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동아리 시간이 끝나고 책을 챙기는데, 어딘가에서 글로리아 선배가 설렁설렁 다가와 물었다.
“나 네 방에 놀러가도 돼?”
“네? 지금 더러운데…….”
“괜찮아, 나 그런 거 신경 안 써.”
내가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글로리아 선배가 내 팔짱을 끼고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너도 내 방에 왔었잖아. 책도 빌려 가고.”
“그건 선배가 끌고 갔던 건데요.”
“아아아, 시험도 끝났잖아!”
제발, 제바알, 응?
이제 논리 따위는 집어치운 글로리아 선배가 내 정수리를 턱으로 찍으며 졸라 댔다.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여서, 나는 반강제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아.”
내가 쑥스럽게 방문을 열자 글로리아 선배가 방 안을 둘러보며 두 눈을 빛냈다.
“제가 더럽다고 그랬잖아요.”
나는 창피함에 괜히 머리를 긁으며 채 정리하지 못한 바닥의 잡동사니들을 발로 슬슬 밀었다.
“하아, 여기서 네 냄새 난다, 케이트.”
“제 방이니까요……. 그보다 변태 같아요, 선배.”
글로리아 선배가 깊게 숨을 들이쉬는 것을 보며 내가 몸을 움츠렸다.
“노아 선배한테 이를 거야.”
“아, 안 돼. 그럼 나 암살당해.”
글로리아 선배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정말 뒷일이 두렵다는 표정으로.
나는 시계를 힐끗 곁눈질하며 그녀에게 눈짓을 했다.
“얼마나 있다 가시려고요? 도라 동아리 끝나려면 좀 남았긴 한데.”
“매정하네……. 한 시간만 있다 갈게.”
섭섭하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던 글로리아 선배가 고개를 홱 돌리고는 은근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케이트 너 이번에 1등 했다며?”
“후훗.”
그 말에 멍한 얼굴로 있던 나는 단박에 수줍게 웃음을 흘렸다.
기말고사 성적 나온 지는 꽤 됐는데 아직도 등수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았다.
“나도 딱 한 번 해 본 적 있어, 1등. 노아스랑 공동 1등이긴 했지만.”
“오, 정말요?”
“응, 유학 가는 것 때문에 엄청 열심히 공부했었는데. 아아, 추억이다.”
의자에 앉아 머리를 젖힌 채 내 책장 가득 꽂힌 교과서와 교양 책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글로리아 선배가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너 말이야, 소설책은 정말 거의 없네.”
“교과서들만 챙겨 오기도 무겁다고요.”
“그래? 하긴 너희 영지는 여기서 좀 머니까. 오, 나 이 책 읽고 싶었는데.”
책장에서 읽을 책을 골랐는지 글로리아 선배가 조용해졌다.
“하암, 재미없어.”
하품을 하며 읽던 책을 책장에 돌려놓은 선배가 다시 책장을 훑었다.
읽고 싶었던 책이라면서, 뭘 읽었길래 그렇게 재미가 없었을까 의문을 품으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어, 이거……?”
글로리아 선배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에 이어 의자가 넘어져 우당탕 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뭐, 뭐예요?”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케이트, 너…… 너 이거, 이거 뭐야?”
넘어진 의자 앞에서 글로리아 선배가 잔뜩 당황한 얼굴로 엄마의 책을 들고 서 있었다.
노아 선배가 돌려준 이후 책장에 꽂아 두고 꺼내지 않았는데, 글로리아 선배가 그걸 꺼내서 읽고 있던 모양이었다.
“네? 그거 책인데요…….”
내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하자, 선배는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 이거 어디서 났어?”
“그건…… 저희 엄마가 쓰신 소설이에요. 왜요?”
내 대답을 들은 글로리아 선배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뭐야, 어디 아픈가?
그녀의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 같길래,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왜요, 뭔데 그래요?”
내가 그녀의 어깨를 쥐고 조용히 묻자 글로리아 선배는 책을 쥔 손을 고쳐 잡으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 이건…….”
* * *
원작, 그러니까 <장미를 감싼 안개>의 작가는 거의 열 편이 넘는 소설을 쓴 다작가였다.
내가 <장미를 감싼 안개>, 통칭 <장감안>을 워낙 재미있게 읽은 터라 같은 작가의 작품을 몇 개 찾아본 적이 있었다. 뭘 읽어도 <장감안>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던지라 초반만 읽고 하차한 게 대부분이었지만.
그중에 시골 영지를 배경으로, 영주의 아들과 약사의 딸을 주인공으로 하는 일상 로맨스물이 있었다.
워낙 글 잘 쓰기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었지만, 아무래도 소재가 조금 덜 자극적이고 분위기도 잔잔하다 보니 대표작인 <장감안>보다 덜 유명한 소설이었다. 나도 앞부분만 읽고 취향에 안 맞아서 하차했다. 새드 엔딩이라는 말도 있었고.
그런데.
내가 방금 읽은 이 책이 그 소설과 내용이 완전히 일치했다.
이제는 까마득한 전생에 읽었던 소설이니 나름의 향수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감상까지 전부 지워 버릴 만큼 강렬한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이게 왜 케이트 방에 있지?
“선배?”
멍한 얼굴로 서 있던 나는, 나를 부르는 케이트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 * *
글로리아 선배는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선배.”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멍한 얼굴의 글로리아 선배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내가 몇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청색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겨우 정신을 차린 선배가 내 손을 덥썩 잡아 왔다. 놀라 말을 더듬는데 선배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 이러세요.”
“케이트. 당장 이 책에 대해서 말해 줘.”
전부.
글로리아 선배가 두 눈을 맹수처럼 번뜩이며 덧붙였다. 그에 나는 잔뜩 당황한 얼굴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평소의 능글맞고 장난스러운 모습은 어디 가고 저런 진지한 표정이람, 안 어울리게.
“음, 일단 그건 저희 엄마가 쓰신 책인데요…….”
일단 대답은 해 줘야 할 것 같았기에 내가 어물어물 말을 시작하자 선배가 집중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엄마 처녀 적에 아빠와의 연애담을 소설로 옮긴 거예요.”
평민이었던 우리 엄마가, 아빠가 영주의 아들이라는 걸 모르는 채로 서로를 만나서 사랑을 하다 신분의 차이까지 극복하고 결혼까지 이르렀다는 로맨틱한 이야기.
정작 나는 그런 엄마에 대한 기억이 요만큼도 없지만 말이다.
“네, 네가 이 사람들 딸이야?”
내 대답을 들은 글로리아 선배가 얼빠진 표정으로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까부터 그녀의 상태가 걱정되었던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렇죠.”
“그래서 작가가 네 분량을 그렇게 챙겨 줬었구나.”
이제야 알겠다는 듯 손뼉을 탁 친 그녀가 엄마의 책을 이리저리 넘겨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아, 설마 연작이었던 거야?! 그러고 보니까 영주 성도 블레어였어! 이스터 에그였나?”
“……?”
저 책에 나오는 영주 말하는 건가? 우리 할아버지니까 당연하지……. 이스터 에그는 또 뭐야?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세상에, 이걸 대체 왜 몰랐지? 세상에, 케이트. 그래서 너한테만 이 책이 보이는 걸지도 몰라!”
글로리아 선배가 뭔가를 알아낸 듯 상기된 얼굴로 방 안을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나는 혼란스러움에 머리를 긁으며 숨을 들이켰다.
“어…… 그런가요?”
이런 말 조금 실례지만 미친……건가?
그 꼴을 황망하게 지켜보던 나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대충 문맥상 그 ‘다른 세계’와 관련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진 잘 모르겠다. 사실 다른 세계니 뭐니 하는 건 잊고 있었다.
저 속이 어떻건 내 눈에는 그냥 글로리아 선배였으니까.
“케이트, 잘 들어. 이건 내가 전생에서 읽었던 책이야.”
내 어깨를 쥔 선배가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예언서랑 이 책 작가가 같은 사람이었어.”
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선배의 말로는 예언서를 쓴 사람이 엄마의 책도 썼다는 건데……. 무슨 소리야, 예언서는 몰라도 저 책은 우리 엄마가 쓴 건데? 예언서를 우리 엄마가 썼을 리가 없잖아. 우리 엄마는 신성력도 마력도 없는 일반인이었다고.
“잠깐. 원작, 그 예언서라는 그것 좀 가져와 봐.”
글로리아 선배가 굳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네? 갑자기요?”
“얼른.”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순순히 책 더미 사이에서 예언서를 가져왔다. 몇 달 넘게 들여다보질 않아서 붉은 표지 위로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먼지를 털었다가 한참을 콜록거리던 내가 글로리아 선배에게 예언서를 건넸다.
“잠깐, 어머니가 쓰셨다고? 세상에, 그럼 너희 어머니가 작가인 건가?”
예언서와 엄마의 책을 번갈아 바라보던 선배가 중얼거렸다.
“작가……는 맞는데요.”
나는 확신이 없는 투로 말끝을 흐렸다.
왜 나랑 선배랑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그, 그럼 이것도 너희 엄마가 쓰신 거겠네?”
뭐가 뭔지 모르겠는 탓에 가만히 서 있는 내게 글로리아 선배가 예언서를 들이밀었다.
“어…… 그건 아니에요.”
예언서에 묻어 있던 먼지 때문에 간지러운 코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선배가 든 책에 적혀 있는 엄마의 이름을 가리켰다.
“이건 엄마 이름이 있는데, 저건 없잖아요. 게다가 저건 예언서지만 이건 선배 눈에도 보이고요.”
그리고 엄마가 저런 책을 썼다는 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다.
아빠의 서재 책장에는 엄마가 쓰신 모든 책들이 다 꽂혀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걸 보고 자란 내가 모를 리가.
이제야 작가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았는지 방금까지 마구 떠들던 글로리아 선배가 조용해졌다.
“……어라, 그러네.”
그런데 선배는 뭘 저렇게 생각하는 거지?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글로리아 선배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케이트, 이번 겨울 방학에 자작 부인을 좀 뵐 수 있을까? 내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그렇게 말하며 두 눈을 빛내는 모습이 간절해 보였지만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네요.”
“왜, 왜?”
나는 머뭇거리다 말고 입을 열었다.
“엄마는 제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거든요.”
글로리아 선배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가를 가렸다.
“아…… 미안.”
“괜찮아요.”
내가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하면 대개 분위기가 무척 숙연해지는데, 나는 진짜로 별생각 없었다.
익숙한 반응에 작게 고개를 흔들던 나는 글로리아 선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래서 제 눈에만 이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선배가 두 눈을 깜빡이더니 여상한 얼굴로 대답했다.
“넌 작가의 딸이잖아.”
“아니, 엄마 직업이 작가긴 했는데…….”
실제로 아빠랑 결혼한 후에도 소설을 몇 권이나 쓰시긴 했으니.
아까부터 어쩐지 대화가 안 통하는 것 같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이던 내가 물었다.
“그런데 저희 엄마를 만나면 뭐가 달라지나요?”
“그럼, 당연하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만지작거리던 선배가 덤덤한 투로 대답했다.
“너희 어머니께서 절대자라든가 이 세계를 만들어 낸 작가일지도 모르잖아.”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별생각 없이 한 질문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대답이 나오자, 나는 입을 헤벌린 채 멍청하게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