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은 축제를 즐기러 나온 학생들로 북적였다.
“음료 부스는 어디에 있어?”
주위 학생들에게 몇 번이나 수소문했지만, 음료 부스가 한두 개만 있는 게 아니었기에 아르한이 있는 부스를 찾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난 후에야 나는 가장 구석에 있는 부스에서 익숙한 붉은 머리카락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없는 거지?
부스에 들어선 나는 잔뜩 차 있는 주스 병이며 텅 빈 주위를 흘깃거리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흠흠.”
“……!”
내가 존재감을 드러내려 헛기침을 하자 부스 안쪽에 앉아 있던 아르한이 놀란 얼굴로 일어섰다. 농땡이를 부리던 중인 것 같았다.
“안녕.”
“…….”
나를 마주한 붉은 눈이 작게 떨렸지만 그뿐, 이내 아르한은 조용히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옛날처럼 실실 웃는 얼굴도, 며칠 전 그때처럼 애처롭게 우는 얼굴도 아닌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꾹 다물린 엷은 입술이며 가는 눈매에 새삼 아르한이 차갑게 생겼구나 하고 실감했다.
“웬일이래. 네가 놀지도 않고 여기서 음료나 따르고 있고.”
내가 딱 하나뿐인 의자에 앉으며 말하자 아르한이 고저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수학 쪽지 시험을 망쳐서, 교수님이 추가 숙제 받기 싫으면 여기서 일하라고 하셔서.”
“아, 너답다.”
그가 주황색 액체가 든 병을 흔들며 물었다.
“한잔 줄까?”
“어, 그래.”
주황색이네. 사과 주스인가? 아니면 당근?
호기롭게 주스를 들이키기 전에, 나는 아르한의 표정에 스친 가엾음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입술 사이로 주스가 들어오자마자 머리가 띵해졌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맛에 나는 멍한 얼굴로 잠시 사경을 헤맸다.
“……이거 네가 만든 거야?”
잠깐 말을 잃고 멍하니 있던 나는 토기가 치미는 것을 참으며 어질어질한 머리에 손을 얹고 물었다. 아르한이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교수님이.”
“우웨엑.”
그제야 나는 마음을 놓고 토악질을 했다. 속이 메슥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부스 앞에 줄이 하나도 없더라!
이게 뭐야, 교수님이 만들었다고? 이건…… 이건 절대 주스라고 부를 수 없는데.
경악스러운 얼굴로 주스가 담긴 컵을 바라보는 나를 조금 뚱한 얼굴로 바라보던 아르한이 물었다.
“물 줄까?”
“응, 제발…….”
내가 입을 틀어막은 채 신음하자 아르한이 컵에 물을 따라 내게 내밀었다.
“고맙다.”
탈수 온 사람처럼 물을 꿀꺽꿀꺽 마시던 내가 인상을 팍 썼다.
계속 이 부스에 있던 아르한이 주스가 이렇게 맛이 없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야, 경고 좀 해 주지 그랬어.”
나는 진저리를 치며 주스가 아직 한참 남은 컵을 저 멀리 슥 치웠다. 얘는 또 왜 이렇게 많이 따랐어.
아르한은 대답 대신 묵묵히 주스를 버리고 컵을 치웠다.
“…….”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내 눈치를 보던 아르한이 자리를 피하려는 듯 어물쩍 걸음을 옮겼다.
“……나 잠깐만 어디 좀.”
“어디 가려고. 이리 와서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신 나는 가만히 내 옆자리 의자를 두드리며 엄포를 놓았다.
“추가 숙제하기 싫으면.”
그건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인지, 아르한은 순순히 돌아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나 왜 피해 다녔어?”
내가 다리를 꼰 채 묻자 아르한이 내 눈을 슬슬 피했다.
나는 엄한 표정으로 눈을 두 눈을 부릅떴다.
“대답 안 해?”
“……당연하잖아. 누나도 내가 꼴 보기 싫을 테니까.”
아르한이 내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안 보이는 게 누나한테도 좋잖아.”
“뭔 소리야, 너 설마 내가 진짜로 주스 마시러 온 줄 알아?”
이런 맛의 주스를 먹으러 여기까지 왔겠냐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주황색의 주스 병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르한이 두 눈을 끔뻑거리며 되물었다.
“아니야?”
“아니야!”
고함을 지른 나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네 친구가 너 음료 부스에 있다고 알려 줘서 만나러 온 거야. 이 자식아.”
내 말에 놀란 표정을 짓던 아르한은 다시 내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런 짓을 해 놓고서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얘 뭔가 되게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너를 싫어하지 않으며, 예전처럼 지내고 싶다는 걸 나를 경계하고 있는 섬세한 사춘기 남자애한테는 어떻게 말해 줘야 하나.
“음, 왜 그렇게 생각하지?”
“누나는 그 선배를 엄청 좋아하잖아.”
내가 진중한 투로 묻자 아르한은 순순히 대답을 했다.
“그건 그렇지.”
“그런 둘 사이를 방해한 거니까……. 화났을 거라고 생각했지.”
아르한이 턱을 괴고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니, 그렇긴 한데…….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잖아? 내가 선배랑 깨진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니, 네가 그런 생각도 할 줄 알아?
조금 놀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우울한 표정의 아르한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해.”
우리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싸운 적은 분명 있지만, 그 앙금이 며칠 넘게 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 아르한의 반응은 내게 무척이나 낯설었다.
아르한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하니까 미움 받기 싫은 게 당연하잖아.”
아, 그랬지. 항상 느끼는데 이건 적응이 잘 안 된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애꿎은 컵만 만지작거리던 내가 입을 열었다.
“그, 네가 사람만 안 죽이면 웬만한 건 내가 다 용납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이런 것쯤은 별거 아냐.
아르한은 내 말에 조금 놀란 듯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 그에게 내가 가슴을 두드리며 으스댔다.
“난 너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고작 한 살 차이잖아.”
“어쨌든.”
아르한이 핀잔을 주자 내가 두 눈을 부라렸다.
“또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너도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니까. 나는 편지가 없어진 것보다 네가 날 피해 다니는 게 더 싫어. 섭섭하게 말이야.”
나는 아르한의 이마에 대고 약하게 딱밤을 먹였다.
“10년을 넘게 봐 왔는데, 우리가 남이야?”
“…….”
“물론 네가 한 짓은 좀 음습하고 소름 돋고 찌질하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자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아르한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가 아직도 내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난 아직 완전히 단념 못 했어.”
“알아.”
“그런데 내가 누나 옆에 있어도 돼? 기분 나쁘지 않아?”
“괜찮대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그 말을 삼킨 나는 물이 담긴 컵 표면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면 조금 거리를 둬도 괜찮지만, 그럴 마음 없는데 억지로 피해 다니지는 않아도 돼.”
나는 아르한의 눈치를 살피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나중 가서 마음이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너 안 싫어해. 고작 실수 하나로 너랑 멀어지기도 싫고.”
“…….”
“너는 좋은 애야. 형태는 다르지만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내 한마디에 붉은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이 말을 해 주려고 찾아온 거야.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예전처럼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언젠가는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사실 누나랑 멀어지기 싫어.”
아르한이 우물우물 입술을 움직여 그렇게 말했다. 무게 잡을 때는 언제고 이럴 때는 꼭 애 같았다. 그가 실제로 나보다 어려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 이렇게 조금만 이야기하면 되는 일 가지고 왜 피해 다니고 그랬어. 대화가 이래서 중요한 거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르한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멍하게 앉아 있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에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이리 와.”
“누나……?”
나는 아르한을 끌어안고 너른 등을 두드리며 덧붙였다.
“우정의 포옹이야.”
“누나 진짜.”
아르한은 잠긴 목소리로 투덜거리면서도 벗어나려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렸을 때도 싸우면 이렇게 화해하곤 했다. 물론 어른들이 억지로 시킨 거긴 하지만 제법 효과가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얼마나 힘들었어. 아이, 진짜. 넌 얼른 누나한테 말 안 하고 뭐 했어.”
내 품 안에서 다 큰 열여섯 살짜리 남자애가 작게 어깨를 떨었다.
“또 울어?”
대답 대신 잘게 떨리는 호흡 소리가 들렸다. 나는 키득거리며 아르한의 등을 팍팍 두드렸다.
“너 생각보다 엄청 섬세한 애였구나. 내 앞에서 두 번이나 울었다고 백작님께 확 일러 버려야지.”
“시끄러워…….”
아르한이 투덜대듯 중얼거리자 나는 씩 웃으며 팔에 힘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아르한은 그게 못내 아쉬운 것 같았으나 달리 나를 붙잡으려고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우리 이제 화해한 거지?”
내가 활짝 웃으며 묻자 아르한은 내게 안겨서 운 것이 쑥스러웠는지 발개진 눈가를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복도에서 만났을 때 인사도 좀 하고, 피해 다니지도 말고.”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한 내가 텅 빈 부스 안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오, 이제 아무도 안 올 테니 계속 쉬겠네? 팔자 좋다, 야. 안 들킬 텐데 땡땡이 치고 놀러 가기라도 해.”
“주스 더 안 마실 거면 얼른 가.”
“히익.”
아르한이 장난스레 주스가 가득 단긴 병을 흔들자, 나는 끔찍한 기억에 몸을 흠칫 떨었다.
“얼른 가야겠네. 나 나간다.”
얼른 여기서 나가야겠어.
서둘러 인사하며 고개를 돌려 보니 부스 안의 아르한은 뭔가 시원섭섭한 얼굴로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잘 가, 누나.”
작별을 고하는 목소리는 요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