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10)

* * *

나는 한참 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

교실 책상에 놓인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내가 툭 던지듯 물었다.

“……내가 그렇게 예뻐?”

그러자 옆에서 과자를 씹던 도라가 체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

“응, 그래야지. 깜짝 놀랐네.”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냐고. 조금 상처다.

“흠흠. 아니, 내가 립스틱 발랐다고 하니까 우리 선배가 그렇게 예쁘다고 난리를 치는데…….”

나는 헛기침을 하며 배시시 웃는 얼굴로 뺨을 쥐었다.

“그래, 그래. 벌써 한 말이다.”

“그랬어?”

내가 몰랐다는 투로 되묻자 에코가 지겹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애인이 너무 잘난 걸 어떡하니.”

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웃음을 흘리다 교실 창문을 내다보았다.

“아, 노아 선배가 데리러 왔다.”

“저 둘이 저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아무도 몰랐을걸. 쟤 본인도 몰랐는데.”

내가 방실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친구들이 과자를 씹으며 뒤에서 수군거렸다.

나는 그들을 향해 혀를 벳 내밀곤 노아 선배를 향해 달려갔다.

“수업 잘 들었어?”

“아, 완전 짜증 나게 어려웠어요.”

노아 선배가 말도 말라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작년 노트 보여 줄까?”

“우와, 진짜요?”

선배 최고.

웃으며 손뼉을 친 내가 노아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아, 우리 주말에 데이트 갈 때요, 저 립스틱 사러 가도 돼요?”

“립스틱?”

놀란 얼굴의 노아 선배에게 립스틱 바른 나를 예쁘다고 해 주는 선배가 좋아요, 하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동안 쓰던 걸 다 써서요.”

원래 바르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대충 둘러댄 내가 손가락을 접어 지갑에 든 돈을 계산하며 눈알을 굴렸다.

“아, 향수도 같이 살까요.”

내가 고개를 돌리며 묻자 노아 선배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음, 사실…… 네 원래 냄새가 더 좋은 것 같아.”

“그래요? 선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 비누랑 같은 향이 나는 향수가 있으려나.”

나는 턱을 쥔 채 고민했다.

“뭐, 한번 찾아보죠!”

* * *

“으으으음…….”

좀 알아보고 올 걸 그랬나.

나는 수십 개의 색을 보며 고민에 휩싸였다.

십 분가량 고민 후 가장 마음에 드는 분홍색을 골랐는데, 이상하게도 절대 바르지 않을 것 같은 빨간색 립스틱에 자꾸 눈길이 갔다.

결국 나는 두 립스틱을 들고 옆 향수 코너에 서 있던 노아 선배에게 갔다.

“어떤 게 예뻐요? 뭐가 더 저한테 어울릴 것 같아요?”

내 왼손의 빨간색 립스틱과 내 입술을 번갈아 힐끔거리던 노아 선배가 더듬거렸다.

“어, 그건…… 섹시할 것 같다.”

“아, 뭐래!”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선배의 어깨를 팍팍 쳤다.

섹시는 무슨 섹시. 사실 이 색 립스틱은 반쯤 장난으로 들고 있었던 건데.

“그래도 이게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노아 선배가 내 오른손에 들린 분홍색 립스틱을 가리키며 수줍게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발랐던 도라의 립스틱과 가장 비슷한 색이었다.

“아, 역시 그렇죠?”

선배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

빨간 립스틱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계산을 마쳤다.

“흐음.”

역시 비누와 같은 향이 나는 향수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헷갈린다는 얼굴로 턱을 쥐고 있던 나는 익숙한 향기에 코를 킁킁거렸다.

“어, 이거 선배가 쓰는 향수 맞죠?”

선배 냄새 나.

나는 재스민 향이 나는 향수를 들고 두 눈을 반짝거렸다.

“응.”

노아 선배는 향수병 표면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거의 다 썼는데, 하나 살까 봐.”

“그럼 제가 사 드릴게요!”

모처럼 선배한테 실용성 있는 선물을 해 줄 수 있는 기회!

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향수를 챙겼다.

“그럼 네 건 내가 사 줄게.”

“그런데 그럼 의미가 없지 않아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노아 선배는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머리를 맞대고 계산을 하던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향수를 쥐고 키득거리며 말했다.

“우리 바보 같다.”

“너랑 바보짓 하는 건 좋아.”

노아 선배가 두 눈을 휘며 말했다. 나는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우연이네요, 저도요.”

각자의 향수를 사고 가게를 나선 우리는 앉아 있을 겸 목을 축이러 카페에 들어섰다.

나는 옆에 있던 설탕 단지를 가져다 차에 설탕을 몇 스푼씩 퍼 넣었다. 그러자 비로소 내 취향의 단맛이 났다.

나와는 달리 설탕 한 스푼도 넣지 않고 진하게 우러난 차를 마시는 노아 선배를 빤히 바라보던 내가 물었다.

“그거 맛있어요?”

“응, 먹어 볼래?”

“네.”

나는 선배가 먹던 부분을 피해 입술에 대고 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정확히 1초 후에 뱉어 냈다.

“켁!”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써?

연신 기침을 하는 내게 선배가 물을 내밀었다. 물로 쓴맛을 씻어 낸 내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거 뭐예요, 약…… 약이에요?”

“으윽.”

그 와중에 선배는 내가 먹던 설탕 가득 넣은 차를 가져다 한입 먹고 속이 메슥거린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렇게 단 걸 싫어하는데, 예전에 솜사탕은 어떻게 먹었던 거지.

그리고 우린 왜 사서 고통을 받으려 하는 거지.

“그냥 자기 거 먹어요, 우리…….”

“으응, 그러자…….”

나는 돌려받은 내 잔을 우울하게 기울였다. 노아 선배도 물을 연신 마셔 대며 조금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와, 이것 보세요. 선배가 재밌게 읽던 소설 작가 신간이에요.”

나는 신간 코너에 있는 책을 뽑아 들고 들뜬 얼굴로 노아 선배에게 보여 주었다.

선배는 웃는 얼굴로 내게 청록색 표지의 책을 건네주었다.

“여기, 네가 지난번에 흥미 있어 하던 마법 이론 책.”

“우와! 다 못 읽었었는데.”

나는 신난 얼굴로 책을 받아 들었다.

이럴 때면 선배랑 내 관심사가 비슷해서 좋은 것 같다. 디저트 취향은 안 맞지만.

“우리 이거 사 가서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같이 볼까요?”

“그래.”

내가 책을 들어 보이며 묻자 노아 선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주말이라 그런지 도서관에는 사람이 제법 많았지만, 운 좋게도 창가 자리가 둘이나 비어 있었다.

나는 의자에 털썩 앉아 사 온 책을 펼쳤다. 옆에서는 노아 선배가 책을 들고 집중하며 읽고 있었다.

책을 폈지만 단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한 채로, 나는 옆자리에 앉은 선배를 연신 곁눈질했다.

우와, 집중하는 모습 멋지다.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노아 선배가 살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책을 두드렸다. 입 모양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집중해야지.’

“!”

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자기 보고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대.

노아 선배와 내 손이 맞닿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 옆을 힐끔거리던 나는 책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도통 집중이 되질 않았다.

마법진의 기초…… 기원은 마력 소모를 줄이는 것에서…….

억지로 눈에 글자를 담아 가던 내가 반쯤 포기하고 책을 덮었다.

무심결에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선배가 황급히 내 눈을 피했다.

“뭐예요, 왜 책은 안 읽고 제 얼굴만 보세요?”

내 장난기 섞인 물음에 선배는 두 눈을 진하게 휘었다.

“네가 옆에 있는데 어떻게 안 봐.”

“와, 우린 같이 공부하면 안 되겠네요.”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렇게 소곤거린 노아 선배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같이 하자.”

“그래요.”

나는 웃음을 머금은 대답과 함께 책상 아래로 노아 선배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내 손가락을 단단히 휘어 감자, 따뜻한 체온이 손바닥에 닿아 왔다.

책장을 팔랑거리는 소리와 무언가를 쓰는 듯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이제 곧 가을이라 해가 짧았다. 창밖으로는 해가 점점 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노아 선배의 넓은 어깨에 기대 있자니 노곤하고 졸렸다. 입을 닫은 채 하품을 참으니 눈물이 찔끔 났다.

눈가를 비비며 제 어깨에 기대 있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선배가 내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으음…… 뭐 하세요.”

졸음을 참던 내가 주변에 들릴세라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선배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되게 말랑말랑하다.”

“뭐예요.”

나 역시 웃음 섞인 대답을 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주위가 적당히 조용하고 따뜻하고, 옆에는 기댈 사람이 있으니 점점 잠이 왔다. 결국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두어 시간 후 눈을 뜬 나는 작게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어깨에 아까보다 더 묵직한 무언가가 닿아 옆을 보니 노아 선배가 내게 머리를 기댄 채 자고 있었다. 아까부터 말끝을 조금 늘리는 것 같더니, 역시 피곤했구나.

“으음.”

도서관 창문으로 오렌지빛 저녁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동시에 내 어깨에 늘어진 은발도 주홍빛으로 물들어 갔다.

나는 창문을 통과해 부서지는 햇빛에 눈이 부셔 눈가를 찡그리면서도 밀려오는 나른함에 몸에 힘을 풀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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