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아르한 히리스
나는 항상 누나 옆에 있었다. 내 키가 누나 키보다 한참 작았을 때도 나는 거기에 있었다. 누나가 첫사랑이라는 걸 하고 그 때문에 울었을 때도 나는 거기에 있었다.
내 시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분명 누나였다.
* * *
우리 가문과 블레어 자작가는 오랜 인연이 있었다. 그냥 옆 영지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어머니와 자작도, 나와 누나도 많이 친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아버지와 싸울 때마다 소꿉친구 디안 블레어에게 연인만 없었더라면, 그가 후계자만 아니었다면 그를 남편으로 맞고 백작 부군 시켜 주었을 거라며 한탄하곤 했다. 그럼 아버지는 그 얘기 좀 그만 하라며 짜증을 냈고.
확실히 유부녀가 딸까지 있는 사별남을 상대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치껏 식사를 남기고 내 방으로 돌아간 뒤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이쯤 되면 우리 집안 사람들에게 블레어 가문 사람을 사랑하는 내력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 * *
사실 내 마음을 자각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좋아하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된 것 같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다만 언젠가부터 종종 느꼈던 심장의 떨림이, 그 초록색 눈이 웃음을 담고 휘어질 때마다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만은 느끼고 있었다.
때는 열다섯 살, 누나가 아카데미에 가서 나 혼자였던 해의 어느 후텁지근한 여름밤에 누나가 꿈에 나왔다.
왜 그러냐 묻는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어울리지도 않게 질척하게 웃는데……. 아, 진짜 하나도 안 어울리는데도 진짜 예뻐서.
내 손을 살며시 잡아 오며 웃는 얼굴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평소라면, 아니, 진짜 누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생전 처음 꿔 보는 꿈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결국 애먼 새벽에 눈을 뜬 나는 생각했다.
나 누나 좋아하는구나.
그때부터 생각했다. 누나의 곁에 있고 싶다고. 아무리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탓에 내가 남자로는 안 보인다고 해도, 계속 옆에 있으면 언젠가는 나를 봐 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얼마 후 공부에 소질도 없고 흥미도 없던 내가 대뜸 아카데미를 가겠다고 선언하자 부모님은 들고 있던 식기를 떨어뜨렸다.
공부는 언제나 싫었지만 남은 3년 동안 누나를 아예 못 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 일념 하나로 이를 악물고 공부한 끝에 결국 나는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누나가 웃으며 꽃다발을 들고 온 입학식 때만 해도 모든 게 완벽했다.
그런데 난 몰랐지, 그 뒤로 웬 샌님 같은 놈을 달고 있었을 줄은.
“저 사람 좋아해?”
“……어떻게 알았어?”
하얀 얼굴을 순정으로 새빨갛게 붉히고 얼이 빠진 듯 되묻는 누나의 그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 아닌데도, 그저 한없이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숨겨야 했기에 나는 웃었다. 그리고 뒤에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건 예상치 못했던 일인데.
누나가 어릴 적부터 예쁜 걸 좋아한다는 건 알았다. 그 때문에 별 이상한 놈에게 코가 꿰인 적도 있었지만, 걱정은 할지언정 그에 대해 크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말 그대로 정말 별 볼 일 없는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남자가 봐도 정말 예뻤기 때문에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가 좋아할 만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리고 정확히 입학식 다음 날부터, 나는 누나에게 좋아한다는 티를 내기 시작했다. 플러팅이라고 하지, 아마?
위기의식 탓에 조바심이 들어서인지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창피한 것들도 많았다. 다행히 누나는 1년 동안 떨어져 있다 보니 많이 보고 싶었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아니, 나도 참.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데 말이다.
그래도 지난 1년간 떨어져 있던 누나를 거의 매일 보니 좋았다. 가끔씩 그 선배를 보는 누나의 얼굴을 보면 ‘왜 나는 안 되는데?’ 하는 의문이 들었고 실제로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누나의 취향만큼 예쁘지 않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누나가 날 좋아하지 않으니까. 누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니까.
이 얼마나 간단명료하면서도 잔인한 사실인가.
머릿속을 잠식하는 비참함에 입술을 꽉 깨물자 이내 비린 맛이 났다.
* * *
내 걱정과는 다르게, 누나와 그 선배의 관계에는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애초에 누나가 티를 내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기도 했지만, 그 선배라는 사람도 영 어리숙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안심했다. 어차피 2년만 있으면 그 사람은 졸업할 테고, 바로 옆 영지에 있는 누나와 나는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테니까.
어느 순간부터 그 선배가 나와 같은 눈으로 누나를 바라보는 걸 알았지만, 크게 절망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나는 알았으니까. 누나는 연애에 대한 눈치가 0에 수렴하는, 공부만 잘하는 귀엽고 예쁜 바보라는걸.
……귀여워 가지고는.
하지만 그게 귀엽다는 것 말고 다른 장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속만 터지면 터졌지.
그렇게 절절하게 좋아하는 짝사랑 상대가 자신에게 푹 빠져 있는 걸 제3자가 봐도 알겠는데, 귀엽지만 눈치 없는 누나는 정작 그걸 몰랐다.
‘……마음에 안 들어.’
누나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막연하게 싫었다. 조곤조곤한 말투며 차분한 목소리, 초연한 표정까지 나와는 너무 달라서. 그런데 누나랑 있는 걸 보면 나보다 나은 사람인 것 같아서.
그래서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었다.
복에 겨워서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 만약 내가 그 사람이었다면, 반짝반짝 빛나는 그 눈을 보자마자 당장에 안아 주고, 좋아한다고 말해 주고 바로 사귀자고 했을 텐데.
누군가가 이렇게 싫은 것도 부러운 것도 처음이었다.
아, 진짜. 왜 나는 안 되는데?
나는 인상을 쓰며 짜증스레 입술을 깨물었다.
* * *
그래도 둘은 아직 사귀는 사이가 아니니, 내게도 기회가 남아 있다고 믿던 내 희망이 얼마 후 완전히 부서졌다.
어느 주말 저녁 기숙사 앞이었다. 옅은 불빛에 비친 둘은 서로를 안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모로 봐도 한 쌍의 다정한 연인이었다.
나는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고 빛이 비추는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둘 다 이쪽을 보지 못했으니 그럴 리가 없겠지만, 두 사람이 환하게 짓는 그 미소가 너는 절대 이 사이에 낄 수 없다고 내게 알려 주는 것 같았다.
누나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돌아설 무렵,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멀리서 누나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지만 지금은 그녀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언제부터 저런 사이였던 거지?
내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지은 적 없는 그 웃음을 떠올리자 다시 심장이 쿡쿡 찌르듯 아파 왔다. 나는 작게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
그 후로 나는 누나를 피해 다녔다.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어? 그렇게 많이 좋아해? 나도 누나 좋아하는데, 왜 나는 안 돼?
누나 얼굴을 보면 가까스로 참고 있던 질문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질 것 같아서.
누나는 눈치가 없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만약 둘이 사귀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어렴풋이 고민해 본 적도 있는데, 막상 그게 현실이 되니 눈앞이 막막했다.
이제 나는 어쩌지? 어떡하면 좋지? 이대로 조용히 모든 걸 숨기고 지금처럼 누나를 대해야 하나?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누나를 포기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도 숨겨 왔는데, 이대로 내 마음을 지워 버리라고? 그리고 누나와의 시간을 전부 없었던 일이라 치라고?
그렇게는 못 하지.
나도 알리고 싶었다. 누나와 다른 관계가 되고 싶다고. 지난 1년간 입 밖에도 내지 못하고 꾹꾹 눌러 담아온 말들을 당장에라도 쏟아붓고 싶었다.
안 될 거라는 걸 알지만, 가망 없는 마음인 걸 알지만, 그 결과를 예상하면서도 말해 보고 싶었다. 많이 좋아했다고. 지금도 좋아한다고.
그렇다고 해도 편지를 훔친 것은 치졸한 짓이었다. 나도 안다.
하지만, 그땐 많이 절박했단 말이다. 딱 한 번이라도 제대로 티 내 보고 싶어서. 둔한 누나가 알아차릴 만큼.
“……네가 왜 여기 있어?”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누나를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고, 그 다음엔 멋대로 입이 열려 횡설수설했다.
제발 애 취급 좀 그만하라고. 나는 결국 누나한테 아는 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냐고.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갈수록 누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좋아해.”
마침내 내가 고백하자 누나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나는 너 안 좋아해.”
“!”
이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그랬다. 그런 반응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지?
도망치듯 교실을 빠져나온 나는 벽에 힘없이 몸을 기댔다. 입맛이 썼다.
나도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적어도 멀쩡한 상태로 뭐라도 선물로 주면서 평범하게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싶었는데.
그쳤던 눈물이 다시 나려고 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예전에는 누나를 생각하면 설레고 두근거렸는데, 지금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아 괴로웠다.
아무래도 이제 다시는 누나 얼굴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네가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애 취급을 안 해.’
누나의 그 말이 가슴에 콕콕 박혔다.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이었다. 내가 누나 마음에 들 만큼 멋지고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거기다 안 그래도 가망이 없었는데, 그런 짓까지 했으니 누나가 내게 실망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
이 한심한 놈.
나는 벽에 몸을 기댄 채 짓물러 따가워지기 시작하는 눈가를 비볐다.
아르한의 고백 바로 다음 날, 사물함에 노아 선배의 편지가 돌아와 있었다. 열지도 않았을뿐더러 흠집이나 접힌 자국 하나도 없었다. 답지 않게 관리를 깔끔하게 잘 한 모양이었다.
그토록 고대하고 있던 노아 선배의 편지였지만, 지금의 심란한 마음으로는 제대로 읽을 수도 없을 것 같았기에 아직 편지 봉투를 뜯지 않았다.
아직 시험까지도 많이 남았겠다, 가을 축제를 앞두고 아카데미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느슨해졌지만 나는 그 분위기에 좀처럼 섞여 들지 못했다. 우리 동아리는 부스를 열지 않아서 그냥 축제를 즐기기만 하면 되는데도.
아르한이 나를 좋아한다니, 전혀 몰랐어. 이제부턴 걔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지?
분명 그 애가 잘못한 게 맞는데, 그 눈물로 젖은 그 얼굴을 떠올리니 꼭 내가 잘못한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아려 왔다.
아르한을 이대로 잃고 싶지 않았다. 가문끼리의 관계는 둘째 치고, 그는 내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 다른 의미기는 하지만 노아 선배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이란 말이다.
“얜 또 왜 축 처져 있어.”
축제에서 공연할 곡을 연주하던 맬러리가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 미안. 들어 주기로 했는데.”
나는 내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왜, 또 노아 선배랑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뭐…….”
“편지는 찾았다면서.”
“으응.”
어느새 친구들이 내 주위에 둘러 모였다.
“사실 그…… 아는 동생, 아르한이랑 사이가 조금 어색해져서.”
나는 몸을 수그리고 소심하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의자 위에 늘어져 있던 에코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아, 걔가 고백했어?”
“뭐?! 너, 너 어떻게 알았어?”
고개를 홱 돌린 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묻자 에코가 무척이나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딱 보면 알지. 걔가 너 좋아하는 거. 1년 넘게 봐 왔는데, 내가 너만큼 눈치 없는 것도 아니고 그걸 모를까.”
“왜, 왜 그걸 말 안 했어?”
“네 짝사랑이 아주 절절했는데 그걸 뭐 하러 말하냐?”
“아.”
그건 그렇고.
나는 조금 상처받은 얼굴로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나, 나 그렇게 눈치 없어?”
“응.”
“응.”
“응.”
내 물음에 에코와 맬러리와 도라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쁜 놈들.
하려던 말도 잊은 채, 나는 멍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너 처음 봤을 때 똑똑한 줄 알았는데 그냥 공부 머리만 좋은 거였어.”
“내 생각에 너는 공부 못 했으면 큰일 났다.”
여기저기서 비수 같은 말들이 날아왔다.
“……됐어, 너희한테 얘기 안 해!”
쏟아지는 매도에 나는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흥, 내가 말할 사람이 자기들밖에 없는 줄 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