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10)

* * *

벌써 사물함에 쟁여 둔 초콜릿이 다 떨어져서 매점에 가는 길이었다.

아르한은 나를 벌써 며칠째 피해 다니고 있었지만, 혹시 지금 있을까 하는 작은 희망으로 들른 1학년 교실에서는 역시나 붉은 머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아.”

이러다가 정말 방학이 되어서야 얼굴을 보겠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사물함에 모아 둘 초콜릿을 고르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아르한과 같은 반인 1학년 아이 중 내게 시비를 걸었다가 사과한 여학생이 과자를 들고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아, 진짜.”

이내 교복 주머니를 더듬은 그녀는 돈이 부족한지 짜증스러운 얼굴로 과자를 되돌려 놓았다.

그걸 본 나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초콜릿과 함께 동전 몇 개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같이 계산해 주세요.”

그러자 여학생이 놀란 얼굴로 몸을 돌렸다.

“……선배님?”

“안녕, 시간 괜찮으면 잠깐 얘기 좀 할까.”

나는 손을 흔들며 희미하게 웃었다. 여학생은 당황한 것 같았지만 나와 과자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결심한 듯 나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근처 벤치에 앉은 우리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함에 몇 번 헛기침을 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음, 사실 나랑 아르한이…… 지금 무슨 일 때문에 조금 멀어졌거든.”

“그런 것 같더라고요.”

여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쪽을 곁눈질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걔 선배님한테 차였죠?”

“켁!”

음료를 마시다 사레가 들려 기침하는 내 등을 여학생이 어설프게 두드렸다. 겨우 진정한 내가 작게 기침을 하며 여학생을 돌아보았다.

“어, 어떻게 알았어?”

“그냥…… 얼굴만 봐도 알겠던데요.”

……그 정도냐! 내가 그렇게 심각한 수준으로 눈치가 없었단 말이냐.

여학생의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대답에 나는 회의감이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

“어, 음, 맞아. 그런 일이 있긴 했어. 그런데…….”

본격적으로 입을 여는데, 큰 소리로 수업종이 울렸다.

“아, 이런.”

아직 얘기를 다 못 했는데.

안타까움에 인상을 쓰는 내게 과자 봉지를 만지작거리던 여학생이 말했다.

“음, 저보다는 걔랑 직접 이야기해 보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아마 걘 가을 축제에 음료 부스에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잘 이야기해 보세요. 과자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인 여학생이 멀어져 갔다.

* * *

시간은 금방 흘러가 어느덧 가을 축제 날이 되었다.

가을 축제는 이틀간 이어진다. 첫 번째 날에는 공연을 하고 본격적인 부스는 둘째 날부터 열린다.

안 그래도 나를 피해 다니는데,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테니 오늘은 아르한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대신 그 여학생에게서 음료 부스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니 내일을 노린다.

첫 번째 순서였던 학교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끝나고, 나는 친구들과 함께 맬러리를 만나러 대기실 앞에서 기다렸다.

맬러리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대기실을 나오자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완전 잘했어.”

“하하.”

에코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든 맬러리가 웃으며 코를 긁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럼 난 선배한테 가 볼게!”

맬러리의 공연도 끝났겠다, 친구들에게 인사를 한 나는 노아 선배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학년 구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섞여 있었지만 우리 선배야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났으니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선배! 방금 공연 보셨어요?”

구석에서 노아 선배를 발견한 나는 익숙하게 선배의 품에 안겨 들며 조잘거렸다.

“제 친구가 오케스트라 소속이거든요, 방금 공연에서 바이올린 연주한 게 걔예요!”

“그래?”

내가 뿌듯한 얼굴로 자랑하자 노아 선배가 내 뺨을 살짝 꼬집었다. 그리고 내 옷차림을 살피더니 반듯한 미간을 조금 구겼다.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 또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헤헤, 그럼 선배가 안아 주면 되겠네!”

내가 엄청난 해답이라도 찾아 낸 것처럼 소리치자 선배는 못 말리겠다는 듯 나를 꼭 끌어안았다.

너른 품에 안겨 노아 선배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니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아, 맞다. 편지는 사정이 있어서 아직 못 읽었어요.”

“괜찮아. 네가 읽고 싶을 때 읽어.”

그렇게 말하는 노아 선배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뭐야, 대체 뭘 썼길래 내가 아직도 못 읽었다는데 좋아해? 엄청 창피한 건가? 막 오글거리는 거?

아, 그러고 보니 아르한 일은…… 말해야겠지? 선배는 내 연인이니까.

속으로 생각하며 선배의 가슴에 기대 있던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하곤 입을 열었다.

“저 얼마 전에 고백받았어요.”

“……그래? 그렇구나.”

노아 선배가 놀란 얼굴로 두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쳤다.

“역시 그렇게 놀랍지는 않네.”

“생각보다 반응이 미적지근하네요……?”

여자 친구가 고백을 받았다는데.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리자 선배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처럼 착하고 예쁜 애는 당연히 인기가 많을 테니까.”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풉, 선배 말고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요.”

“글쎄, 그럴 리가 없는데.”

이렇게 예쁜데.

양손으로 내 뺨을 쥔 노아 선배가 내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게 너무 웃겨서 그만 푸흐, 웃고 말았다. 나랑 반대로 선배는 진지해 보여서 조금 미안했다.

키득거리던 나는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했다.

“어쨌든 여기서 문제는 그게 누구냐는 거지.”

“…….”

“그래서, 누구야?”

노아 선배가 내 턱을 살며시 쥐는 것과 동시에 나를 마주한 금색 눈동자가 불현듯 빛을 냈다.

그게 어쩐지 조금 섬뜩한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황금색 눈은 이내 평소의 다정한 눈빛을 머금었다. 아마도 내 착각이었나 보다.

“아르한…… 제 아는 동생이요. 아, 고백은 당연히 거절했어요!”

나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우물우물 말을 꺼냈다.

일부러 편지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걔랑 다툼 비슷한 게 조금 있었거든요.”

다툼이라기보다는 아르한 쪽에서 나를 일방적으로 피해 다니는 거긴 하지만.

머뭇거리던 내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래서 내일 잠깐 걜 만나고 와야 할 것 같아요. 아르한은 계속 저를 피해 다니니까…… 내일밖에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

“괜찮을까요……?”

선배로서는 충분히 섭섭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눈썹을 내려뜨린 채 애처로운 표정으로 노아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둘이 만나서 잘 풀고 와. 대신 저녁은 나랑 먹자.”

선배가 내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르며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나는 두 손으로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불꽃놀이는 꼭 같이 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