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10)

“선배, 호불호가 없는 게 아니었어…….”

놀란 얼굴로 중얼거리던 내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붕붕 저었다.

“잠깐, 왜 다 음식 얘기로 가는 건데요.”

박수를 짝짝 쳐 시선을 끌어 모은 내가 본론을 꺼냈다.

“자, 다음 주가 노아 선배 생일인데 다들 뭐 해 주실 거예요? 지금까지는 어떻게 챙겨 주셨어요?”

“응?”

내 질문을 들은 선배들이 고민하는 듯 동시에 눈알을 굴렸다.

글로리아 선배가 머뭇거리는 투로 운을 뗐다.

“음…… 선물 주고.”

“또?”

내가 다그치듯 눈썹을 치켜올리자 글로리아 선배가 내 눈치를 보며 느릿느릿 말을 마쳤다.

“끝……?”

“매정하다!”

친구 맞아?

나는 눈썹을 잔뜩 내려뜨린 채 입가를 가렸다.

“아, 그런데 노아스는 요란한 거 싫어하…… 읍.”

“리아, 눈치 챙기자.”

플로라 선배에게 입을 막힌 글로리아 선배가 무어라 웅얼거렸다.

“음, 노아한테 뭘 해 주고 싶은 거라면…….”

의아한 얼굴로 입가를 문지르는 글로리아 선배를 뒤로 하고, 플로라 선배가 사근사근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깜짝 파티 같은 건 어때?”

“고전적이네요. 하지만 그만큼 잘 먹히는 방법이기도 하죠.”

나는 제법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것 같아요. 같이 준비할까요?”

“으음……. 귀찮은데.”

“리아!”

플로라 선배가 글로리아 선배의 등을 팍 때렸다. 답지 않게 손이 매운지 제법 찰진 소리가 났다. 아파! 새된 비명을 지르는 글로리아 선배를 뒤로 하고 플로라 선배가 말했다.

“그래, 좋아. 케이크는 어떻게 할까?”

“노아 선배는 단 걸 싫어하니까 녹차로요?”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계획이 세워졌다. 케이크는 녹차 맛, 언제 어디서 어떻게 놀랠 건지, 선물은 뭘 줄 건지.

나는 수첩에 적어 놓은 것들을 훑어 내리며 호기롭게 웃음을 지었다.

“됐다, 이번 주말에 사러 가야지!”

“뭐야, 케이트! 내 생일은 이렇게 안 챙겨 줬잖아!”

나는 서러운 얼굴로 소리치는 글로리아 선배의 시선을 어물쩍 피했다.

“……이미 지났잖아요. 선배가 필요 없다고 하시기도 했고.”

그리고 정보를 하루 전에 입수했는데 뭘 준비하나요.

내가 천연덕스레 어깨를 으쓱하자, 분한 듯 입술을 삐죽거리던 글로리아 선배가 졸라 오기 시작했다.

“내년에는 꼭 나도 이렇게 해 주기다?! 응?”

“네, 네.”

삼단 케이크에 현수막까지 걸어 드릴게요.

내가 성의 없이 한 대답에 글로리아 선배가 기대감 어린 얼굴로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뭐, 뭐? 아하하, 마음은 고맙지만 그건 스케일이 너무 간 것 같…….”

“리아 바보.”

플로라 선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 * *

오늘은 바로 노아 선배의 생일날이었다. 깜짝 파티를 위해 일부러 생일에 대한 언급은 일절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내 역할은 노아 선배의 눈을 가리고 파티가 준비된 동아리 교실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이쪽으로 다가오는 노아 선배를 주시하다, 그대로 뛰어들어 눈을 가렸다.

“에잇!”

“?!”

놀란 듯 몸을 굳힌 선배가 제 눈을 가린 내 손을 더듬더니 너구나, 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뭐야, 재미없어.”

나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선배의 눈을 가린 손을 치우지 않았다.

노아 선배가 곤란한 투로 중얼거리며 내 손등을 더듬었다.

“아, 그런데 나 안경…….”

“에구.”

그러고 보니 내가 선배 안경알에 손을 얹고 있었구나.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이런 배려 없는 짓을.

나는 재빨리 노아 선배의 안경을 벗기고 지문 자국을 닦은 다음 남는 손으로 다시 선배의 눈을 가렸다.

“와아, 선배 눈 진짜 안 좋네요. 세상이 막 핑핑 돌아.”

장난삼아 선배의 안경을 써 본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대자 노아 선배가 멈칫하며 애절한 동작으로 내 손을 꼭 붙들었다.

“……안경 쓴 거 보고 싶은데 치워 주면 안 될까.”

“싫어요. 그보다 갈 데가 있으니까 따라오세요.”

어차피 보이지도 않을 테지만 놀리듯 혀를 낼름 내밀어 보인 내가 노아 선배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여기예요.”

계단과 복도를 지나 동아리 교실에 도착한 나는 선배의 눈을 가린 손을 떼고 교실 문을 닫았다.

여기가 동아리 교실이라는 것을 알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문가에 서 있는 노아 선배에게, 나는 준비해 둔 편지와 선물을 같이 내밀며 살풋 웃었다.

“생일 축하해요.”

“…….”

대답이 없길래 노아 선배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금색 눈동자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선배가 정확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표현하기 어려웠다. 마냥 기쁜 것도 아닌 것 같고, 놀라기도 한 것 같고……. 혹시 감동 받았나?

하하, 이것 참.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라고.

뿌듯하게 후후 웃으며 케이크를 들고 커튼 뒤에 숨어 있을 나머지 선배들에게 사인을 보내려는데, 노아 선배가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아, 안경 여기요.”

“필요 없어.”

“네? 왜요?”

나는 양손으로 선배의 안경을 쥔 채 말을 더듬었다.

안경을 벗은 맨얼굴의 파괴력이 새삼 엄청나서 선배가 분위기를 끈적하게 잡는 건지, 내 욕망이 착각을 하는 건지 헷갈렸다.

“자, 잠깐만, 선배, 선배?”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말을 더듬었다. 등에 벽이 닿을 무렵 허리에 손이 얹혔다. 선배의 얼굴이 더 가까이 와 있었다.

“이, 이러려고 부른 건 아닌데요…….”

앗, 큰일 났다. 이거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빠져나가려 머리를 굴렸다.

“선배, 눈이 어째 좀 무서워요.”

눈이 풀려 있다니까요.

노아 선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부드럽게 웃으며 내 뺨을 쥐었다.

“내 생일이니까…… 하루만 봐줘.”

아니, 뭘 하시려고…….

질문을 제대로 발하기도 전에 입술에 말랑한 것이 닿아 왔다.

“읍!”

나는 작게 신음을 흘리며 몸을 굳혔다.

그만하라고 해야 하는데 굳은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노아 선배가 나를 받치고 있는데도 목이 계속 뒤로 꺾이는 것 같았다.

질척하고 묘한 감각에 인상을 찌푸리며 코로 숨을 들이쉬는 순간 맞닿은 입술이 떨어졌다.

“허억.”

마침내 자유로워진 나는 참았던 숨을 깊게 들이쉬며 입가를 닦았다.

“자, 잠깐만……!”

노아 선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내 뺨을 어루만지는 순간, 나는 선배의 가슴을 팍팍 두드려 품에서 벗어났다.

아니, 지금 여기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잖아.

“……끝났니?”

그 순간, 타이밍 좋게 글로리아 선배와 플로라 선배가 눈을 가린 채 커튼 뒤에서 걸어 나왔다.

나는 그녀들의 눈을 피하며 애꿎은 입가를 소매로 마구 문질렀다.

“……뭐야?”

노아 선배는 방해받아서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두 선배의 모습을 본 노아 선배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책상을 더듬어 안경을 도로 썼다.

드디어 글로리아 선배와 플로라 선배의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된 노아 선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희가 왜…….”

“자, 축하한다.”

글로리아 선배가 어쩐지 공허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축하해.”

플로라 선배도 영혼 없는 박수를 쳤다. 푸른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

두 개의 박수 소리가 교실 안에 엇박으로 울려 퍼졌다. 나는 그만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관심 없겠지만 선물이다.”

“여기.”

두 선배는 심란한 얼굴로 포장한 상자를 내밀었다. 노아 선배가 고맙다며 그걸 받자 글로리아 선배는 커튼 쪽을 힐끔대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더 일찍 안 나가기를 잘했지.”

플로라 선배가 예의 그 허허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

“아주 고개까지 틀어 가면서 뜨겁더라.”

“설마하니 너희 둘 키스신을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눈을 뽑아서 세척하고 싶다며 글로리아 선배가 신음했다.

“아니 뭐…… 보기 흉한 건 아닌데, 음.”

“뭔가 보면 안 되는 걸 본 것 같았어.”

“맞아, 완전 그거.”

“……면목이 없습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중얼거렸다. 어째 분위기가 점점 나와 노아 선배를 놀리는 쪽으로 가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잇, 다 선배 탓이야.

고개를 홱 틀어 노아 선배를 째려보았다. 선배는 내 시선을 받고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진심이야?

“……또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건가 봐.”

“시선이 뜨거워.”

“아니거든요!”

글로리아 선배와 플로라 선배가 수군거리자 나는 얼굴을 붉힌 채 빽 소리쳤다.

“아, 이럴 땐 또 자리를 피해 줘야지.”

“생일 축하해, 노아.”

“생일 축하한다.”

역시나 영혼 없는 동작으로 주먹을 흔들어 보이고서 글로리아 선배가 몸을 일으켰다.

“음, 그리고 다음부터는 꼭 우리 없는 데서, 응, 알겠지? 부탁한다.”

“벌써 가시게요? 더 계셔도 되는데.”

“으응, 아냐. 선물도 줬으니 됐어.”

플로라 선배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노아 선배가 내 손을 슬쩍 잡아오며 슬며시 웃었다.

“그래도 눈치가 있긴 하네.”

“네?”

벌써 간다니, 아쉬운 얼굴로 의자를 정리하고 있던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선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해하게 웃었다.

“응? 아냐.”

“저, 저거 완전 내숭덩어리!”

“진정해, 가자.”

노아 선배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펄펄 날뛰는 글로리아 선배를 플로라 선배가 끌고 나갔다.

“……갔다.”

교실 문이 닫히자 나는 괜히 머쓱해지는 것을 느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

그러다 문득 아까 전의 상황이 떠오른 나는 씩씩거리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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