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번에는 잉크야?”
나는 사물함 문을 쾅 닫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얼마 전 잃어버렸던 노트들을 못 찾아서 우울한데, 이런 상황에서 잉크까지 없어지다니.
내가 기숙사 방에도 학용품을 넉넉히 구비해 두고 있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수업도 못 들을 뻔했네.
“이 정도면 누가 훔쳐 가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내가 아무리 칠칠치 못하다고 해도 이렇게 갑자기 물건들이 사라질 리가 없잖아. 거기다 잉크는 마지막으로 사물함에 넣어 두었던 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내가 교실에 돌아와서도 의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중얼거리자, 도라가 놀리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필기 없는 노트랑 비교적 싼 잉크만 귀신같이 골라서 가져가는 걸 보면 나름 널 배려해 주는 거 아니야?”
나는 그런 그녀를 노려보며 톡 쏘아붙였다.
“너 남의 일이라고 너무 아무 생각 없는 거 아냐?”
“자물쇠라도 사서 사물함 제대로 잠그고 다녀.”
옆에서 보고 있던 에코가 핀잔을 주자, 나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자물쇠 열쇠를 꺼내 흔들었다.
“원래도 자물쇠 걸고 다녔거든?”
“뭐야, 그럼 서랍에서 누가 몰래 빼 가는 건가?”
“아니지, 잉크는 사물함에 뒀는데.”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우리들 중에서 도라가 갑작스레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잠깐. 그 자물쇠, 시내 가게에서 흔하게 파는 거지?”
“응, 그냥 아무 가게 가서 샀어…….”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설마.”
“응.”
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자 도라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에서 똑같은 자물쇠랑 열쇠를 사서 열고 다니는 거야?”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하게 가라앉았다.
쿠당탕.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방금까지 앉아 있던 의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는 양팔로 내 몸을 감싸며 잘게 몸을 떨었다.
“뭐야, 소름 돋아! 나 스토커 붙은 거야?”
“스토커라기엔…… 그냥 학용품 살 돈이 없었던 도둑 아냐?”
도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태클을 걸었지만, 그런 것 따윈 들리지도 않았다.
아카데미에는 귀족들이 많았다. 그 돈 많은 귀족들이 노트 하나, 잉크 한 병 살 돈 없어서 남의 사물함을 털 리가 없었다. 최소한 자존심 때문에서라도 말이다. 고로 이건 누가 봐도 나를 골탕 먹이려는 의도였다.
아, 물론 장학금을 받으며 다니는 돈 없는 평민이나 몰락 귀족도 있긴 할 테지만, 그들의 학업을 위한 비품은 따로 교무실에 구비되어 있었다. 교무실만 가면 얻을 수 있는 걸 훔치기 위해 멀쩡한 귀족의 물건을 건드릴 리가 없다. 어쨌거나 나쁜 놈인 건 확실했다.
“이거 교수님께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냐?”
에코가 드물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물었다.
“아냐, 일이 너무 커지는 건 좀 그래……. 아직 확실치도 않고, 말한다고 해서 어떻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그에 한참을 고민하던 내가 손톱을 깨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음, 좀 애매하잖아. 괜히 귀찮은 일 생기면 어떡해.”
자존심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귀족들 천지인 이 아카데미에서 누구를 도둑으로 몰 수 있을까.
그리고 설령 잡는다고 해도 다른 문제가 있었다.
사교 클럽이나 플로라 선배 일은 워낙 거물들이 얽힌 문제라 꽤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지만, 나 같은 일반 학생의 학용품을 좀 가져갔다고 아카데미 측에서 제대로 처벌을 내릴지는 미지수였다.
음, 보안 마법이라도 한번 찾아볼까?
“하…… 머리 아파.”
일단은 사물함이랑 서랍에 뭐 두지 말아야겠다. 그럼 도둑맞을 일은 없겠지? 설마하니 기숙사 문까지 따겠어.
나는 양 팔 가득 서랍에서 꺼낸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아, 어떤 양심 없는 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도둑……, 도둑.
지금은 사물함을 비우고 물건들을 다 방에 가져다 놓았다지만, 그 도둑이 언제쯤 내 물건 훔치는 걸 포기할지 알 수 없다. 그럼 나 앞으로 사물함은 못 쓰는 건가?
잔뜩 인상을 쓰고 고민하는 내 시야에 노아 선배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무슨 일 있어?”
“왁, 아뇨!”
고개를 숙인 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선배에게 나는 아무 일 없다며 웃어 보였다.
“다행이네. 음, 그…… 아냐.”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노아 선배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선배의 눈을 빤히 바라보자, 선배는 내 시선을 피했다.
어라, 왜 자꾸 눈을 안 마주치려 들지?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혹시 봤어?”
한참 뜸을 들이던 노아 선배가 입을 열자, 나는 의아함에 두 눈을 깜빡거렸다.
“네? 뭘요?”
“엊그제……였나, 플로라가 동아리 시간에 말했던 거.”
아, 그, 뭐더라, 편지?
벌써 희미한 기억을 되짚으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노아 선배가 쑥스러운 얼굴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쭈뼛쭈뼛 말을 이었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네 사물함 틈새에 넣어 뒀는데, 아직 못 봤어?”
편지? 선배가 나한테 편지를? 동아리 시간에 나온 말에 감명을 받아서 편지를 썼다니, 귀여워……!
감격스러움에 입가를 가리고 있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
분명 선배가 사물함에 넣어 뒀댔지……. 잠깐, 사물함?
나는 불안함에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려 웃음을 지었다.
“네에……. 아직. 하하, 얼른 가서 봐야겠네요.”
“아, 그래…….”
“말 나온 김에 지금 가 봐야겠다! 읽고 저도 답장 써 줄게요!”
안녕, 이따 봐요!
선배에게 손을 흔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리나케 복도로 나온 나는 내 사물함으로 달려가며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제발, 제발 이건 아니야.
야, 누군지 몰라도 양심이 있으면 이건 건들지 마라.
“헉, 허억.”
금세 사물함 앞에 도착한 나는 숨을 헐떡이며 미친 듯이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냈다.
벌벌 떨리는 손 때문에 자물쇠가 잘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고전하고 나서야 탁한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렸다.
나는 곧장 망설임 없이 사물함 문을 열어젖혔다.
* * *
그리고 몇 분 뒤.
“가만 안 둬, 절대 가만 안 둬……. 지옥 끝까지 따라간다.”
“너 지금 되게 무서워. 제발 진정해.”
양손으로 깍지를 낀 채 다리를 미세하게 떨고 있는 내게 도라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책상을 탕 하고 내려치며 소리쳤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사물함 안에 노아 선배가 썼다는 편지는 없었다. 얼마 전 내가 비웠던 그대로 있었다. 방까지 가져가기 무거워서 ‘에이, 설마 이것까지?’ 하며 놔두었던 얇은 노트와 잉크 몇 병도 함께 사라져 있었다. 필시 이전과 같은 놈의 소행이리라.
누구 하나 죽일 기세로 이를 가는 내게 맬러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야아, 기운 내. 편지는 또 써 달라고 하면 되잖아?”
“달라! 다르다고!”
나는 머리를 쥐어뜯다시피 헤집으며 절규했다.
“노아 선배가 나한테 처음으로 써 준 편지란 말이야. 그 온도, 조명, 습도에서 펜을 꺼내고 잉크를 적셔서 쓰는 편지는 그게 유일하다고!”
“으…….”
에코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고 도라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변태.”
아니, 누가 변태야!
나는 억울함에 꽥 소리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냥 많이 좋아하는 것뿐이잖아, 뭐가 변태야!”
어쨌든 날 괴롭히기 위한 짓이라는 게 명백해졌다. 노아 선배가 내게 써 준 편지를 필요로 할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금세 진정하고 흥분을 가라앉힌 나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노아 선배…… 때문인가?”
내가 매일 수업 끝나고 같이 앉아서 놀고 안고 키스하고 있어서 가끔은 잊곤 하는 사실인데 사실 노아 선배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은 정말, 정말 많았다. 반마다 대여섯 명쯤은 있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선배랑 그런 사이가 된 이후로 비밀 연애 같은 건 생각도 못 해서 사귀는 티를 있는 대로 내고 다녔는데 혹시, 혹시 노아 선배를 좋아하는 애가 선배랑 사귀는 내가 못마땅해서 이런 짓을……?
“!”
일리가…… 있어.
꽤 그럴듯한 가설을 세운 나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턱을 쥐었다.
그러고 보니 예언서, 그 책에서 노아 선배와 사귀는 사이였던 플로라 선배가 많은 괴롭힘을 당하잖아. 지금은 내가 노아 선배랑 사귀니까 그 괴롭힘이 나에게 온 건가?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조금 소름이 돋았다. 교실에서 끼리끼리 모여 있는 여자애들이 괜히 내 쪽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누가 날 괴롭힐 정도로 싫어하고 있다니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역시 두려움보다는 노아 선배의 편지가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선배는 편지에 뭐라고 썼을까? 존댓말을 썼을까, 반말을 썼을까? 편지지는 어떤 걸 썼을까? 향수는 뭘 뿌렸을까? 봉인은 어떤 걸로 했을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안 되겠어. 잡는다.”
노아 선배 편지를 가져간 게 누구든 간에 아주 박살을 내 주마.
물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조금 달라지겠지만…….
“뭐 어떻게 잡을 건데?”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도라의 질문에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반드시 원본 편지를 찾아서 읽고 답장까지 써 줄 거다.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 거야. 사교 클럽 이후로 선배들의 도움은 더 이상 받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주먹을 꾹 쥐는 순간, 때마침 종소리가 들렸다.
“다 좋은데, 일단 수업부터 들어.”
그러고 보니 나 혼자 서 있었네.
에코가 차갑게 일갈하자 나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