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10)

* * *

교실 문을 연 글로리아 선배는 플로라 선배가 먼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몸을 흠칫 떨었다.

“웬일이야, 네가 이렇게 빨리 오고?”

“응, 나 친구 수가 반토막이 났거든.”

그녀가 놀란 듯 묻자 플로라 선배가 머쓱한 얼굴로 하하 웃었다.

“뭐? 어쩌다가?”

“음, 내가 신문부장한테 화내고 부실을 엎어 놔서? 그새 소문이 났나 봐.”

“와, 네가?”

플로라 선배가 태연한 낯으로 대답하자 글로리아 선배가 무척 놀란 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잘된 거죠. 그놈은 그래도 싼걸요.”

신문 좀 밟혔다고 해서 회개할 놈도 아니고.

나는 고소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웬일이래, 정말. 진짜 우리 플로라 맞아?”

정말 놀란 듯, 연신 무어라 중얼거리던 글로리아 선배가 문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노아스 이건 왜 이렇게 안 와?”

“그러게요, 노아 선배가 늦네요.”

나는 걱정스레 복도를 내다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몇 분이 지난 후에야 교실 문이 열리고 노아 선배가 들어왔다. 하지만 선배는 혼자가 아니었다.

“플로라.”

어두운 남색 옷을 입고 분홍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푸른 눈의 여인은 누가 봐도 플로라 선배의 혈육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건 플로라 선배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엶으로서 사실로 드러났다.

“어, 어머니?”

“안녕하세요, 백작 대리님.”

글로리아 선배가 조금 놀란 얼굴로 인사를 하자 여인이 익숙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랜만이군, 루피너스 영애.”

아, 어머니?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슬금슬금 교실 구석으로 향하고 있는데, 여인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영애는 처음 보는군. 로제트 아이비라고 한다.”

“네, 네. 백작 대리님. 케이틀린 블레어입니다.”

아까 글로리아 선배가 그녀를 부르던 호칭을 떠올린 내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백작 대리……, 아, 맞다. 아이비 백작가는 가주가 일찍 죽었다고 들었어. 그럼 이 사람이 전 백작부인인가?

뒤늦게 플로라 선배의 가정사를 깨달은 내가 멍한 얼굴로 서 있는데, 플로라 선배가 곧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왜 여기 계세요?”

“내가 연락드렸어.”

혼란스러운 표정의 플로라에게 노아 선배가 대답했다.

“왜, 왜 그랬어…….”

노아 선배를 향한 푸른 눈이 원망 비슷한 것을 담고 일그러졌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미안해할 법도 하건만, 노아 선배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가 연락할 생각이 없어 보이길래. 그래도 어머닌데 아셔야지.”

“플로라.”

굳은 표정의 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플로라 선배는 두려움에 찬 얼굴을 했다.

글로리아 선배가 노아 선배의 등을 문 쪽으로 쭉쭉 밀었다.

“오늘은 동아리 활동 못 할 것 같네.”

“저흰 가 볼게요……. 가 보겠습니다.”

나도 어물쩍 두 선배들 사이에 섞여 교실을 나섰다.

드르륵 하고 닫히는 문 너머로 두 모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로제트와 단둘이 교실에 남겨진 플로라는 옷깃을 꾹 움켜쥔 채 온몸을 발발 떨었다.

어머니와 이렇게 독대하는 것이 얼마만이지? 이미 수도까지 소문이 난 건가? 내게 실망하셨으면 어떡하지?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지?

“자, 이제 말해 보렴.”

그녀가 속으로 온갖 걱정을 하는 사이, 매서운 푸른 눈이 플로라를 꿰뚫을 듯 번쩍였다.

역시, 내게 실망하신 거야.

절망에 빠진 표정을 한 플로라에게 로제트가 살짝 떨려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왜 내 딸의 소식을 유리엘 영식을 통해서 들어야 하는지 말이다.”

“어머니……?”

“내가 너에게 그렇게 못 미더운 엄마니?”

자신과 똑같은 푸른 눈동자가 서럽게 일그러졌다.

놀란 얼굴로 몸을 떨고 있는 플로라의 손을 꽉 쥔 로제트가 소리쳤다.

“그동안 왜 말하지 않았어, 왜!”

“……어머니는 바쁘, 시잖아요.”

플로라는 옷소매를 꽉 쥐고 입술을 몇 번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어머니가 번거로우실 것 같아서……. 괜히 귀찮게, 힘들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꾹 다문 잇새로 떨림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플로라가 울먹거리자 중간중간 말이 끊겼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래서, 그래서 제가 어떻게든 알아서 다 해 보려고, 했는데…….”

“그런 게 힘들겠니, 내 딸의 일인데? 엄마한테 너보다 중요한 건 없어. 내가 왜 백작 대리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니.”

플로라의 말을 끊은 로제트가 그녀를 으스러져라 강하게 끌어안자, 우아하게 틀어 올렸던 분홍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최소한 뭘 어떻게 하고 다녔으면 이런 일이 생겼냐고 하실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에게 나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놀란 눈으로 가쁜 숨을 들이쉬던 플로라는 손을 들어 로제트를 마주 안았다.

“네가 그렇게 느끼게 해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믿어 주렴. 엄마는 네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전부 내려놓고 네게 올 거란다. 그만큼 너를 사랑하니까, 우리 딸.”

로제트는 그렇게 말하며 플로라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말해 주렴.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힘들었다고 말해도 괜찮아.”

플로라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코를 훌쩍였다. 어머니가 어루만지는 뺨이, 맞잡은 손이 따뜻했다.

어머니랑 이렇게 같이 있어 본 게 얼마만인지.

울먹이는 것도 잠시, 플로라는 살풋 웃으며 코를 만지작거렸다.

“아이고,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되었구나.”

로제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손수건을 꺼내 플로라의 젖은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이러니까 꼭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네.”

“일은, 바쁘지 않으세요?

“하루쯤은 괜찮지. 로이가 수고해 줄 거란다.”

아직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플로라가 묻자, 로제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그 무도한 아이는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어, 아가.”

“네, 감사합니다.”

“……우리 딸이 뭔가 달라진 것 같구나. 무슨 일이 또 있었던 건 아니지?”

플로라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웃네, 우리 딸.”

벅찬 듯 그렇게 중얼거린 로제트가 다시 한번 플로라를 끌어안았다.

“그새 참 많이 컸구나.”

“네.”

플로라는 어머니를 마주 안고 떨리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두 개의 숨소리가 고르게 교실 안에 울려 퍼졌다.

“동아리를 하고 있었구나, 몰랐네.”

로제트가 교실 안을 둘러보며 살포시 미소 짓자, 플로라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독서 토론부요. 제가 부장이에요.”

“넌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지.”

흐뭇한 얼굴로 플로라의 머리를 쓰다듬던 로제트가 물었다.

“그나저나 유리엘 영식과 루피너스 영애 말고도 한 명이 더 있더구나. 그 초록 눈의 학생은 처음 보는데, 둘이 친하니?”

“아…….”

아마 친구들이 있을 교실 밖을 흘끔거리던 플로라는 활짝 웃어 보였다.

“네, 엄청!”

* * *

결국 신문부장과 그 기사를 쓴 학생은 퇴학당했고, 그와 함께 신문부도 거의 해체되다시피 했다. 퇴학 절차는 유독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듣기로는 아이비 백작가에서 상당한 압박이 있었다고 한다.

동시에 헛소문은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그동안 대놓고 신문을 보며 수군거리던 학생들은 플로라 선배가 무슨 살인마라도 되는 것처럼 슬금슬금 피해 다니니 일쑤였다. 이번에도 유야무야 넘어갈 줄 알았는데 플로라 선배가 강경하게 나오니 놀란 거겠지.

흥, 이게 당연한 결과인데 과민 반응하기는.

“신문부가 워낙 실적이 없으니까 이 기사로 화제를 모은 다음에 어떻게든 수습하려 했었나 봐.”

“그래도 선을 넘었죠.”

“암, 한참 넘었지.”

그 자식 아카데미 나가기 전에 한 대 패 줬어야 했다며 글로리아 선배가 주먹을 쥐었다.

나는 그런 선배를 가만히 바라보며 엉킨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문득 예전에 플로라 선배가 스치듯 흘렸던 말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서…… 리아는 좋은 친구지만 위로를 받은 적은 없는 것 같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라. 글로리아 선배가 가벼운 성격이긴 하지만…….

“매점 갈래?”

“까, 깜짝이야.”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때마침 글로리아 선배가 고개를 홱 돌리며 묻자, 깜짝 놀란 나는 헛기침을 하곤 대답했다.

“전 아까 플로라 선배랑 가서 배부르니까 선배 많이 드세요.”

“엥, 언제 갔다 왔대.”

“케이트, 이거 먹어.”

어디선가 방방 뛰어온 플로라 선배가 또 내게 과자를 건넸다.

이게 벌써 몇 개째야. 이러다 점심 못 먹겠네.

“감사합니다.”

사물함에 쟁여 둬야지.

“어, 그거 안 먹을 거면 나 주라.”

“그러세요.”

아무 생각 없이 과자를 글로리아 선배에게 건네려는데, 플로라 선배가 끼어들어 그걸 막았다.

“안 돼, 이건 케이트 거란 말이야.”

내 품에 과자를 도로 안겨 주더니 글로리아 선배에게 윙크를 했다.

“리아 네 건 내가 따로 사 줄게.”

“너 갑자기 왜 그래? 뭐 사 준다니 나야 좋지만.”

글로리아 선배가 놀란 눈으로 입술을 핥는 사이, 플로라 선배는 돌아서서 내게도 윙크를 했다.

“맛있게 먹어, 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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