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10)

“선배!”

교실 문을 열자마자 노아 선배의 모습을 본 나는 얼굴을 붉힌 채 반갑게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선배가 나를 마주 안자 그 반동으로 은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뛰지 마, 다친다.”

“에헤헤.”

날씨가 추워지면서 선배는 긴 머리카락을 풀고 다녔다. 가지고 놀기 좋은, 결 좋은 은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며 장난을 치던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렸다.

“되게 신기하다, 나 방금 엄청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웃자 노아 선배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은발 속에 파묻힌 귀가 약간 붉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사귄 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부끄러워해, 귀엽게.

선배가 헛기침을 하더니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다정히 물어왔다.

“이따 수업 끝나면 만날까?”

“그래요!”

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흡족한 표정으로 교실 안의 시계를 확인한 선배가 내 이마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종 치겠다, 얼른 들어가 봐.”

“아, 벌써요? 잘 가요.”

아쉬움에 조금 미적거리며 선배의 품에서 벗어나니 주위가 확 추워졌다.

나는 재채기가 날락 말락 하는 코를 만지작거리며 얼른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사귀고 나서 보는 처음 시험이네, 따위의 생각을 하며 문을 닫은 나는 책상 가득 놓여 있는 책들을 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들어 보인 다음 손바닥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음, 됐다.”

충전 완료.

어렴풋이 떠오르는 은색 머리카락의 촉감, 사르르 휘어지던 금빛 눈동자 덕분에 기력을 얻어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도라가 한심한 눈빛을 보낸 것 같았지만 뭐 어떤가.

* * *

만나자는 게 같이 공부하자는 거였구나.

나는 멍한 얼굴로 한 손에 들고 있던 펜을 휙휙 돌렸다.

지금이 시험 기간이고 도서관이 공부하기 좋은 곳이긴 하지만, 학년이 달라서 많이 만나지도 못하는데.

내 옆에 앉아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노아 선배를 힐끗 바라보던 나는 책을 이리저리 넘겨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 이걸 언제 다 해.

“!”

도서관이라 큰 소리도 못 내고 속으로 툴툴거리고 있는데, 지금 옆에 앉아서 필기를 정리하고 있는 이 사람이 늘 수석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고개를 슥 돌려 곧장 입술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서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배는 시험공부 어떻게 해요?”

“그냥 하는데. 교과서 읽고 문제 풀고 필기한 거 보고.”

내 뺨을 만지작거린 선배가 두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끝?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외우는 건요?”

“그냥 몇 번 보면 외워지던데.”

“재수 없어!”

나는 오만상을 쓰며 고개를 뒤로 쭉 뺐다.

선배가 천재라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티 나지 않게 속으로 감탄한 나는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역시 천재는 다른가 보네요.”

“그, 그거 하지 마.”

선배가 얼굴을 붉히며 웅얼거리자, 나는 고개를 홱 들고 되물었다.

“뭘요? 천재?”

말이 없는 걸 보니 맞는 것 같네.

일순 장난기가 든 나는 선배를 놀려먹으며 흐흐 웃었다.

“천재다, 천재.”

“…….”

선배가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나는 꼬리를 내렸다.

“알았어요, 알았어. 이제 안 놀릴게요.”

“……진짜지?”

“네. 대신 저 좀 도와주실래요?”

내가 간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두 눈을 반짝이자, 선배는 갓 태어난 아기 고양이를 보는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보자.”

내가 한 필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선배가 입을 열었다.

“월터 교수님이지? 그분 시험은 암기만 잘 하면 거의 다 풀 수 있어.”

“아, 그건 아는데요…….”

나는 내 교과서를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이걸 다 정리하나 눈앞이 막막했다.

우울한 표정을 지은 내 눈치를 보던 노아 선배가 살며시 내 뺨을 건드리며 물었다.

“내 작년 노트 빌려 줄까?”

“와, 진짜요? 네!”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홱 든 내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준비를 다 해 온 건지, 선배가 책상에 놓인 책들 사이에서 노트 한 권을 꺼냈다.

“여기.”

“네?”

달라는 노트는 안 주고 불쑥 제 뺨을 내미는 선배에 내가 당황하며 되묻자 노아 선배가 조용조용 얌전한 말투로 얌전하지 못한 말을 했다.

“키스해 주면 줄게.”

“……선배 변태예요? 여기 공공장소인데요.”

물론 누구나 그런 취향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지만 다름 아닌 노아 선배가 저렇다니, 조금 의외인걸.

여전히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선배를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내가 주위를 살핀 다음 하얀 뺨에 스치듯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 이제 됐죠?”

으휴, 우리 자리가 구석 쪽에 있어서 망정이지.

꿈결 같은 표정을 짓고 뺨을 문지르는 선배를 노려보던 내가 손짓했다.

“선배, 이리 와 봐요.”

나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는 선배의 귀에 대고 후, 바람을 불어넣었다.

“……!”

노아 선배가 귓가를 미친 듯이 문지르며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물음표 백 개를 띄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걸 보며 킥킥 웃다가 한층 나아진 기분으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 혼자 이걸 보는 게 반칙 같을 정도로 수준 높은 노아 선배의 필기 노트 덕분인지, 시험은 최상의 상태에서 더 이상 잘 볼 수 없을 정도로 잘 봤다.

* * *

시험 성적이 나오는 날,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시험을 보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가는 게 있고 대체로 잘 맞아떨어졌는데, 솔직히 말해서 입학한 이래 이렇게 느낌이 좋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설마 내가 1등?! ……에이, 그건 너무 갔다.

이중인격자처럼 볼을 감싸고 설레어 하다 고개를 휘휘 저은 내가 걸음을 재촉했다.

늘 그랬듯 복도 한쪽 벽면에 각 학년의 1등부터 20등까지 적혀 있었다.

먼저 모여 있는 학생들의 무리를 겨우 헤치고 성적표 앞에 섰다.

3학년 부동의 1위는 역시나 노아 선배였고, 그 옆에 보이는 2학년 1등은…….

“……어?”

1등에 적혀 있는 이름은 바로 내 이름이었다.

그걸 의식하자마자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도 발걸음 소리도 전부 들리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온 세상의 소리가 다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전교 1등을 했다 이건가? 수석이라 이건가?

아직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 나는 멍한 얼굴로 뒤돌아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터벅터벅 기숙사까지 갔다.

나는 흥분으로 달아오른 뺨을 만지작거리며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1등? 내가 1등? 2학년 중에서 내가 시험을 제일 잘 봤단 말이야?

“……!”

다리를 들어 이불을 팡팡 찼다.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가만히 쿵쾅, 쿵쾅 하는 심장 소리를 듣고 있던 나는 이불을 홱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단박에 3학년 층까지 달려간 나는 노아 선배의 반 앞에 섰다.

“봤어요? 봤어요?”

“응……?”

다짜고짜 불려 나온 노아 선배가 놀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나는 기어이 선배를 성적이 붙은 복도까지 데리고 나갔다.

“이거 봐요, 이거!”

“!”

놀란 노아 선배가 성적표에 가까이 다가갔다. 내 이름을 확인하고서는 얼굴이 파앗 하고 밝아졌다.

선배가 내 손을 꼭 잡고 두 눈을 반짝거렸다.

“수고했어, 너무 대단하다.”

그 와중에 자기는 3학년 수석인데 그거에 대해서는 놀란 기색이 전혀 없어서 조금 재수 없었다.

다시 선배 옆에 있는 내 이름을 손가락으로 죽 훑은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랑 같은 등수다……. 되게 기분 좋네요, 이거!”

성적도 왠지 커플 같아서.

나는 선배의 팔짱을 낀 채 헤실헤실 웃었다.

“우리 주말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그래, 그러자.”

“뭐 먹을까요?”

역시 고기죠? 스테이크? 으응, 네가 골라.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복도를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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