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하늘이 거의 어둑어둑해질 무렵 노아 선배와 나는 도서관에서 나왔다.
“흐아아,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요.”
나는 뻑뻑한 두 눈을 깜빡거리며 하품을 했다. 초반에는 집중이 잘 안 되긴 했지만 워낙 흥미로운 책이라 한번 집중을 하니 금방 다 읽었다. 책장에 꽂아 두고 나중에 또 읽어야지.
“많이 피곤해? 더 일찍 나올 걸 그랬나?”
노아 선배가 바람결에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뇨, 괜찮아요.”
나는 옷깃을 여미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그래도 바람이 차서 잠이 조금 깬 것 같았다.
“소설은 재미있었어요?”
“응, 다음 권 얼른 나왔으면 좋겠어.”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벌써 기숙사 건물 앞에 다다라 있었다.
오늘 하루 내내 같이 있었는데도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일부러 계단까지 천천히 걸었다. 울긋불긋하게 물든 낙엽들이 신발에 밟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헤어지기 싫다.
우울한 얼굴로 다리를 뻗어 낙엽 더미를 헤집고 있는데, 노아 선배가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나를 안아 올렸다.
“왁.”
놀란 얼굴로 신음하던 나는 높아진 시야에 두 눈을 빛내며 탄성을 질렀다.
“와, 선배 힘세다!”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노아 선배는 낮게 웃으며 나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두워서 네 얼굴이 잘 안 보였어.”
“으응, 그러게요. 가을이라 해가 빨리 지네.”
나 역시 기숙사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야만 선배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기숙사 건물을 돌아보았다.
“이제 슬슬 들어가야겠어요.”
“응. 이리 와.”
마지막으로 나를 한번 꼭 끌어안은 선배가 내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짧은 입맞춤을 끝으로 고개를 내리는 노아 선배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느껴지는 따뜻한 감각에 나는 작게 몸을 떨었다. 이내 쪽, 낯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나는 향수 같은 걸 살 생각을 왜 했을까. 선배는 그런 거 없이도 키스해 줄 텐데.
문득 향수를 산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방에 놔두다 보면 언젠가는 쓰겠지만.
“잘 들어가.”
노아 선배가 그 큰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사했다.
“네, 오늘 재밌었어요.”
선배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나는 경쾌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흐흥.”
선배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나면 항상 앞머리가 조금 헝클어지는데, 그것마저 기분 좋았다.
두근거림과 설렘에 웃음을 흘리며 걸음을 옮기는데, 기둥 뒤로 아주 익숙한 붉은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어?”
물론 아카데미에 붉은 머리가 하나밖에 없는 건 아니겠지만, 뒷모습이 내가 알고 있는 사람과 너무나도 똑같았다.
“야, 아르한!”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치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쟤가 이 시간에 왜 여기 있지, 하는 의문보다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이 거리에서 내가 부르는 걸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아르한은 사라져 있었다.
쟤 설마…… 나 피해 다니는 거야?
“허…….”
왜?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허탈하기 짝이 없는 침음을 흘렸다.
“!”
불현 듯 느껴지는 서운함에 눈썹을 꿈틀거리는데,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아니, 잠깐. 나 방금까지 노아 선배랑 키스하고 있었잖아. 혹시 내가 민망할까 봐 피해 준 건가?
아, 이 배려심 넘치는 녀석.
금세 밝은 표정으로 돌아온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 그런데 어디서부터 본 거지? 설마 처음부터 다?
……창피해.
사실 문학 수업이 다 그랬지만 이번 문학 시간은 유독 지루했다.
동아리 덕에 어느 정도 독해력이 키워진 것 같긴 했지만 수업 시간에 배우는 문학 작품들은 플로라 선배의 고전 문학 시리즈보다 더 어려웠다.
통 집중이 안 되네.
나는 눈에 눈물이 찔끔 맺히는 것을 느끼며 하품을 했다.
“흐아암.”
다음 시간을 준비하고 책들을 정리할 겸 사물함을 열어 본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라?”
오늘 다 사용한 책들을 넣었는데도 어쩐지 사물함이 허전했다.
내 노트 어디 갔어.
“뭐야, 서랍에 놔뒀나.”
사물함을 닫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과 함께 교실로 되돌아갔다.
“……없어!”
그러나 노트는 어디에도 없었다.
텅 빈 서랍 안을 더듬던 나는 느껴지는 허전함에 소리쳤다.
“잠깐, 서랍에 뒀던 다른 노트도 없어졌어!”
“뭐야, 왜 그래?”
다음 수업에 들어갈 준비를 하며 책을 정리하던 도라가 화들짝 놀라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에 나는 울상을 짓고 서랍 안을 만지느라 먼지가 묻은 손을 털었다.
“새로 산 노트가 없어…….”
혹시나 해서 양해를 구하고 다른 애들의 서랍까지 뒤져 봤는데 정말 단 한 개도 나오지 않았다.
“설마 누가 훔쳐 갔나?”
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눈썹을 내려뜨렸다.
그래도 전부 얼마 전에 산 새것이라 필기 하나 없이 깨끗한 노트였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나에 얼마 하지도 않고.
아, 그래도 아까운데.
“뭐야, 도둑맞았어? 그래도 필기한 노트 안 가져갔으면 다행 아냐?”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는데, 도라가 정확히 내가 했던 생각을 짚었다.
“그건 그런데……. 에이, 아니다. 내가 잃어버렸나 봐.”
내가 덜렁거리다 어디에 빠뜨린 거겠지. 이따가 찾다 보면 어디 방구석에서 나오겠지.
고개를 저은 나는 별생각 없이 다음 책을 챙겨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자, 어디 있을 거야.”
* * *
동아리 시간은 노아 선배를 볼 수 있는 황금처럼 귀한 시간이었다. 자연히 동아리 교실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선배.”
문을 열어 보니 노아 선배는 이미 와 있었고, 나는 애교 어린 목소리로 선배를 불렀다.
“일찍 오셨네요.”
“응, 여기 앉아.”
선배가 제 옆자리를 가리키며 웃었다.
“오늘 노트를 잃어버렸어요. 새로 산 건데.”
“저런, 그랬어?”
내가 책상에 머리를 박고 푸념을 하자, 노아 선배가 어김없이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 그것도 두 개나요. 아아, 아까워.”
제 옆자리에 앉아 조잘거리는 나를 내려다보던 선배가 입가를 가리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작아…….”
“? 시비……인가요?”
천천히 고개를 든 나는 조그맣게 주먹을 쥐었다.
“아, 아니야.”
내가 서늘한 투로 묻자 노아 선배가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네 얼굴도 손도 발도 키도 다 너무 작아서.”
“……?”
키도……? 시비 맞잖아.
물론 노아 선배는 키가 크고 나는 여자 기준으로도 조금 작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걸 굳이 말해야 했던 거냐고.
분했지만 차마 나를 무슨 털로 뒤덮인 소동물 보듯이 내려다보는 선배에게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그래, 저렇게 좋아하는데 내버려 두자.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응…….
나는 속으로 체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귀여워.”
정말, 악의가 없다는 걸 아니까 화도 못 내겠네. 나는 작게 콧소리를 내며 손을 뻗어 노아 선배의 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았다.
“흥.”
그런 나를 귀엽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노아 선배의 얼굴 뒤로 글로리아 선배와 플로라 선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으…….”
“커플…….”
그런 둘의 표정은 무척이나 떨떠름했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 고개를 돌렸다.
“왜요.”
“신성한 교실에서 연애질 그만하고 다들 책이나 펴. 나 닭살 돋았다.”
내 머리를 책으로 가볍게 톡 친 글로리아 선배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래, 얘들아. 너희가 열렬히 사랑한다는 건 알겠는데 솔직히 약간 보기 힘들다. 위화감이…….”
플로라 선배가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들고 있던 책을 폈다.
“아…… 우리가 그렇게 심했나?”
내가 노아 선배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선배를 올려다보자, 플로라 선배가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곤 소리쳤다.
“그래, 이런 게!”
“아, 알았어요. 안 할게요.”
나는 황급히 노아 선배에게서 몸을 떼곤 허리를 곧추세웠다.
“크흠, 이제 시작하자.”
방금 소리친 게 부끄러웠는지 플로라 선배가 헛기침과 함께 펼쳐 든 책으로 시선을 돌렸고, 글로리아 선배는 그걸 보며 킥킥 웃었다.
“이번 책은 편지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두 남녀 주인공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그러고 보니 이렇게 진지하게 하는 건 어쩐지 오랜만인 것 같네.
나는 턱을 괸 채 플로라 선배의 말에 집중했다.
“결국 편지로만 대화하던 둘이 드디어 만나는 것으로 결말이 나.”
“잠깐.”
글로리아 선배가 손을 들고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럼 부장도 연애할 때 편지 주고받았어?”
“응, 로맨틱하지 않아? 아니, 그건 왜 물어봐. 짜증 나게.”
전 남자친구 생각이 났는지, 플로라 선배가 인상을 팍 쓰자 하얀 미간이 구겨졌다.
“사실 편지 그런 건 다 소용없어, 얘들아.”
그녀가 갑자기 정색하며 책상을 내려쳤다.
까, 깜짝이야.
“편지 같은 종이 쪼가리 따위, 헤어지고 나면 다 쓰레기일 뿐이야.”
저건 경험담인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펜을 고쳐 쥐고선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편지가 쓰레기라는 저 발언에 노아 선배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노아 선배의 눈이 금색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