

글로리아 선배가 마차 옆에 서서 내 쪽으로 손짓을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마차에 올랐다.

마부를 놔두고서 굳이 자기가 나서는 이유는, 음, 글쎄. 대뜸 신전에 가자는 말에 따라 주는 내가 어지간히 고마운가 보지.

마차에 올라탄 나는 머리카락에 붙은 눈을 탁탁 털어 낸 다음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툴툴거렸다.

“제가 노아 선배랑 한 약속까지 뺐는데, 이유를 확실하게 말해 주셔야 할 거예요.”

“으응, 그럼. 고맙게 생각해.”

선배가 마차 문을 닫으며 고개를 흔들어 눈을 털어 냈다. 그걸 샐쭉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 무슨 일인데요.”

“예언서 관련해서 확인할 게 있는데, 예언서는 너밖에 못 보잖아.”

“음…….”

역시 그런가.

“저는 정말 착한 것 같아요. 아니면 선배를 생각보다 엄청 좋아하고 있거나.”

나는 창가에 턱을 괴고 하얗게 김이 서린 창문에 비치는 글로리아 선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추운 겨울날에 마차 여행도 같이 가 주는데 선배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이상한 말이나 하고…….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했으면 신전에 신고했을 거예요.”

그리고 선배는 구마 의식 비슷한 걸 당했겠죠.

나는 다음 말을 삼키며 손가락으로 창문을 만지작거렸다.

“……넌 믿어?”

“네?”

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글로리아 선배가 드물게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너는 내 말을 믿냐고.”

“뭐…….”

그 말을 하는 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배니까 믿죠.

그렇게 대답하려는데 글로리아 선배가 내 말을 끊었다.

“아니다, 그냥 대답하지 마.”

“네?”

갑자기 왜 저래.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두 눈을 끔뻑이는데 글로리아 선배가 화제를 돌리며 내게 초콜릿을 내밀었다.

“초콜릿 먹을래?”

나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초콜릿을 받아들어 입에 넣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진짜 왜 저러시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