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10)

아르한과 화해한 후 가벼워진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도서관 입구 앞에 다다르자 노아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선배의 품에 안겼다.

“선배! 계속 여기 있었어요?”

“아니, 도서관에 조금 있다가.”

“에잇, 그래도 나가서 축제도 즐기고 해야죠!”

수업 안 하고 놀 수 있는 1년에 딱 한 번뿐이 기회인데!

내가 입술을 삐죽이자 선배는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건 너랑 해야지.”

여느 때와 같이 반듯한 그 미소를 보니 나도 모르게 의문이 생겼다.

나 방금 아르한이랑 있다 온 건데. 어제 흔쾌히 허락했던 것도 그렇고, 선배는…… 질투 그런 거 안 하는 건가?

“방금 아르한이랑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나는 까치발을 하고 노아 선배의 금색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선배, 혹시 질투는 안 나세요?”

“나지, 당연히. 여자 친구가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애랑 같이 있는데.”

선배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뭐야, 겉으로 봐서는 티 하나도 안 나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입술을 오므렸다.

“너무 집착하는 남자는 매력 없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거든.”

몸을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춘 선배가 두 눈을 휘었다.

“그래서 네가 부담스러워하거나 싫어할까 봐서 티 안 내려고 했는데, 내가 질투 안 하는 것처럼 보였다니 다행이다.”

나는 얼굴이 조금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선배 방금 뭔가 되게 연상 같았어. 이게 연륜이라는 건가. 그래 봤자 고작 한 살 차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예전에 네가 이별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조금 고민했었어.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나 하고.”

노아 선배가 조금 부끄러운 듯 머뭇대며 말하자 나는 눈알을 도륵 굴렸다.

“제가요? 아…….”

맞다. 플로라 선배가 헤어지고 난 직후에 우리가 헤어지게 되면 어떨 것 같냐고 물어봤지.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괜한 짓이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져 뺨을 만지작거리는데, 선배가 고개를 돌린 채 헛기침을 했다.

“설령 네가 나중에 정말 헤어지자고 하더라도 보내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집착하는 남자는 매력 없다면서요?”

문득 장난기가 일어 그렇게 되묻자, 선배의 하얀 이마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그건 그렇긴 한데…….”

턱을 쥐고 잠시 고민하듯 침음을 흘리던 선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음, 그래도 못 보내 주겠다.”

“뭐야, 이랬다가 저랬다가.”

그래도 이것도 나름 집착이네. 좀 짜릿하다.

입가를 가리고 키득거리던 나는 선배의 팔에 착 달라붙은 채 중얼거렸다.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안 보내 줄 거야.”

“음, 그리고 무엇보다 케이트는 나를 좋아하니까.”

노아 선배가 부드럽게 웃으며 맞잡은 내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에 나는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걔 따위는 자기 상대가 안 된다는 말을 최대한 고상하게 하시네요.”

“하하.”

선배는 의외로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여상한 얼굴로 미소 지을 뿐.

“근데 맞는 말이에요. 나 선배 많이 좋아해요.”

나는 선배의 어깨에 머리를 폭 기대며 푸스스 웃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후원이었다.

서로 손을 꼭 잡고 걸어가고 있는데 저 멀리 요리 동아리 부스가 보였다. 그중 익숙한 흑갈색 단발머리를 발견한 내가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으, 으윽.”

자기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 쿠키를 들고 있는 도라를 보니 머릿속에서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응? 레시피대로 했는데. 조금 뻑뻑한 것 같아서 물 좀 더 넣고 설탕도…… 아, 그게 설탕이 아니라 소금이었나 보다.’

용암 같은 케이크부터 돌처럼 딱딱한 쿠키까지, 나는 도라의 전적을 전부 알았다. 매번 내게 시식해 달라며 내밀었으니 그것들이 아까 다녀온 아르한의 부스에 있는 음료만큼이나 충격적인 맛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어, 케이트! 마침 잘 왔다. 이것 좀 먹어 봐.”

제법 먼 거리였는데도 나를 알아본 도라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나는 겁에 질려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오, 오지 마.”

“어, 노아 선배도 계셨네. 이것 좀 드셔 보세요.”

도라가 겉보기에는, 아니 겉보기에만 멀쩡해 보이는 쿠키를 이쪽으로 들이밀었다.

베이킹 재료로 연금술을 하는 애가 이번에는 또 뭘 만들었을지, 벌써부터 두려워졌다.

밀려오는 혼미함에 두 눈을 꾹 감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노아 선배의 팔을 붙잡고 선배를 뜯어말렸다.

“아, 안 돼. 선배, 도망쳐요!”

“왜, 뭐 어때서. 자, 먹어 봐.”

무해한 얼굴로 자기가 구운 과자를 내미는 도라를 보니 더없는 공포가 느껴졌다.

결국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과자에서 부스러기를 조금 떼어 입에 넣어 보았다.

“? ……과자 맞아?”

아무 맛도 안 나는데.

축제라고 나름 힘을 썼는지 그녀의 전적을 생각해 보면 비교적 멀쩡한, 심지어 맛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쿠키였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 아무 맛도 나지 않아 밍밍했다. 아니, 이게 맛있는 수준이라니 새삼…….

“야, 쿠키는 달아야지. 안 달면 그게 쿠키냐?”

내가 과자를 억지로 꾸역꾸역 힘겹게 삼키며 투덜대자 도라가 순수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엔 너무 질은 것 같아서 밀가루를 좀 더 넣었는데, 별로야?”

도대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하지.

내가 쿠키를 내려다보며 묘한 표정을 짓자 도라가 뭐가 문제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쟤는 정말 모르는 걸까, 자기가 지독한 요리치라는 걸?

“어, 선배는 잘 드시는데? 입에 맞으세요, 선배?”

“!”

도라의 신난 목소리에 나는 옆으로 돌렸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내 옆에 선 노아 선배는 쿠키를 무척 만족스럽게 먹고 있었다. 금색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질 정도였다.

“……아.”

그제야 나는 선배가 단 걸 싫어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노아 선배가 과자류를 저렇게 맛있게 먹는 건 처음 보았다. 매점에서 사 먹는 건 박하사탕이나 물밖에 없고, 내 입에는 하나도 안 단 간식을 줘도 너무 달다고 하는 사람인데.

나는 단숨에 태세를 바꾸고 도라에게 말했다.

“좀 많이 챙겨 주라.”

“아, 그럼.”

도라는 누군가가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었다는 사실에 감격한 모양인지 따로 통을 꺼내서 쿠키를 한가득 담아 선배에게 건넸다.

“맛있게 드세요!”

“그게 맛있어요, 정말로?”

“응.”

내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선배는 쿠키 통을 소중히 품에 끌어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걸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거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넌 싫어할 줄 알았어. 먹어 봐, 이건 내가 만든 거 아니야.”

나를 향해 혀를 쯧쯧 찬 도라가 초코 칩이 박힌 쿠키를 내밀었다. 의심 어린 얼굴로 쿠키를 힐끗거리던 내가 그녀의 마지막 말에 경계를 풀고 쿠키를 베어 물었다.

“우와, 맛있다.”

입 안에 퍼지는 단맛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눈을 빛내며 쿠키를 우물거렸다.

“너희 동아리에 제대로 요리하는 사람도 있었구나.”

“뭐 인마?”

도라가 험악한 얼굴로 주먹을 쥐어 보이자, 나는 재빨리 노아 선배의 뒤로 몸을 피했다.

차마 선배에게 무슨 짓을 하지는 못하고 분한 얼굴로 주먹을 떠는 도라를 보며 나는 킥킥거렸다.

“아, 배고프다!”

나를 노려보며 입 모양으로 ‘너 기숙사에서 보자.’ 하고 중얼거리는 도라의 시선을 피한 내가 딴청을 부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노아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뭘 먹고 싶냐고 물어 왔다.

“음, 저기 뭐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그런데 이거 계속 들고 다니기도 좀 뭐한데 어디다 두고 올까요?”

내가 도라가 준 과자 통을 가리키며 묻자 노아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자. 잠깐 사물함 다녀와도 괜찮아?”

“그래요.”

3학년 사물함에는 좀처럼 올 일이 없었기에, 1학기에 선배 사물함에 편지를 넣으러 온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사귀기 전에 그런 일도 있었지. 추억이다. 그땐 정말 내가 선배랑 이렇게 될지 몰랐지.

나는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에 젖어 흐뭇한 얼굴로 창문 옆 벽에 몸을 기댔다.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시원한 가을바람을 느끼며 사물함에 과자 통을 넣는 선배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어!”

“왜 그래?”

내가 두 눈을 크게 뜬 채 소리치자, 선배가 사물함 문을 닫고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하늘 보세요, 하늘!”

반만 열려 있던 창문을 전부 열어젖힌 나는 불꽃이 터지는 소리에 묻히지 않으려 목소리를 높이고 창밖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선배의 눈이 반짝거렸다.

“!”

어두운 저녁의 가을 하늘 위를 색색의 불꽃들이 수놓고 있었다. 원래는 야외에서 직접 보려고 했는데, 시간을 잘못 맞췄네. 하지만 높은 곳에서 보는 불꽃도 나쁘지 않았다.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이내 잦아들자, 노아 선배의 팔짱을 낀 채 반짝거리는 빛을 빤히 올려다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저거 다 마법으로 한 거겠죠?”

“그렇겠지.”

나는 선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누가 했는지는 몰라도 힘들었겠다.”

불꽃은 이미 쏘아진 후라 마법식을 분석할 수는 없었지만, 모르긴 몰라도 저렇게 다양하고 큰 불꽃들을 하늘까지 쏘려면 꽤 복잡한 마법진을 그려야 할 터였다. 교수님들 고생하시네.

역시 아카데미는 부자 학교였다.

“생각보다 오래 하네.”

“그러게요.”

나는 다시 피어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쳐다보며 선배의 품에 안긴 채 몸을 늘어뜨렸다.

불꽃이 다 사그라들 때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몇십 분간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축제는 별일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예전처럼 살갑지는 않지만 마주치면 인사는 하는 걸 보아 아르한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풀린 것 같고 말이다.

정말 모처럼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흐흥.”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노아 선배의 편지를 뜯었다. 이걸 이제야 읽어 보는구나.

재스민 향기가 살짝 배어 있는 편지지에서는 우윳빛 광택이 났다.

글씨체부터 엄청 우아하네.

“……우와.”

나는 찍어 낸 듯 정갈하고 단정한 글씨체를 보며 감탄했다.

편지 쓰는 법 가르칠 때 써도 될 정도로 편지의 내용은 정석 그 자체였다. 비록 가문의 인장은 없었지만, 마치 가문끼리 오가는 서신처럼 정중하고 예의 발랐다.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날 하루가 어땠는지,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꽤 길게 적혀 있었다. 선배의 필체가 무척이나 섬세해서 꼭 서간체로 된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역시 종류 구분 없이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책상에 턱을 괸 채 편지를 읽어 내리고 있자니 선배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괜히 귀가 달아오르는 것 같아 귓가를 세게 문질렀다.

편지에 그다지 자극적인 내용은 없었는데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어, 그러고 보니…….”

책상 밑으로 다리를 휙휙 움직이던 나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탁상 달력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튀는 색깔의 잉크로 요란하게 표시해 놓은 11월 9일, 노아 선배의 생일이었다.

“흠.”

편지를 아예 생일 카드 겸해서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다 읽은 편지를 고이 서랍에 넣어 두고 침대에 몸을 뉘인 나는 눈알을 도르륵 굴려가며 고민했다.

선배 생일에는 뭘 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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