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10)

“선배, 이게 뭐예요!”

나는 책 사이에 끼워 두었던 꽃을 내밀며 소리 질렀다. 선배가 일부러 신경 써서 유난히 예쁘게 핀 꽃으로 골라서 딴 것 같았지만 그게 내 알 바인가.

“수업 중에 완전 창피당했잖아요.”

“하하. 너도 내 머리에 꽃 꽂았잖아.”

“저는 수업 시간 전에 빼 줬잖아요!”

내가 옷깃을 잡고 거세게 흔드는데도 노아 선배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웃기만 했다.

어쭈,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군. 나만 당할 순 없지.

“이리 와 보세요.”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거린 나는 비장한 얼굴로 노아 선배에게 손짓했다.

“뭐 하는 거야……?”

“움직이지 마세요!”

“으응.”

나는 근처 벤치에 앉아 은색 머리카락을 촘촘하게 땋았다. 친구들끼리 가끔 해 주는 거라 익숙했다.

허리께에서 찰랑이던 머리카락을 땋으니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왔다. 꼭 엘프처럼 청순하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음, 그런데 어째 선배가 내 머리를 땋았을 때보다 어설퍼 보이는데. 뭐, 이만하면 예쁘지. 본판이 잘났으니 뭔들 안 어울리겠냐만.

“벌칙이에요. 다음 수업에 이렇게 가세요. 풀면 혼나요.”

삐죽 튀어나온 옆머리를 정리해 주며 내가 신신당부했다.

“응, 네 말대로 할게.”

노아 선배는 알겠다며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뭔데 이렇게 귀엽지? 왜? 누구 좋으라고?

“저기, 그……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과한 귀여움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는데, 노아 선배가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장난기 가득하게 웃던 건 언제고 지금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신세였다. 그런데 그런 손까지 한껏 빨개져 있어서 의미 없는 행동 같았다.

아, 노아 선배는 부끄러울 때면 귀, 목, 손까지 다 빨개지는구나. 완전 귀엽지 않아?

오늘은 날이 조금 더워서인지 겉옷을 벗은 선배는 셔츠와 넥타이 차림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손을 뻗어 셔츠 너머로도 뚜렷한 복근을 훑었다. 한 손으로는 잘록한 허리를 더듬었다.

손길이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 탄탄한 가슴까지 닿았다. 나는 한 손으로 넥타이와 땋아 내린 은발을 만지작거리며 가지고 놀았다.

“……흣.”

“?”

이게 무슨 소리지.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들었더니 선배가 입을 가린 채 신음을 참으려는 듯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걸 본 나는 당황스레 침을 삼켰다.

노아 선배가 입술을 꾹 깨문 채 억누른 소리로 중얼거렸다.

“……가, 간지러워.”

“…….”

이거 참…… 순진한 처녀 희롱하는 변태 늙은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 선배 애인 아닌가?

“……아.”

머쓱해진 내가 넥타이를 놓고 선배의 몸에서 손을 뗐다.

아, 아니. 그 정도야? 내가 뭘 했다고?

“아하하.”

애써 웃으며 어떻게든 무마해보려 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제기랄.

“다, 다음 수업 가야 해.”

결국 선배는 홍조 띤 얼굴로 그렇게 더듬거리며 가 버렸고, 혼자 남겨진 나는 손끝에 걸리던 그 감촉을 떠올리며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근육이.”

* * *

하루가 지나서도 그 울퉁불퉁한 감촉이 손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몽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근육…….”

“엉?”

내 앞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씹던 글로리아 선배가 내 말을 듣곤 슬쩍 웃으며 셔츠를 말아 올렸다.

“근육은 갑자기 왜? 근육이 좋아? 근육이라면 나도 있는데.”

“아잇, 미쳤나 봐. 옷 좀 똑바로 입어요, 선배.”

나는 눈을 감은 채 무력하게 손을 휘적거렸다.

글로리아 선배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셔츠 자락을 팔랑거렸다.

“내 복근 완전 뚜렷한데.”

“아, 관심 없으니까 선배 혼자 실컷 보세요.”

“힝.”

내 싸늘한 대답에 글로리아 선배가 시무룩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나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적당히 따사로운 햇살에 달궈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노아 선배도 검을 쓸 줄 아나요? 근육이, 아니, 음. 네.”

“그럼, 유리엘 후작가의 이름이 있는데.”

물론 나보다는 못하지만.

글로리아 선배가 그렇게 말하며 팔짱을 낀 채 콧대를 세웠다.

“어, 검을 잡고 있는 건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검 쓰는 선배, 엄청 멋질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말하며 두 눈을 반짝거리자 글로리아 선배가 으스댔다.

“걘 원래 검을 별로 안 좋아해. 열 살 때 나랑 대련했다가 엄청 깨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흐흥.”

“유언비어 퍼뜨리지 마.”

어디에 있던 건지 불쑥 튀어나온 노아 선배가 퉁명스럽게 끼어들었다.

“깜짝이야! 어디 있었어요?”

선배의 난입에 화들짝 놀란 나는 벌렁벌렁 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금 왔어.”

그렇게 대답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노아 선배의 뒤에서 글로리아 선배가 샐샐 웃는 얼굴로 빈정거렸다.

“헹, 웃기시네. 유언비어는 무슨 유언비어. 너 나한테 지고 내 얼굴도 안 보려고 했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한데.”

“……안 그랬거든.”

노아 선배가 고개를 돌리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그 둘 사이에 기웃거리다 타이밍을 봐서 입을 열었다.

“그, 선배.”

“응?”

글로리아 선배와 신경전을 벌이던 선배는 급작스레 다정해진 목소리로 되물으며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제가 어제는 진짜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괜찮아.”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노아 선배는 살짝 웃으며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나는 선배의 눈치를 보며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어제 그렇게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도망치던 것과는 달리 지금의 노아 선배는 부끄러움 따위는 하나도 없이, 그저 나를 봐서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긴 우리는 연인이니까. 우리가 스킨십 좀 했다고 어색해지는 사이는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쑥스럽기도 하고 안심이 되는 것 같기도 해서, 괜히 뺨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그런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노아 선배가 팔을 뻗어 나를 꽉 끌어안자 글로리아 선배가 옆에서 토 쏠린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그걸 가볍게 무시한 노아 선배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음 수업 뭐야? 같이 갈까?”

“으으응.”

노아 선배의 허리에 팔을 감은 나는 고개를 젓고는 선배의 분홍색 입술에 대고 작게 버드 키스를 했다. 글로리아 선배가 소스라치며 멀어져 갔다.

“전 잠깐 가 볼 데가 있어서요. 대신 이따 점심 같이 먹어요.”

* * *

“……?”

무려 노아 선배와 헤어지고 나 혼자서 찾아왔는데, 아르한과 가끔 만나기로 했던 탈의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웬일이래…….”

예전에는 올 때마다 먼저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지.

오, 얘 설마 공부하나?

놀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이내 아르한네 교실을 찾아 1층으로 향했다.

계속 안 찾아왔다고 삐졌으면 어떡하지.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해야겠다.

“읏차.”

그런 걱정과 함께 교실에 도착한 나는 창틀에 매달려 붉은 머리카락을 찾아 창문 너머로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빨간 머리는 제법 희귀한 편인데 이상하게도 통 눈에 띄질 않았다.

이상하다. 거기에 없었으면 교실에 있을 텐데.

그러는 사이 다른 1학년들이 이상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1학년 층에 노란 명찰의 2학년이 있으니 이상해할 만도 하지.

뻘쭘함에 슬그머니 창틀에서 손을 떼는데, 마침 이쪽을 힐끔대던 한 1학년생이 물어 왔다.

“무슨 일이세요?”

“저기, 여기 아르한 히리스라는 애 없니?”

“걔 지금 없는데요.”

“아, 그래?”

에이, 허탕 쳤네.

혀를 차며 몸을 돌려 떠나려고 하는데, 고불고불한 머리의 여학생이 문가에 몸을 기대고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와, 키 크다. 1학년 맞나?

속으로 감탄하며 올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나를 향해 툭 하고 던졌다.

“양심 있으세요?”

“어, 어?”

나를 아나?

당황하며 침을 삼키고 있는데, 뒤에서 튀어나온 한 학생이 그 여학생의 뒤통수를 빡 하고 때렸다.

“야, 너 미쳤어? 죄송합니다, 선배님. 얘가 아주 그냥 미쳐서!”

그 학생이 내게 고개 숙여 사과하자 곱슬머리 여학생이 발끈해 소리쳤다.

“야, 왜 때려! 내가 틀린 말 했어?! 그 3학년 선배랑 있는 거 내가…… 으읍읍!”

여학생이 입이 막혀 읍읍거리는 소리를 냈다. 원래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안 들렸는데 지금은 더했다.

“넌 입 좀 다물어!”

또 다른 학생이 한숨을 내쉬며 곱슬머리 여학생의 등을 내려쳤다. 여학생은 지지 않고 다시 떽떽거렸다.

“아, 아프다고 멍청아!”

“넌 입 좀 조심해, 선배한테!”

왜 자기들끼리 말하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거지.

그렇게 왁왁거리며 싸우는 1학년생들을 아연한 얼굴로 지켜보던 내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어…… 걔 보면 내가 왔었다고 말해 줘…….”

“넌 걔가 허구한 날 삽질하는 거 안타깝지도 않냐?”

“그게 선배한테 시비 거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

쟤네……내 말을 듣긴 한 거겠지?

1학년에게 쫀 2학년은 주춤거리며 다시 입을 열려다가 말고 조용히 몸을 돌려 1학년 층을 떠났다.

아니면 뭐 어떡할 거야. 나중에 다시 오지 뭐.

그런데 양심 있냐는 건 무슨 뜻일까. 나 쟤 본 적 없는데. 헉, 아르한 얘가 친구들한테 내 욕한 거 아냐?

“휴우.”

와, 그나저나 요즘 애들 무섭네. 나 1학년 때는 안 저랬는데.

조금 주눅이 든 채로 계단을 올라가던 나는 속으로 꼰대 같은 생각을 하며 뻐근한 뒷목을 문질렀다.

다음에는 꼭 친구들이랑 같이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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