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10)

* * *

착각한 거 아니냐고 몇 번씩이나 물었지만 여학생은 단호하게 아니라 대답했다. 맹세코 편지 비슷한 것도 본 적 없단다.

그녀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그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알겠다고 한 뒤 두 팔 가득 학용품을 들고 교실로 돌아왔다.

“찾는다, 반드시 찾는다……. 찾아서 죽인다.”

“지금 나만 데자뷔 느껴?”

에코가 연신 다리를 떨어 대는 내 쪽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아니, 누가 훔쳐 간 게 확실하다고. 편지…… 편지 어떡할 거야.”

창문 쪽을 빤히 바라보던 도라가 험악한 기세로 이를 부득부득 가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야, 저기 너희 선배 왔다.”

“선배?!”

고개를 돌리자 정말 노아 선배가 창문 너머로 교실 안을 빼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으로 되돌아온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달려갔다.

“선배! 무슨 일이에요?”

내가 들뜬 얼굴로 교실 문을 열어젖히자, 노아 선배가 미소 띤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고 싶어서 왔지.”

“으으응. 나도 보고 싶었어요.”

그에 나는 배시시 웃으며 선배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내 머리카락을 만지며 뜸을 들이던 노아 선배가 입을 열었다.

“편지는 읽었어?”

“……아.”

당연히 못 읽었다. 없는데 어떻게 읽어.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니까 나도 읽고 싶었다고!

“읽었…… 숙제하느라 바빠서 아직 못 읽었어요.”

억울함에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억누른 나는 짐짓 부끄러운 얼굴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그나저나 예전부터 엄청 물어보네. 엄청 열심히 썼나 보다.

노아 선배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어물쩍 입을 열었다.

“저기, 그…… 바쁘면 안 읽어도 괜찮아.”

뭐야, 창피한가? 뭐라고 썼길래. 계속 그러면 더 읽고 싶은데.

“아니요! 읽을 건데요!”

“으응.”

내가 씩씩하게 대답하자 노아 선배는 조금 부끄러운 듯 내 눈을 피했다.

“……내 앞에서는 읽지 말아 줘.”

“알겠어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선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일 있어? 수업이 많이 힘들어?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은데.”

“……아.”

도둑이 자꾸 사물함을 털어 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선배라면 분명 엄청 걱정할 테니까. 선배도 자기 공부하고 수업 들어야 하는데, 괜한 걱정을 시키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생각하니 얼른 그 도둑놈을 잡아야겠다는 투지가 불타올랐다.

“네, 좀 힘들어요.”

나는 짐짓 우울한 얼굴로 걱정스러운 표정의 노아 선배에게 두 팔을 뻗었다.

“선배가 안아 주면 힘이 날지도?”

“이리 와.”

못 말리겠다는 듯 살짝 웃은 노아 선배가 나를 아프지 않게 꽉 끌어안았다.

나는 천 너머 살갗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살며시 눈을 감았다.

셔츠로 감싸인 너른 품 안에 안겨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자니 못할 게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너 뭐 해?”

내가 서랍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자 도라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미끼를 놓는 거지. 이걸 선배가 써 준 편지인 척 사물함에 넣어 놓고 범인이 훔치러 오면 딱 나가서 잡는 거야. 어때?”

“오…… 바보 같아.”

“야!”

도라가 신랄하게 비웃자 꽥 소리를 지른 나는 머리를 긁으며 봉투를 봉했다.

“안 통하면, 뭐…… 그때 가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고. 일단 해 봐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열심히 사물함에 넣어 둘 물건을 정리하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도라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 편진지 뭔지 있잖아, 혹시 노아 선배가 사물함을 착각한 거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우리 선배가!”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도라를 째려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사이 나는 도로 책상으로 눈길을 돌렸다.

미끼는 없어져도 괜찮은 노트 몇 권과 노아 선배의 이름은 쓴 편지.

아마 선배의 편지를 훔쳐 간 그놈은 이것까지 가져갈 거다.

안에 미끼들을 넣고 사물함 문을 닫은 나는 자물쇠에 마법진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똑같은 마법진을 내 손등에도 그렸다. 어제 책을 뒤져서 겨우 찾아내 익힌 마법이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만지면 신호가 올 거다.

마침 점심시간이니, 요 근처에 대기하고 있어야지. 하루쯤은 매점 안 가도 괜찮아.

나는 어제 사 두었던 사탕을 쪽쪽 빨며 사물함에서 안 보일 정도로 먼 위치에 있는 기둥에 몸을 기댔다.

“하암.”

몇 분쯤 지났을까. 책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네. 생각보다 지루한데.

쩍쩍 하품을 하며 바닥에 쪼그려 앉는 그 순간, 손등의 마법진에서 빛이 났다. 누군가가 자물쇠를 건드렸다는 신호였다.

누굴까? 여학생이겠지? 1학년? 2학년? 3학년? 설마 4학년은 아니겠지. 공부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어…….”

내가 바람처럼 달려간 곳엔 내 바로 옆 사물함을 쓰는 애가 있었다. 자기 사물함을 열려다가 실수로 내 사물함 자물쇠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에이, 허탕 쳤네.

마법진을 초기화한 나는 입 안의 사탕을 이빨로 깨물어 부수며 몸을 돌려 다시 기둥 뒤로 향했다.

그대로 몇 분 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니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았다.

“하아암.”

하품이 나올 무렵 다시 손등에서 빛이 났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려 오는 다리를 무시하고 사물함을 향해 달려갔다. 내 달리기가 조금 느려서인지, 내가 갔을 때는 사물함 앞에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는 허탕이 아니었다. 사물함은 반쯤 열려 있었고, 그 안의 편지가 사라져 있었으니 누군가가 훔쳐 간 건 확실했다.

게다가 다행히도 근처 교실의 문이 빼꼼 열려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섰다. 역시나 누군가가 서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단풍만큼 붉은 머리카락. 그 머리칼의 주인은 아주 익숙한 사람이었다.

나는 뱁새눈을 뜨고 아르한을 바라보았다.

“……아르한? 너 여기서 뭐 해?”

너희 교실도 아닌데.

내 질문에 아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놀란 얼굴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

나를 담은 붉은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교실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잠깐만, 너…….”

멍하니 서 있는 아르한의 손에는 하얀 편지지가 들려 있었다.

이내 상황 파악을 한 내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아르한 네가 왜 여기 있는 건데? 그것도 그 편지지를 가지고?

나는 얼굴을 굳히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그걸 왜 가지고 있어? 내 사물함 연 거 너야?”

아르한은 창가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다시 물었다.

“노아 선배 편지도 네가 가져간 거야?”

“…….”

“대답해, 나 지금 믿고 싶지 않거든.”

나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억눌렀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무리 장난이라고 해도 이건 정도가 심했잖아, 이 자식아.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그렇게 말하고 나니 거짓말처럼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애가 무슨 길바닥 용병처럼 굴고 다니긴 해도 나쁜 애는 아니다. 무슨 나쁜 의도가 있어서 저런 것은 아닐 터였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어휴, 그래. 장난이겠지. 뭐 이런 장난을 치고 있어, 이 웃기는 놈. 답지 않게 무게나 잡고.

겨우 화를 가라앉힌 나는 피식 웃으며 아르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식, 들킨 게 그렇게 민망해? 됐어, 난 또 누가 악의적으로 그런 줄 알았네. 이리 내.”

“…….”

아르한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뭐 해? 이리 줘.”

내가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돌려 달라 손짓하자, 그제야 아르한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꼭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였다.

“……왜 그렇게 말하는데.”

“뭐?”

“왜 장난이라고 생각해?”

이상한 말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설명을 부탁하듯 눈썹을 찡그렸다.

“차라리 화를 내.”

방금까지 멍했던 붉은색 눈동자가 분노로 불타올랐다. 창가에 서 있던 아르한이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누나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행동해?”

턱,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내 어깨를 부서져라 세게 쥔 아르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제발 애 취급 좀 그만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아르한의 팔에 조심스레 손을 얹으며 미간을 좁혔다.

“야,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

“나 누나 좋아해.”

아르한이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내 말을 끊었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그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고백에 할 말을 잃은 나는 두 눈을 홉뜬 채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뭐라고?”

“혹시 또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연애 상대로 좋아하는 거 맞아.”

아르한은 붉어진 눈가를 문지르며 목멘 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참 전부터 좋아해 왔어.”

“……하, 어, 아.”

나는 정체불명의 소리를 내며 입을 가렸다. 평소라면 아르한의 농담으로 받아들였을 텐데, 지금은 전혀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웃음기도 전혀 없고 목소리도 낮았다.

“어, 어떡해.”

비록 학년은 다르지만 아르한과 나는 가장 친하고 오래된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가끔 의지할 수 있고 같이 있으면 재밌는 친구. 우리 사이에는 우정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네가 나를 좋아한다니, 한참 전부터 좋아해 왔다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 내가 너한테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한 거야. 난 그것도 모르고 지금껏 무슨 짓을…….

입을 틀어막은 내가 신음을 내듯 중얼거렸다.

“몰랐어,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지 마. 더 비참하니까.”

고개를 숙인 아르한이 이를 뿌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란 눈으로 뻐근한 어깨를 문질렀다.

아르한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내 앞에서는 항상 유쾌하게 웃고만 있던 애였는데.

지금은 이례적인 상황이라는 걸 알았지만, 나를 노려보다시피 하는 웃음기 없는 붉은 눈동자에 조금 섭섭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언제부터였는데?”

“잘 기억 안 나. 아마 열두 살?”

“…….”

아르한의 대답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럼 3년도 더 된 거잖아.

“나는, 누나랑 같은 아카데미 다니고 싶어서 관심도 없던 공부도 했어. 합격했을 때 누나 볼 생각에 얼마나 설렜는지 몰라.”

숨을 고르는 듯 침묵하던 아르한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입학하고 보니까 누나가 다른 사람을 보고 있더라.”

“…….”

“지금 둘이 사귀는 사이인 거 알아. 그때 봤어.”

“아…….”

나는 땀으로 축축한 손바닥을 교복 치마에 문질러 닦았다.

“나, 난 그 선배랑 달라서 배려심도 없고 이기적이야. 누나가 좋아할 만큼 예쁘지도 않고. 그 사람보다 잘난 건 하나도 없지. 그것도 알고 있어.”

조금 진정한 줄 알았는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아르한의 목소리가 다시 떨려 왔다.

“그래도 내가 많이 좋아해. 누나가 좋아.”

붉어진 얼굴하며 젖어 있는 목소리, 흔들리는 시선.

훌쩍이며 그렇게 고백해 오는 아르한은 능글거리던 평소와는 다르게 꼭 어린 소년처럼 보였다.

뚝뚝 끊기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르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머리가 닿아 있는 어깨가 간질거렸다.

“내가, 그 사람보다 더 먼저 누나를 좋아했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아르한에게서 불과 몇 달 전의 내가 겹쳐 보였다.

짝사랑이 어떤 건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사람에게 다른 짝이 있는 게 얼마나 절망적인지도.

그래서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아르한의 감정은 짝사랑으로밖에 남을 수 없을 것이다.

“나 한 번만 봐 주면 안 돼, 제발?”

내 손을 부여잡은 아르한이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애원하듯 그렇게 속삭였다. 붉은색 눈동자가 눈물로 젖어 있었고 눈가는 빨갰다.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검술학부의 힘으로 꽉 잡힌 손이 아팠지만 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던 나는 무력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야…….”

“알아, 누나가 무슨 말 할지 아는데…….”

뜨거운 눈물방울이 내 손등 위로 뚝뚝 떨어지자,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아르한이 무언가를 참는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발개진 눈가가 눈에 들어왔다.

“누나가 좋아하는 게 그 사람이 아니라 나였으면 좋겠어.”

“…….”

“좋아해. 아직도 많이 좋아해. 포기 못 하겠어.”

그동안 억눌러 왔던 것을 쏟아 낸 듯한 그의 얼굴이 붉어졌는데, 울어서인지 아니면 부끄러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게 파고들었다.

겨우 숨을 들이쉰 아르한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나 얼굴 보면 못 참고 이렇게 다 말해 버릴 것 같았어. 그래서 피해 다닌 거야.”

숨을 잠시 고른 그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누나는 이제 사귀는 사람이 있잖아. 그런데 나는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도 축하해 줄 수도 없으…….”

아르한은 결국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잦아들자, 우리 둘뿐인 교실 안에는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들렸다.

“아르한.”

나는 애써 진정시킨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 나는 너 안 좋아해.”

되도 않는 희망 고문보다는 확실하게 끊어 내는 편이 아르한에게도 좋겠지. 일말의 희망을 붙잡고 마음을 이어 나가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아니까.

“정말 미안해. 그런데 네가 이렇게 행동하는데 어떻게 애 취급을 안 해.”

얘가 나를 좋아하는 걸 눈치 못 챈 건 그런 거고, 내 편지를 가져간 건 별개의 문제지.

그렇게 생각하니 냉정해질 수 있었다.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은 나는 짐짓 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랑 사귄다고 해서 이런 짓을 하는 게 말이나 되니?”

내 앞에 선 아르한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흘러내린 노란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어쨌든 미안해……. 나는 널 그렇게 생각해 본 적 한 번도 없어. 너라면 얼마든지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고, 어…….”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더듬다가 끝내 말을 멈추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아르한처럼 나와 가깝고 친한 사람이 이렇게…… 이런 짓을 했을 때는 뭘 어떻게 쳐 내야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아예 남이라면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이 마음 편하게 욕이라도 해 주는 건데.

범인이 아르한인 것보다는 노아 선배를 좋아하는 모 여학생인 편이 더 나았을 것 같다.

“그래서 노아 선배 편지는 왜 가져간 거고?”

“……억울해서. 인정하기 싫었어.”

내가 침묵을 깨고 묻자 아르한이 순순히 입을 열었다.

“안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으로 발악해 보고 싶었어.”

“…….”

“터무니없는 방법인 건 알지만, 이렇게라도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

아르한의 한숨 소리가 작게 떨렸다. 눈물을 닦아 낸 붉은색 눈동자는 빛 한 줄기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가 짓무른 눈가를 비비며 나를 지나쳐 교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놀란 얼굴로 아르한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야, 너 어디 가…….”

“미안해, 미안. 그 편지도 돌려줄게. 그럼 됐지? 나가 볼게. 지금은 더 못 하겠어.”

꽉 쥐고 있던 탓에 잔뜩 구겨진 편지지를 내 손에 쥐여 준 아르한은 그렇게 횡설수설 중얼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나섰다.

그가 완전히 교실을 빠져나가고, 교실 문이 탁 하는 소리를 내며 닫히고 나서도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몇 분 후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릴 무렵에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교실을 나올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