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10)

“자, 책 펴자. 나 때문에 지난 시간에 못 했네.”

미안한 얼굴의 플로라 선배가 책을 펼쳤다.

나는 의욕 없는 얼굴로 팔을 흐느적거렸다.

“오늘은 쉬면 안 돼요?”

“부장님, 비 와서 힘없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던 글로리아 선배가 책상 위에 힘없이 널브러졌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오늘은 날이 꿉꿉하고 습했다.

“아악, 비 오니까 머리가 진짜!”

내가 유독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길 포기하고 빗을 내려놓자, 빗은 내 머리칼 사이에 고정되다시피 껴 있었다.

“와, 신기해.”

나는 입을 벌리고 내 머리카락을 툭툭 건드리는 글로리아 선배를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직모인 사람은 곱슬이 얼마나 불편한지 몰라요.”

그렇게 말하곤 내 아픔을 알 법한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죠, 플로라 선배?”

“응?”

플로라 선배가 잘 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눈을 깜빡이자, 나는 찰랑이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보며 입을 벌렸다.

분명 양털처럼 복슬복슬하게 생겼는데, 어째서 비 오는 날에도 멀쩡한 거지? 뭘 어떻게 했길래.

“어떻게 머리카락을 그렇게 안 엉키게 유지할 수 있죠?”

“어…… 글쎄, 별거 안 하는데.”

플로라 선배가 답을 줄 수 없어 무척 미안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엉킨 머리카락을 쥐어뜯다시피 하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이놈의 머리카락, 확 다 잘라 버릴까.”

겨울에는 참 좋은데 말이지.

내가 별생각 없이 중얼거리자 내 옆에 앉아 있던 노아 선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안 돼.”

“네? 왜…….”

하긴 노아 선배는 내 머리카락 만지는 걸 좋아하지.

“왜요?”

왜인지 알면서도 물어보고 싶었다.

노아 선배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민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냥…… 싫어.”

“그래요? 음.”

엉킨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내가 작게 침음을 흘렸다.

그럼 반대로 노아 선배가 머리를 자른다면?

……안 돼! 아직 한 번도 못 땋아 봤는데! 물론 단발이나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릴 것 같기는 하지만…….

나는 결심이 선 얼굴로 선배의 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절대 지켜. 선배 머리카락 절대 지켜.

“흐응, 단발머리 케이트. 난 머리 자른 것도 귀여울 것 같은데.”

글로리아 선배가 내 머리카락을 구부려 단발로 만들며 싱긋 웃었다.

“나도 한번 잘라 볼까?”

그렇게 말하며 제 머리카락을 이상하게 구부리는 그녀를 본 내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안 어울려요.”

“이상해.”

노아 선배는 그런 글로리아 선배를 보며 차가운 얼굴로 중얼거렸고, 플로라 선배는 배를 잡고 하하 웃었다.

“하하, 바보 같다.”

“……플로라 너까지. 애가 변했어, 너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무슨 소리야, 난 원래 이랬어.”

플로라 선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매끄럽게 웃자 글로리아 선배는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턱 벌렸다.

어느새 동아리의 목적은 저 멀리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이 언니는 너무 섭섭하다. 그래도 넌 내 편이지, 케이트?”

글로리아 선배가 흘리지도 않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노아 선배가 코웃음을 치더니 내 어깨를 감쌌다.

“너 같은 처형 둔 적 없어.”

“아하하학, 부끄럽게 진짜.”

나는 입가를 가린 채 노아 선배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리며 웃었다.

“우웨에에엑, 미친놈!”

반면 글로리아 선배는 연신 헛구역질을 해 대며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아, 내 손발! 오글거려어어!”

거의 발작하고 있는 글로리아 선배를 턱을 괸 채로 빤히 바라보던 내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용케 여태껏 친구로 지내시네요.”

“친구…….”

내 말을 들은 노아 선배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친구지, 애인이냐?”

“으.”

그에 글로리아 선배가 당당하게 맞받아치자 노아 선배는 얼굴을 구기며 질색을 했다.

글로리아 선배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 절교를 8년째 미루다 보니 이렇게 됐다. 이래서 미루는 습관이 안 좋은 거야, 쯧.”

의자에 몸을 기댄 채 혀를 쯧 찬 글로리아 선배가 문득 창밖을 내다보며 고개를 돌렸다.

“어, 비 그쳤다.”

플로라 선배가 시계를 흘깃대더니 아직 덮인 채로 있는 책을 집어 들며 소리쳤다.

“아, 뭐야. 결국 하나도 못 했잖아!”

* * *

비가 내려서 좋은 건 후텁지근한 더위가 조금은 가신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자 하늘은 맑게 갰으며 공기는 허공에 물방울이 떠다니는 것처럼 시원했다.

“와, 하늘 좀 보세요.”

노아 선배의 손을 잡고 화단 앞으로 나온 내가 하늘에 뜬 구름을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아아, 시원해. 겉옷 입어도 되겠다.”

나는 물방울이 묻은 벤치를 닦은 뒤 그 위에 앉고서 노아 선배에게도 앉으라 손짓했다.

흔들던 다리에 힘을 풀자 신발이 젖은 풀밭 위로 내려앉았다.

은은한 향기를 머금은 은색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저기, 선배. 우리 사귄 지 얼마나 됐죠?”

선배는 손가락을 접으며 계산을 하는 듯싶더니 이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32일.”

“와, 대단하다! 혹시 일기 같은 거 써요?”

내가 두 눈을 반짝거리자 노아 선배가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딱히.”

“와아. 저는 까먹었는데, 대단해요.”

“뭐?”

선배의 눈썹이 늘어졌다. 섭섭하다는 표정에 대고 나는 실컷 웃었다.

“농담이에요. 9월 6일, 저도 기억해요.”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날. 그걸 어떻게 잊겠어.

나는 턱을 괸 채 노아 선배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고는 선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근처에 연무장이 있어서인지 검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챙, 챙 하고.

아무 생각 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요즘 아르한이 안 보이네.

으아, 요새 계속 노아 선배랑 있느라고 생각도 못 했어. 지금 엄청 삐져 있으면 어쩌지? 언제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먹을 것도 좀 들고.

죄책감에 뺨을 찹찹 때리고 있는데, 노아 선배가 두 눈을 깜빡거리며 물어 왔다.

“무슨 생각해?”

“아, 제 아는 동생이요. 그래도 같은 아카데미인데 못 본 지 꽤 된 것 같아서요.”

“……아.”

내 대답을 들은 선배는 투정을 부리듯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왜 그러세요?”

나는 그 이유를 알면서도 모른 척, 그렇게 물었다. 우리 선배 은근 질투가 많다니까. 그런 것도 귀엽지만.

“그냥.”

“아, 왜요, 왜요, 왜.”

선배는 대충 얼버무렸지만 굴하지 않고 얼굴을 들이대며 계속 묻자, 결국 대답이 나왔다.

“……꼴사납게 보이기 싫어.”

“에이. 귀여운데요, 뭐.”

“!”

내 말에 귀까지 빨개진 노아 선배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에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마침 근처에 예쁜 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였다.

원예부 화단도 아니니 괜찮겠지. 나는 허리를 굽혀 꽃 한 송이를 따 노아 선배의 머리카락에 꽂았다.

“예뻐요.”

언제 봐도 눈부신 미모에 엄지를 척 세우며 말하자, 노아 선배가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넌 아무것도 안 꽂아도 예뻐.”

“와, 방금 선배 되게 선수 같았어요.”

내가 웃음을 참으며 그렇게 말하자 노아 선배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에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소리 내어 웃고는, 머리에 꽂은 꽃을 만지작거리는 노아 선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내 머리카락이 허공에 휘날렸다.

어느새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 * *

“종 쳤네요.”

나는 우울하게 복도를 지나 교실로 향했다.

“수업 잘 들어.”

학년끼리는 층이 갈리는 탓에 계단 앞에서 멈춰선 노아 선배가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 항상 느끼는 건데 선배 키 너무 커요.”

나는 내 정수리를 만지작거리며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작은 건가.”

노아 선배랑 족히 머리 하나는 차이 나는 키.

내 키가 아빠를 좀 닮았으면 이런 일은 없는 건데. 아, 아빠. 왜 머리카락만 물려줬어.

속으로 툴툴거리던 나는 근처 계단을 보고 그 위로 올라갔다. 그 덕에 한 계단 아래에 있는 노아 선배의 정수리가 보였다.

나는 선배의 앞머리를 걷고 하얗게 드러난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따가 봐요.”

그렇게 말하며 웃자 갑자기 선배가 나를 밑으로 끌어당겨 꽉 안았다.

“켁.”

나는 숨이 막혀 가슴을 들썩거렸다.

“아, 사람들이 보잖아요.”

그래도 선배가 나를 놓아주지 않자 나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선배의 어깨를 팍팍 두드렸다.

“헤어지기 싫다.”

“수업은 들어야지 어쩌겠어요.”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는 선배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악, 늦겠다! 선배 안녕! 이따 봐요!”

시계를 확인한 나는 기겁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계단을 올라, 와르르 몰려가는 학생들 틈에 섞였다.

“하아, 하아.”

다행히 수업에 늦진 않았다.

제때 교실에 도착한 나는 안심하며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응?”

그런데 어째 시선이 여기로 쏠리는 것 같은데. 웃고 있는 애들도 있는 것 같고.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나는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디 꽃밭에서 뒹굴다 왔냐?”

옆자리에 앉은 도라가 내 머리를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엉?”

내가 의아한 얼굴로 내 머리카락을 더듬자, 손에 무언가가 딸려 나왔다.

“!”

내 손에는 노란색 꽃이 들려 있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뻔했다.

아, 진짜!

나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꽃을 책 사이에 끼우고 덮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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