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거기서 갑자기 그러면 어떡해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두 눈을 끔뻑거리는 노아 선배에게 내가 다시 소리쳤다.
“다른 선배들이 그, 그걸 다 봤잖아요!”
노아 선배가 의아한 얼굴로 속눈썹을 팔랑였다.
“그게 뭐 어때서?”
“…….”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선배는 거기서 한 술 더 떠, 고개를 갸웃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괜찮은데.”
“아니, 저는 안 괜찮아요!”
하여간 이상한 데서 상식이 나가 있다니까.
내가 꽥 소리를 지르자 노아 선배가 어깨를 축 내려뜨리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네가 싫어하는 건 다 안 할게.”
“앗……. 제가 그런 말에 약한 거 아시면서.”
금세 마음이 풀린 나는 눈썹을 내려뜨리며 선배를 다독였다. 보드라운 뺨을 쿡 찌르니 노아 선배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키스는 둘만 있을 때 해요. 오늘은 생일이라 넘어가 준다.”
내가 뱁새눈을 뜨고 제 말랑한 입술을 꾹 누르자 선배는 다섯 살짜리 애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케이크도 먹어요.”
나는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케이크를 가리켜 보이며 웃었다.
“선배 녹차 맛 좋아하죠?”
“응.”
대답은 짧게 했지만 눈이 금빛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뿌듯한 얼굴로 코를 문지르며 덧붙였다.
“선배들이랑 같이 샀어요.”
“그렇구나. 둘 다 너무 일찍 보냈나.”
“네, 그러니까 나중에 꼭 고맙다고 하세요.”
“응, 그럴게.”
사실 두 선배는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고, 오히려 얼른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고마워. 신기하다.”
노아 선배가 케이크를 포크로 깨작거리며 멍한 얼굴로 중얼댔다.
“누가 이렇게 내 생일을 챙겨 준 건 처음이라.”
“선배……!”
어떻게 그럴 수가.
나는 울컥함에 입가를 가리고 중얼거렸다. 내 반응에 맞추듯 선배는 이쪽을 바라보며 퍽 처연하게 웃었다.
턱에 힘을 주고 입술을 파르르 떨던 내가 노아 선배를 꽉 끌어안았다.
“이제 제가 다 챙겨 줄게요. 내년도, 내후년도……. 아, 내후년은 못 챙겨 주겠구나.”
내가 4학년일 때면 선배는 이미 졸업했을 테니까.
말을 흐리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 그래도 편지랑 선물은 보내 드릴게요.”
케이크를 찍어 포크로 먹여 주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선배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선배 졸업까지는 1년 넘게 남았잖아요? 기운 내세요!”
“하지만 내가 졸업하고 나면 1년간 너를 못 보는걸.”
“그건 저도 슬퍼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내가 딱 1년만 일찍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아, 맞다. 선물! 선물도 뜯어 봐야죠.”
분위기도 띄울 겸 나는 들뜬 얼굴로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고심 끝에 고른 선물인지라 반응이 기대되었다.
“이거랑, 저거랑 이거.”
귀걸이를 하고 다닌다길래 내 취향껏 사 본 귀걸이, 선배의 눈과 잘 어울릴 것 같은 커프스단추, 보자마자 예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안경 줄까지.
다 산 탓에 용돈이 조금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매점에서 이 주 동안 초콜릿을 안 사 먹으면 된다. 어차피 노아 선배는 모를 터였다.
“뭐가 제일 잘 어울릴지 고민하다 결국 다 사 버렸어요.”
다 받아 주실 거죠?
나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넌지시 물었다.
노아 선배는 어릴 적부터 생일마다 온갖 귀한 선물을 받아 왔으니 이런 게 눈에 찰지 모르겠다며 불안해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준 거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아끼고 좋아할지 알았다.
“고마워.”
이렇게 선물받아 보는 것도 처음이라며, 얼굴을 붉힌 선배가 포장용 리본과 포장지도 보관하려는지 집어 들었다.
선배의 무릎 위에 앉은 나는 하얀 크림색의 뺨에 입을 맞춘 다음, 귀에 대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요. 태어나 줘서 고마워요.”
내가 말해 놓고서도 조금 부끄러워서 입가를 가리고 배시시 웃는데, 나를 내려다보는 노아 선배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보아하니 내가 귀여워서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표정인데 그 표정을 하고 있는 선배가 더 귀여웠다.
선배가 고개를 푹 숙여 내 어깨에 얼굴을 묻자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터질 듯이 붉어진 뺨을 쓰다듬었다.
누가 노아 선배가 요란한 거 안 좋아한댔어. 이렇게 좋아하는데.
* * *
“나 왔다. 너희 둘 왜 이렇게 빨리 와 있었냐?”
노아 선배를 본 글로리아 선배가 멈칫하며 이마를 구겼다.
“……뭐야? 너 왜 이렇게 반짝거려?”
“우리 선배한테 플러팅 치지 마세요.”
내가 노아 선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새침한 얼굴로 맞받아쳤다.
“아니, 정말로. 뭐가 되게 많잖아.”
글로리아 선배는 얼빠진 표정으로 노아 선배의 얼굴을 가리켰다.
내 선물들 중 귀걸이는 교칙 위반이라 못 꼈다고 해도, 확실히 오늘의 선배는 유난히 반짝거렸다.
나는 은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흐흥.”
“안경 줄? 할아버지들이나 하는 걸 네가 왜…….”
글로리아 선배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노아 선배는 아무런 타격이 없는 표정으로 커프스단추를 자랑하듯 한쪽 팔을 들어 보였다.
“말조심해. 케이트가 준 선물이야.”
“헙.”
글로리아 선배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와, 진짜 예쁘네. 너한테 완전 잘 어울려. 잘 골랐다, 케이트.”
“이미 늦었어요.”
나는 그녀의 태세 전환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악, 잘못했다고!”
낭패라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글로리아 선배를 향해 노아 선배가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리고 있던 글로리아 선배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얼른 절교해야 하는데.”
나는 멀뚱하니 서 있는 노아 선배의 팔을 쿡쿡 찔렀다.
“선배, 고맙다고 해야죠.”
“아.”
내 말을 들은 노아 선배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글로리아 선배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 무척이나 다정하고 온유한 눈빛과 목소리였다.
어이구, 우리 선배 말 잘 듣네.
“케이크랑 선물 고맙다.”
“……미쳤냐?”
글로리아 선배가 오만상을 쓰며 뒷걸음질을 치자, 노아 선배가 보았냐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었다.
음.
* * *
“엣……츄!”
한창 재채기를 하던 나는 민망함에 재빨리 옷깃을 여몄다. 이 창피한 소리를 누가 듣지는 않았을까
겨울이 다가오면서 바람이 무척 매서워졌다. 또 감기 걸리면 큰일 난다.
하여간 날씨가 추워지면서 좋은 점이라고는 노아 선배가 머리를 풀고 다닌다는 것밖에 없다.
“하아.”
11월, 겨울이 다가온다. 그리고 그건 곧…….
“왜 벌써 시험 기간인 건데…….”
기말고사가 한 달 남짓 남았다는 소리였다. 젠장.
도라가 머리를 쥐어 싸매며 신음하자 나도 우울한 얼굴로 펜을 휘적거렸다.
“그러니까.”
비단 나와 도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학생들이 피곤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시험이 다가올 때면, 언제나 그렇지만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아주 착 가라앉아 있었다.
무더기로 쌓여 있는 보충 프린트를 흘겨보며 깊은 한숨을 내쉴 무렵 예비 종이 쳤다.
나와 도라는 대충 구겨 신은 신발을 직직 끌고 겨우 다음 교실까지 갔다.
“그거 해 줘, 그거.”
자리에 앉은 내가 대뜸 말하자 나를 잠시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도라가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 1년 학비 100골드.”
“아으으으으.”
나는 곧장 머리를 쥐어 싸매고 신음했다.
졸업하기까지 이 짓을 여덟 번이나 반복해야 한다니.
잔뜩 쌓여 있는 학습지로 종이비행기를 접에서 날려 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은 나는 다시 교과서를 펼치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래, 공부 해야지. 시험 잘 봐야지. 이번엔 성적 더 올려 보자.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양 뺨을 찹찹 때린 내가 눈을 부릅뜨고 책장을 넘겼다.
깨알 같은 글자를 훑어 내리고 있다 보니 당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아 주머니에서 캐러멜 몇 개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예전에 노아 선배가 통으로 주었던 캐러멜이 남아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간식 없이 시험 기간을 나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다. 나는 단 음식이 없으면 머리가 안 굴러가기 때문이다.
입 안에서 천천히 캐러멜을 녹여 먹으니 기분이 아주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2번 문제 어떻게 푸는 거야?”
도라가 학습지를 슥 내밀며 물어 왔다. 나는 인상을 쓴 채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 그래. 나중에 같이 물어보자.”
“응.”
나는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펜을 잡았다. 암기부터 문제 풀이까지,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았다.
“흐엉.”
우울하다, 우울해. 내 선배가 보고 싶다.
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동시에 복도 쪽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도라가 내 어깨를 쿡쿡 찔렀다.
“야, 저기 네 선배 왔다.”
“선배?!”
지금 보고 싶은 건 어떻게 알고.
나는 용수철처럼 팔딱 일어나 교실 문을 확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