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10)

* * *

“같이 가자, 응?”

나는 에코의 팔을 잡아당기며 졸랐다.

지금부터 오랜만에 아르한을 만나러 갈 생각인데, 혼자 가기엔 예전에 마주쳤던 그 1학년 여학생이 조금 무서웠다.

“아, 싫다니까. 걔 만나러 가는데 나는 왜…….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그리고 난 걔 좀 그렇단 말이야.

에코가 내 팔을 뿌리치며 중얼거렸다.

“아, 같은 남부인들끼리 무슨. 제발, 1학년 층에 혼자 가기 민망하단 말이야.”

나는 두 손을 모은 채 에코를 올려다보며 두 눈을 반짝거렸다.

“응? 응? 응?”

“아…… 알았어. 마침 나도 동아리 교실 가야 하니까.”

“예!”

내 애원에 에코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그녀의 팔짱을 꼈다.

“얼마 전에도 걔 보러 가더니.”

“응, 그랬는데 교실에 없더라고.”

가뜩이나 학년이 달라서 잘 못 보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엇.”

“왜?”

1학년 층에 도착한 내가 갑자기 멈춰 서자 에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에 내게 시비 아닌 시비를 걸었던 여학생이 또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또 오셨네요.”

“어어, 으응. 또 보네.”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파드득 떨었다가 에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하하,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고?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여학생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

“야, 제대로 사과해!”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학생이 눈을 부릅뜨며 빽 소리쳤다.

“아 알았! 다고…….”

다시 소리를 지르려던 여학생은 나를 보더니 찔끔 꼬리를 말고 중얼거렸다.

왠지 지난번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난번 일은 제가 사과할게요. 뭘 좀 오해했던 것 같아요.”

그녀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동작으로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걔가 그렇게 화내는 건 처음 봤네요.”

이건 뭔 소리야?

눈썹을 꿈틀거리던 나는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그래.”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까부터 가만히 서 있던 에코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나는 교실 안을 힐끔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보다 아르한은 오늘도 없니?”

“네.”

“아…… 내가 왔었다는 건 전해 줬고?”

“네.”

“거참 이상하네.”

사실 아르한이라면 내 사물함을 털어간 도둑을 잡을 수를 내놓아 주지 않을까 싶어서 하소연하러 왔던 건데. 애가 약삭빠른 게 은근 머리가 좋단 말이야. 그걸 공부에 안 써서 그렇지.

그런데 오늘도 없다니, 얜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람?

“어휴, 얜 왜 내가 올 때마다 없는 거래. 어쨌든 고마워. 이만 가 볼게.”

나는 묘한 얼굴로 서 있는 여학생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아, 요즘 걘 올 때마다 없어. 왜 그러지, 갑자기?”

내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리자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에코가 처음으로 말했다.

“글쎄, 네 눈치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건 알겠다.”

“뭐? 갑자기 왜 시비야?”

“아, 다 왔네. 나는 가 본다.”

내가 인상을 팍 찡그리자, 에코가 동아리 교실로 들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 쟤가 비겁하게.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다 말고 마저 걸음을 옮겼다.

“하아.”

정말 어떡한담. 막상 방법을 찾아보려니 생각이 안 나네. 보안 마법을 익혀야 할까?

고민하며 복도를 걸어가는데, 마침 지나는 길에 사물함이 있었다.

볼일이 없었기에 그냥 지나가려 하는데, 동그란 안경을 쓴 한 여학생이 사물함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주위가 무척 한산해 그 모습이 잘 보였다.

그런데 쟤 어째…… 내 사물함으로 향하는 것 같은데.

눈을 게슴츠레 뜨고 상황을 주시하던 나는 일단 본능적으로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저 애가 내 사물함을 턴 범인이 맞는다면 일이 생각보다 빨리 풀리게 되는 건데.

그사이 여학생은 정확히 내 사물함 앞에서 멈춰서더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역시 맞았어! 저, 저 도둑놈!

숨을 죽인 채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내가 냅다 달려 나가며 소리쳤다.

“야, 너 뭐 해!”

사물함을 향해 달려 나간 내가 여학생의 손목을 홱 잡아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어, 어?”

내가 공격적으로 묻자 여학생의 눈이 당황으로 파르르 떨렸다.

하, 발뺌할 생각인가. 소용없어, 자물쇠를 열려고 하는 것까지 다 봤다고.

“그냥…… 내 사물함에 이거 넣으려고 했는데.”

내 손아귀에서 제 손목을 비틀어 뺀 여학생이 다른 쪽 손에 있던 책을 소심하게 들어 보였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네 사물함? 무슨 소리야, 이건 내 사물함인데.”

“내, 내 사물함인데?”

여학생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우물거리자, 나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서 사물함에 손을 얹었다.

“이건 내 사물함이야. 네 사물함 번호가 뭔데?”

“134번인데…….”

여학생이 사물함 아래쪽에 있는 번호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사물함 문 위쪽에 검은 잉크로 적힌 숫자를 가리켰다.

“후, 그 번호가 아니라 이 번호로 구분하는 거야. 지금까지 아무도 안 알려 줬어?”

“……!”

안 그래도 하얗게 질려 있던 여학생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내, 내가 이번에 편입을 해서 잘 몰랐어.”

“134번이니까……. 이거네.”

나는 내 사물함과 똑같은 자물쇠가 걸려 있는 사물함을 가리켰다. 아, 하필이면 자물쇠도 똑같네.

“어…… 어.”

여학생은 굳은 손으로 자물쇠를 열었다.

이내 학용품들로 꽉 차 있는 자신의 사물함을 본 여학생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하필 나랑 학용품까지 다 똑같네. 취향이 같나.

“뭐가 계속 없어진다 했더니……. 네가 그랬어?”

“내, 내가 계속 네 걸…….”

사물함 안을 신기한 눈으로 들여다보던 내가 묻자, 여학생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용서를 빌었다.

“정말 미안해, 용서해 줘!”

“내 학용품 돌려주면.”

“응, 잠깐만 기다려, 내가 가져올게!”

여학생이 어딘가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땋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휘날리더니 그녀는 이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애가 되게 어리바리하네.

그나저나 일이 이렇게 쉽게 풀려 버리다니. 왠지 손 안 대고 코 푼 느낌?

아, 그럼 노아 선배의 편지도 여기 있으려나?

나는 머리를 긁으며 열려 있는 134번 사물함 안을 들여다보았다.

조심스럽게 사물함을 뒤지고 있는데 저만치서 두 손 가득 학용품을 든 여학생이 달려왔다.

“아직 아무것도 안 썼어.”

“어이구.”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학용품을 내밀자 나는 조심스럽게 그걸 받아들었다. 양이 꽤 많은 만큼 무거웠다.

“정말, 정말 미안해. 무서웠겠다.”

진심 어린 사과에 조금 느꼈던 짜증도 다 사라져 버렸다.

“아냐, 원래 사물함이 다 똑같으니까 헷갈릴 수도 있지. 그나저나 너랑 내 학용품이 다 똑같다니 신기하네.”

괜찮다며 고개를 저은 내가 몸을 돌리려다 말고 물었다.

“아, 그럼 내 사물함에 있던 편지도 네가 가져간 거야? 사물함에는 없는 것 같던데.”

“응? 편지?”

내 질문을 들은 여학생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편지라니. 무슨 소리야, 그런 건 원래부터 없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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