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취.”
나는 으슬으슬한 추위에 어깨를 움츠리며 재채기를 했다.
환절기라 그런가, 기온이 왔다 갔다 하네. 아침엔 더워서 겉옷 안 챙겼는데.
“야, 나 기숙사 방에서 겉옷 좀 가져와야겠다, 콜록.”
“그래.”
내가 그렇게 말하며 코를 훌쩍이자 도라는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추위에 몸을 벌벌 떨며 기숙사에 들렀다 온 나는 가져온 겉옷에 팔을 꿰며 투덜거렸다.
“요즘 날씨가 오락가락한다니까. 벌써 가을이야? 아으으, 기말고사가 3개월 남짓.”
“……너 팔 한쪽 잘못 꿰었어.”
무어라 잔뜩 투덜거리는 내게 도라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아, 그래. 근데 여기 좀 춥다…….”
나는 고쳐 입은 겉옷을 여미며 몸을 잘게 떨었다. 바람이 그렇게 세게 분 것도 아닌데.
창문을 닫아야 하나.
“너 얼굴도 좀 빨개. 이리 와 봐.”
그런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도라가 내게 손짓하더니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시원한 손바닥이 느껴져 나는 살며시 무거운 눈꺼풀을 닫았다.
“야, 너 열나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기침도 하잖아.”
이내 도라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어?”
그걸 들은 나는 몽롱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조금 지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 * *
“얘, 너 수업 나가지 말고 누워서 쉬어야겠다. 교수님껜 내가 말씀드리마. 너 다음 수업이 뭐니?”
“어…… 수학이요, 콜록.”
나는 양호실 침대에 누운 채 골골거리며 간신히 양호 선생님께 대답했다.
“쉬고 있으렴.”
“네에…….”
그렇게 말하며 선생님이 양호실을 나서자, 도라가 나를 향해 혀를 쯧쯧 찼다.
“저번에는 연못에 빠지더니, 이번엔 감기야? 어휴, 너는 어째 하루도 몸 성한 날이 없냐, 이 약골아.”
“아, 약골 아니라고……. 나만 걸린 것도 아니잖아, 콜록.”
나는 나처럼 양호실 침대 신세인 학생들 몇몇을 턱짓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이 환절기라 감기 환자가 많은 모양이었다.
“아, 그럼 내가 또 필기해 줘야 하는 거야?”
아뿔싸, 도라가 낮게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지난번 연못에 빠졌을 때도 그녀가 나 대신 필기를 해 주었는데, 또 부탁하게 되니 우리가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조금 미안했다.
나는 겨우 입술을 달싹여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콜록, 콜록, 콜록.”
“야, 네가 그러니까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필기 대신 해 줄 테니까 물이나 마셔.”
민망한 얼굴의 도라가 진정하라며 내게 물컵을 건넸다.
머리 위에 놓인 젖은 수건을 치우고 몸을 일으킨 내가 물을 받아 마셨다.
“고마워, 콜록, 콜록.”
당연한 수순처럼 말끝에 기침을 하고 침대에 몸을 누이니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침대에 누워 마른기침을 하던 나는 혀를 내어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아, 노아 선배 보고 싶어…….
* * *
글로리아가 다급한 표정으로 교실 문을 벌컥 열었다.
“야, 노아스 나와 봐. 지금 케이트 아프대.”
그에 조용히 자리에 앉아 필기를 마무리하던 노아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
그의 금색 눈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노아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많이 아프대? 열나? 지금 어디 있는데?”
“한 번에 하나씩만 물어봐.”
글로리아가 기가 질렸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두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본 3학년생들이 놀란 얼굴로 수군거렸다.
노아스 유리엘은 원체 제게 이목이 쏠리는 것을 꺼리는 사람이었다.
작년에 노아스의 얼굴을 영접한 1학년들이 팬클럽을 만들려고 했다가 그가 조용히 자퇴서를 쓸까 봐 관두었다는 일화는 유명했다.
늘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쓰는 그가 저렇게 요란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다니.
“쟤…… 단답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아닌가 봐.”
* * *
“으음…….”
잠깐 눈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밖이 이렇게 어둡네.
작게 기침을 하며 몸을 뒤척이는데, 은색 머리카락이 시야에 넘실거렸다. 코끝에 재스민 향이 감돌았다.
나는 자동으로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열띤 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니 걱정스러운 얼굴의 노아 선배가 내 물수건을 갈아 주고 있었다.
“어…… 노아 선배다.”
“깼어? 더 자.”
선배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힘과 동시에 큼직한 손이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나는 그 시원한 체온에 의지하며 손에 얼굴을 부볐다.
“으응.”
“왜 아프고 그래.”
노아 선배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적신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았다. 나는 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으응, 그러게요.”
“우리도 있는데, 아주 노아스밖에 안 보이지? 둘만의 세계네, 둘만의 세계야.”
그런 우리를 저만치서 지켜보던 글로리아 선배가 혀를 끌끌 찼다.
그 옆에는 플로라 선배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서 있었다. 간신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선배. 저 아무래도 동아리는 못 갈 것…… 쿨럭!”
“아냐, 아냐, 괜찮아! 그러니까 말하지 마, 응?”
플로라 선배가 달려와 내 손을 붙잡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 탓에 귀가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으으…….”
“우리 케이트 어떡해…… 흑.”
“선배…… 저 감기예요.”
죽을병에 걸린 게 아니라고요. 그리고 창피해요.
나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성력이라도 써 줄까?”
우려 가득한 푸른 눈이 시야에서 어른거렸다.
플로라 선배가 제안했지만 나는 힘없는 동작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성력은 상처랑 외상에나 쓰는 거지, 감기 따위에 들을 리가 없잖…… 콜록, 콜록!”
쉰 목소리로 말하던 내가 다시 가련하게 기침을 시작하자, 플로라 선배는 내가 곧 죽기라고 할 것처럼 새된 비명을 질렀다.
“꺄악, 케이트! 말하지 마, 말하지 마!”
“너희 뭐 하냐?”
글로리아 선배가 이쪽을 힐끔대는 다른 환자들의 시선이 불편했는지 플로라 선배의 팔을 끌어당겼다.
“케이트 쉬어야지, 얼른 나와. 케이트 너는 푹 쉬고 얼른 나아.”
“얼른 나아, 케이트!”
플로라 선배가 그렇게 소리치며 글로리아 선배에게 끌려 나갔다.
“미안, 시끄러웠지.”
남아 있던 노아 선배가 사과하며 내 이불을 정리해 주었다.
나는 조금 몽롱한 기분에 휩싸여 혀 꼬이는 발음으로 대답했다.
“으음, 아니에요……. 선배도 얼른 가 보세요. 옮겠어요.”
“있잖아.”
침대맡에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노아 선배가 손끝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감기는 옮기면 낫는대.”
“……그럼 의미가…… 없잖아요. 선배도 걸리는데, 콜록.”
이거 지금 키스하겠다는 거 맞지?
나는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선배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분별력은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침대 주위로 커튼은 쳐져 있지만, 지금 양호실에 내가 고백했을 때처럼 아무도 없는 것도 아니고.
노아 선배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아픈 것보다는 내가 아픈 게 낫지.”
“안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다음 주에, 콜록, 데이트도 가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힘없는 팔로 선배를 밀어냈다.
“감기 옮으니까 얼른 나가세요. 키스는 나으면 그때 해 드릴게요.”
“……알았어. 내일 또 올게. 얼른 낫고.”
노아 선배는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내 손을 한번 꼭 잡고선 양호실을 나갔다.
비로소 혼자가 된 나는 다시 눈을 붙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