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10)

* * *

몇 시간 후, 나는 멍한 얼굴로 잠에서 깼다.

비몽사몽간에 내가 꿈을 꾼 건지 아니면 선배들이 찾아왔던 게 진짜였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지금은 좀 어떠니?”

“괜찮아요. 열도 좀 내린 것 같고…….”

내 이마를 짚은 양호 선생님이 약을 건넸다.

“그래도 아직 미열이 있으니까, 약 먹고 더 쉬다 가렴. 내일은 주말이잖니?”

“네.”

나는 짧게 대답하며 협탁에 놓인 물을 마셨다. 아직 목이 간지러워 기침이 나왔다.

“콜록.”

“내가 너 때문에 팔에 근육 생기겠어.”

작게 기침을 하는 내게 수학 필기 노트를 건네주며 도라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수업은 하나만 빠졌고, 오늘은 금요일이다. 정말 다행이야.

나는 아직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노트를 쓱 훑었다.

“고마워.”

“알면 됐어.”

불량한 자세로 양호실 침대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던 도라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 맞다. 네 아는 동생 왔다 갔어. 그 빨간 머리 애.”

이것도 두고 갔다며 도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수를 던져 주었다.

“아르한이?”

음료수를 받아 든 나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응, 너 자는 거 보다 가더라.”

“지금 걘 어디 있는데?”

“야, 넌 쉬어야지.”

내가 당장이라도 아르한을 찾아 뛰쳐나갈 기세로 묻자 도라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난들 아나, 진작 갔는데.”

“아…… 나 아픈 건 어떻게 알았대.”

“교실에 찾아가 봤겠지.”

요새 못 봤는데 그새 왔다 갔구나. 바쁠 텐데 내 병문안까지 와 주다니.

“짜식…….”

나는 감동한 얼굴로 음료수 뚜껑을 땄다.

어째 자꾸 엇갈리는 것 같네. 조만간 수업 끝나고 바로 찾아가 봐야지.

도라가 책을 챙기더니 몸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난 옮으니까 이만 나가 볼게.”

“보통 안 아픈 사람이 그런 말 해?”

나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바로 다음 날에 양호실에서 나가도 좋을 정도로 상태가 나아지기는 했지만, 기침도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는 일주일이 꼬박 더 걸렸다. 그동안 선배들은 나를 꽁꽁 싸매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노아 선배는 따뜻한 물을 싸서 다니며 내가 기침을 할 때마다 먹였고, 플로라 선배는 내가 가는 곳마다 모든 창문을 닫으면서 다녔다. 글로리아 선배는 내 사물함에 가득 들어찬 다 덮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담요 더미의 주범이었다.

덕분에 금방 낫기는 했지만, 조금 창피한 건 사실이었다.

“으음…….”

아침 햇살이 감은 눈꺼풀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유독 포근하게 느껴지는 침대에서 벗어나기에 성공했다.

“와, 너 안색이 완전 병자 같다.”

“음?”

먼저 일어나 있던 도라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화장대 앞으로 가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내 입에서는 거의 감탄에 가까운 침음이 흘러나왔다.

“와…… 입술 좀 봐.”

한동안 앓아서 그런가, 내 입술에는 혈색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탓인지 오늘따라 밋밋한 내 화장품 대신 도라의 화장대에 있는 분홍색 립스틱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나 이거 써도 돼?”

내가 립스틱을 들어 보이며 묻자 도라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응, 써.”

나는 무척이나 어색한 동작으로 립스틱 뚜껑을 열었다. 분홍색 립스틱을 묻힌 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살살 문질렀다.

그랬더니 입술에 분홍빛이 돌며 어느 정도 생기가 있어 보였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어색한 동작으로 연신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내가 만족스러운 침음을 흘렸다.

“음…….”

좀…… 예쁜가?

그러다 보니 그 옆에 있는 향수병에도 손이 갔다.

옆에서 짧은 흑갈색 머리를 빗던 도라가 웬일이냐는 얼굴로 물었다.

“화장해 보게?”

“아니, 입술이랑 향수만.”

“야, 그거 알아?”

도라가 향수병을 집어 드는 내게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향수는 키스받고 싶은 데에 뿌리는 거래. 노아 선배가 해 줬으면 하는 데다 뿌려.”

“아, 그래?”

그에 나는 향수병 뚜껑을 따며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향수로 목욕하는 건 처음이라 좀 떨리네.”

“미쳤냐? 그거 비싼 거야.”

도라가 기겁하며 향수병을 빼앗아 갔다. 나는 그녀에게 도로 손을 내밀었다.

“농담이야, 조금만 뿌릴 테니까 빌려 줘.”

“너라면 진짜 그럴 줄 알고 쫄았어.”

도라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손목에 향수를 칙칙 뿌리곤 머리를 작게 흔들곤 마지막으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입술에 뭘 바른 탓인지 평소보다 아주 조금 예쁜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노아 선배가 예쁘다고 해 주려나?

* * *

은은한 향수 냄새가 공기에 맴돌았다. 입술에서는 립스틱 맛이 났다.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항상 만나는 계단 앞에 노아 선배가 와 있었다.

“선배! 많이 기다렸어요?”

“아냐, 나도 방금 왔어.”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노아 선배는 멈칫하더니 나를 끌어당겼다.

“왜 그러세요?”

내 머리카락 사이에 얼굴을 묻은 노아 선배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서 다른 사람 냄새 나.”

“룸메이트 향수를 빌렸거든요. 어때요?”

“아, 그래? 잘 어울려.”

내 대답에 노아 선배가 밝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향수는 키스받고 싶은 데다 뿌리는 거래요.”

“응.”

“그래서 온몸에 바르려 했는데, 도라가…….”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며 계단을 오르는데, 발을 잘못 디뎠다. 노아 선배가 넘어질 듯 휘청거리는 내 허리를 붙잡았다. 따뜻하고 큼직한 손이 허리를 빈틈없이 감쌌다.

“조심해야지.”

“아.”

나는 짧은 침음을 흘렸다.

내가 몇 계단 위에 있던 탓에 노아 선배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와 있었다.

혹시 입술에 뭐 바른 게 티가 나려나?

나는 금색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저 오늘 뭐 달라진 거 없어요?”

잠시 고민하던 노아 선배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머리가 조금 부스스한 것 같은데, 혹시 안 빗었어?”

“아, 까먹었다.”

화장하느라 정작 머리를 안 빗다니, 바보 아냐?

노아 선배가 자책하며 입술을 깨무는 내 머리를 정리해 주며 속삭였다.

“그래도 예뻐.”

“흐응.”

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그거 말고요.”

“입술이…… 뭔가 평소랑 다른 것 같네.”

내 입술을 빤히 바라보던 노아 선배가 약간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뭐 발랐거든요.”

선배가 얼굴이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어쩐지 숨이 막히는 기분.

나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두 눈을 내리깔았다.

“키스해 주시면 안 돼요? 지금요.”

“!”

마침 허리도 잡았겠다.

나는 선배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술을 삐죽이며 졸라 댔다.

그런 나를 귀여워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노아 선배가 먼저 입술을 부딪쳐 왔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입술에 닿았다. 도장을 찍듯 꾹 누르고 살끼리 비벼지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아, 맞다. 나 립스틱 발랐잖아.

눈을 감은 채 결 좋은 은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문득 드는 생각에 먼저 입술을 뗐다.

선배의 입 주변에도 립스틱이 번져 있는 그 광경이 뭐라고 이렇게 위험해 보이는지. 안 그래도 은은한 분홍색이 돌던 입술의 색이 더 짙어졌다.

……앞으로도 바르고 다녀야지.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노아 선배의 입가를 닦았다. 이렇게 수업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지.

“선배 얼굴에 립스틱 다 묻었어요.”

내가 입가를 닦던 말던, 노아 선배는 반쯤 풀린 눈을 하고서 내 허리에 손을 감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더 해 주면 안 돼? 너 감기 결려서 그동안 못 했잖아.”

“아,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해요.”

그 사이 주변에 사람이 제법 많이 몰려 있었다.

내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붕붕 젓자 노아 선배가 우울하게 두 눈을 내리깔았다. 기다란 은빛 속눈썹이 아련하게 떨렸다.

나는 얼굴을 굳히고 진지한 투로 말했다.

“미인계 써도 안 돼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노아 선배가 두 눈을 끔뻑거리며 대답했다.

“스읍, 조금 지워진 것 같은데.”

나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노아 선배에게로 몸을 돌렸다.

“괜찮아요?”

선배는 푸스스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응, 너무 예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