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흐흥.”
오늘은 날씨가 선선하니 좋았고, 이번 책은 유난히 잘 읽혀서 동아리 시간이 무척 기대가 되었다.
나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교실 앞에 다다라 문을 열려는데, 벌써 선배들이 도착했는지 교실 안에서 고함 소리와 물건이 날아다니는 굉음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싸우는 건가?
문득 드는 생각에 다급하게 교실 문을 연 나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어떻게 좀 해 봐, 사내자식이 그것도 못해?”
“머리 울리니까 좀 조용히 해…….”
“아악, 저거 날잖아아악!!!”
“……뭐 하세요? 다 같이 저 마중 나오신 건 아닐 테고.”
바닥에 넘어져 있는 책상과 의자를 지나 교실 구석을 보니 노아 선배를 필두로 글로리아 선배와 플로라 선배가 기차놀이를 하는 것처럼 줄줄이 몰려 있었다.
나를 발견한 플로라 선배가 푸른 눈에 눈물을 주렁주렁 매달고 더듬거렸다.
“케, 케이트. 저, 저기 벌레가…….”
“에잇, 케이트는 안 돼! 차라리 나를 시켜!”
노아 선배를 방패막이로 내밀고 있던 글로리아 선배가 내 팔을 끌어당겼다. 맨 앞에 선 노아 선배는 지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네가 앞으로 오던지…….”
“싫어!”
“하…….”
노아 선배가 피곤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들 그러시는데요? 저쪽에 뭐 있어요?”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선배들이 주시하고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커튼에 꽤 커다란 벌레가 붙어 있었다. 짙은 색의 몸을 꿈틀거리는데 그 위용이 대단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벌레. 왜 다들 이렇게 겁을 먹는 거지?
“엥…….”
“너, 넌 보지 마.”
글로리아 선배가 양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
저거 그냥 벌레인데요.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선배의 손을 떼어 내다 말고 작게 아, 하는 침음을 흘렸다.
선배들이 다 수도 출신의 귀한 아가씨 도련님들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어떤가. 온통 산과 숲 천지인 시골 남부 영지에서 이리저리 뛰어놀며 자랐다. 당연히 벌레도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무서우세요?”
“…….”
어째 대답이 없었다.
내가 자신만만하게 커튼 쪽으로 다가가자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벌레와 신경전을 벌였다.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을 멈추는 순간,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벌레를 잡았다. 천 너머에서 움직이던 무언가가 일순 굳었다. 벌레가 죽은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나라도 이 감각은 조금 혐오스러웠기에 서둘러 창문을 열고 벌레 사체를 손수건째로 던져 버렸다. 지나가던 사람이 맞지 않았기를 바랐다.
“와아아!”
내가 창문을 닫고 손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보이자 함성이 터져 나왔다. 벌레 하나 잡았을 뿐인데 이런 반응이라니, 조금 머쓱한걸.
“너무 멋있다!”
“결혼하자!”
“죄송하지만 전 임자가 있어서요.”
벌레를 잡았던 손을 탈탈 터는 내게 글로리아 선배가 달려와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잡았어?”
“그냥 잡았는데요.”
나는 태연한 얼굴로 멀뚱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저 벌레 고향에서도 보던 거거든요. 옛날에 빻아서 소꿉놀이도 했었는데.”
“아악!”
글로리아 선배가 가는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플로라 선배는 미간을 꾹꾹 누르고 있었고, 노아 선배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머쓱한 얼굴로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땐 어렸으니까요……. 지금은 안 그래요.”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 앉는데 문득 코가 간질거렸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재채기를 했다.
“헷……츄!”
내 재채기 소리에 좌중이 조용해지더니, 이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재채기……? 방금 케이트가 한 거야?”
“귀여워…….”
“……얼른 시작해요.”
코를 몇 번 문지른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귀엽다니. 안 그래도 부끄러운 재채기 소리인데.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귀엽다는 말이 조금 질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지만.
“흐읍.”
“?”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노아 선배가 가슴팍을 부여잡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이상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마치 태어난 지 10일 된 강아지를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평소에도 나를 귀엽게 여기는 노아 선배였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표정은 처음이라 조금 낯설었다.
……귀엽다는 거 나쁘지 않은 것 같네.
나는 진지한 얼굴로 누가 들었다면 비웃었을 생각을 하며 턱을 괴었다.
* * *
동아리 시간이 끝나고, 나는 책을 챙겨 돌아가려는 노아 선배에게 말했다.
“선배, 오늘은 먼저 가 보세요. 저는 잠깐.”
“? 그래, 나중에 보자.”
노아 선배는 조금 아쉬운 듯 이쪽을 몇 번 돌아보면서도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나는 마주 손을 흔들다 말고 도로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선배 생일에 뭘 해 줄지 고민인데, 그걸 본인이 있는 곳에서 이야기하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는 아직 교실 안에 남아 있는 글로리아 선배와 플로라 선배에게 다가갔다.
“저기, 선배들.”
“응, 귀염둥이?”
글로리아 선배가 그렇게 되물으며 윙크를 했다. 호칭이 조금 거슬렸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선배들 사이에 앉았다.
“조금 있으면 노아 선배 생일이잖아요.”
“아아, 그렇지. 벌써 그렇게 됐네.”
플로라 선배가 손가락을 꼽아 날짜를 계산하더니 입을 벌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글로리아 선배는 턱을 쥐고 고민하듯 침음을 흘렸다.
“우리 막내 생일인데 뭐 해 주지?”
“그러니까요.”
나는 책상에 턱을 괴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설마 선배들도 고전하고 있었을 줄이야.
글로리아 선배가 입을 가리고 킥킥거렸다.
“어, 우리 케이트가 노아스 생일에 뭘 해 주려나 본데? 기특하기는.”
“와, 진짜? 뭔데, 뭔데?”
나는 질문 세례를 하며 두 눈을 반짝이는 플로라 선배를 바라보며 진땀을 흘렸다.
“사실 그걸 잘 모르겠어요.”
노아 선배는 늘 나한테 맞춰 주고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해 줘서, 선배가 정확히 뭘 좋아하는지는 나도 몰랐다. 생일 선물도 그렇고, 뭘 해야 할지 너무 막연했다.
역시 나보다 노아 선배를 오래 알고 지낸 선배들이 잘 알겠지?
“노아 선배가 워낙 호불호가 없는 사람이다 보니…… 뭘 해도 좋다고 할 것 같아서 정말 뭘 해 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노아 선배는 뭘 좋아하나요?”
내가 희망으로 눈을 빛내며 고민을 털어놓자 글로리아 선배가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너는 걔가 뭘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음…….”
선배가 유일하게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티를 내는 게 하나 있지.
나는 턱을 쥐고 고민하며 침음을 흘리다 주저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나?”
손가락을 들어 나 자신을 가리키며 한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오……. 음, 그렇구나.”
플로라 선배는 뭔가 거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글로리아 선배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리다 도로 다물어 버렸다.
“음, 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글로리아 선배가 해괴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엥, 그런데 뭐라고? 걔가 호불호가 없는 것 같다고?”
그 기백에 눌린 나는 기가 죽은 투로 대답했다.
“네, 네, 단 거 싫어하는 것 빼고는요.”
“그 자식은…… 밀크티 먹을 때 홍차에 우유를 타면 온갖 난리를 다 치는 놈인데.”
“엥, 우리 지난번에 홍차에 우유 타서 같이 먹었는데요?”
“민트초코는 눈앞에 들이밀기만 해도 질색하고.”
“네? 그, 그것도 같이 먹었는데요?”
박하사탕 좋아하니까 민트초코도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나는 놀란 얼굴로 어버버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이야, 사랑이네. 사랑이야.”
“민트초코를 먹어 주다니……. 녀석, 생각보다 훨씬 진심이었잖아?”
플로라 선배가 옆에서 박수를 쳤고, 글로리아 선배는 그 옆에서 충격 받은 얼굴로 턱을 쥐고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