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10)

외전 - 플로라 아이비

“너, 이게 뭐야?”

헤어진 전 남자 친구가 건넨 신문을 본 플로라가 몸을 굳혔다. 발발 떨리는 분홍색 입술에서 애처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야, 이거 아니야.”

“하, 뭐든 간에 어떻게 좀 해 봐. 애들이 자꾸 나한테도 뭐라 하잖아.”

떨떠름하게 한마디 툭 던지고 멀어져 가는 남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플로라는 멍한 얼굴로 거친 숨을 들이쉬었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어머니를 힘들게 하지 않는 착한 딸.

혼자서도 다 잘하는 똑똑한 아이.

영특한 백작가의 영애.

사려 깊고 착한 친구.

그런 수식어들이 좋았을 뿐인데.

* * *

플로라의 아버지는 그녀가 다섯 살 되는 해 돌아가셨다. 단순 마차 사고였다.

동시에 단란하고 행복했던 가정은 그대로 부서져 버렸다.

온통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게 무슨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고 어머니 손만 잡고 있던 기억이 났다.

남편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어머니를 향해 사람들은 피도 눈물도 없다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플로라는 알았다. 어머니는 울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울지 못한 것이라는 걸.

사용인들까지 모두 물리고 자신이 들을세라 숨죽인 채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려야 했던 어머니.

“나는 내 딸이 어디 가서 무시받고 살게 하지 않을 겁니다.”

아이비 백작가는 손이 귀한 가문이었다. 갑작스러운 가주의 사망으로 인해 어머니 혼자 거대한 가문을 이끌어야 했고, 어린 플로라는 자연스레 그녀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그녀는 유모의 손에서 자라면서 어머니의 관심을 갈구했지만, 어머니를 볼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하루 종일 기다려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고 식사도 따로 먹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도 플로라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플로라, 너는 엄마를 이해해 줄 수 있지?

어두운 밤 침대에 누워 슬슬 잠들라치면 어김없이 찾아온 어머니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하시던 말씀이었다.

어머니가 화려한 드레스를 갑옷처럼 두르고 머리를 틀어 올린 채 사사건건 트집 잡는 원로들과 다른 가문들에 맞서 싸우면서까지 지키려 하는 것이 바로 자신임을 플로라는 알고 있었기에, 플로라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단 하나뿐이었다.

네, 어머니.

내가 예법을 완전히 익히면 보러 오시겠지. 이 책을 다 외우면 칭찬해 주시겠지.

플로라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위로하며 희망을 품었다.

자신이 착하고 좋은 딸로 남아 있는다면 어렸을 때처럼 행복한 가정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어머니밖에 없었던 플로라의 세계에 이방인이 들어선 것은 아홉 살 때였다.

지금보다 머리가 훨씬 짧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던 노아는 착했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노아와 있으면 편했다. 덤덤하고 차분한 그는 자신이 실수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었고 늘 자신의 곁에 있어 주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의 무관심 속에 자란 노아를 자신과 동류라고 느꼈다.

열 살 때는 글로리아와 만나 친구가 되었다. 비록 노아만큼 깊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유쾌한 사람이었고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글로리아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예법 수업을 땡땡이 치고 셋이 놀러 나갔을 때 플로라는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친구가 많으면 외롭지 않아. 혼자이지 않을 수 있어.

열여섯 살,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노아는 여전히 자신의 착한 친구였으며, 웃으며 친절하게 굴면 다른 친구가 생겼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서 있으면 유년기의 부족했던 사랑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실컷 만나 웃고 떠들고 나서도 밤이 되어 침대에 누우면, 꼭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힘이 빠졌다. 조용한 기숙사 방 안이 너무도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플로라는 애써 피로를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아니야, 잘해 왔잖아. 너는 착하고 친절한 플로라 아이비니까 견뎌야 해. 웃으면서 인사하고 다정하게 굴어. 다 네 친구들이잖아?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아챈 건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물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자신보다 케이트를 먼저 구하고 걱정하고 있는 노아를 본 순간, 그야말로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케이트와 노아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조금 싸한 느낌이 들긴 했다. 다른 때 같았다면 자신이 헤어졌다는 말을 듣자마자 걱정부터 하며 무뚝뚝하면서도 다정한 위로를 건네주었을 텐데, 지금은 말 몇 마디만 하고서 케이트 옆에만 붙어 있다.

플로라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머리카락 너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노아가 있었다.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기고 있는 노아가.

네가 어떻게 그래.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네가 다른 사람을 나보다 우선시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 우린 친구잖아.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주저앉아 있던 플로라는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착하고 선한 후배에게 질투를 하다니, 자기 연인을 먼저 챙기는 소꿉친구에게 섭섭함을 느끼다니. 이러면 안 되는데. 착하게 굴어야 하는데.

바로 그날부터였다. 정말로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느낀 것은.

* * *

“플로라, 내가 진짜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내가 쓴 것도 아닌데 나한테만 이러는 건 조금. 음, 어쨌든 조금만 참아 볼래? 어차피 금방 잊힐 텐데 뭐. 네 욕하는 기사를 낸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나름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던 신문부 부장이 변명을 늘어놓자, 플로라는 배신감에 몸을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착하게 굴면 좋은 친구가 많이 생기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아니, 애초에 나한테 친구가 있긴 했나?

혹시 이게 다 내 잘못인 건가?

내가 호구처럼 굴어서? 그러면 도대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플로라는 입술을 깨물며 손에 든 신문을 구겨지도록 꽉 쥐었다.

* * *

“그럼 저한테도 똑같이 공평하게 기대 주세요.”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그렇게 말하며 웃던 그 애는 마치 태양처럼 빛났다. 어두웠던 시야가 확 밝아지는 착시가 들었다.

케이트가 했던 말 중 어떤 게 그렇게 특별하게 다가왔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녀의 위로는 무척이나 효과적이었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지금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플로라는 쓰레기통을 찾아 다 먹은 과자 봉지를 버렸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2층 신문부 부실로 향하며, 플로라는 케이트가 과자를 오물거리며 해 준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선배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다정하게 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선배는 너무 교과서처럼 살아요. 화가 나면 가끔은 좀 못되게 굴어도 괜찮아요. 아, 욕도 좀 하고요.’

그녀의 말은 완전한 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머리를 맑게 해 주었다.

이제 답은 스스로가 찾아야 할 때였다.

“어, 어, 플로라?”

플로라가 노크도 없이 부실 문을 열어젖히자 신문부 부장은 놀란 듯 몸을 파드득 떨었다.

“이, 있잖아. 네 친구들 좀 말려 주라. 나 방금 진짜 죽을 뻔했단 말이야, 응?”

그것도 잠시, 비굴한 얼굴로 말하던 부장은 플로라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고개를 들어 그녀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호소에도 무표정인 그녀를 본 그가 필사적으로 변명을 시작했다.

“나, 나는 정말 악의로 그런 게 아니었어. 시간이 조금 지나면 정정 기사도 낼 생각이었다고. 너는 분명 착하니까 이해해 줄 거라고…….”

“아, 그랬구나.”

차가운 웃음을 흘린 플로라가 책상 가득 쌓인 신문을 보더니 그걸 손으로 쳤다.

“이딴, 개소리를 써서 온 아카데미에 뿌려도, 그래도 내가 실실 웃으면서 넘어가 줄 줄 알았구나.”

허공 가득 흩날리는 종이 사이로, 매끄러운 웃음을 띤 하얀 얼굴이 보였다.

“그게, 그러니까…….”

“와, 넌 끝까지 사과도 안 하는구나?”

플로라는 차게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짓밟았다.

“미,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여성용 단화에 신문이 형편없이 짓밟히는 것을 보고 그녀와 자신의 신분 차이를 상기한 부장이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빌었지만, 플로라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다.

“미안할 짓을 했으니 알아서 책임질 거라 믿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달라지지?

전에는 마냥 호구 같고 착해 보였던 그 웃음이 저렇게 서늘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신문부장은 생각했다.

“그럼, 내일 보자.”

그 말과 함께 꽃잎 같은 분홍 머리카락이 문 너머로 사라졌다.

두려움에 떠는 부장을 뒤로한 채 교실을 나선 플로라는 닫힌 문에 등을 기댔다. 이내 몸이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와.”

플로라는 탄성을 흘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화를 낸 것도 비꼰 것도 욕을 한 것도. 자기가 하면서도 이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일그러진 부장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 차도록 만든 게 바로 플로라였다.

그랬더니 정말 통쾌했다. 왜 진작 이렇게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다음에 신문부 아이들과 그 친구들을 만난다면 분명 수군대며 피할 것이다. 신문부장과는 절대로 예전처럼 지낼 수 없을 거고.

하지만 참 이상하게도 그에 대한 걱정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편해.”

불안감에 몸부림치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시원하기까지 했다.

플로라는 희미하게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살이 비치는 파란 여름 하늘은 자신의 기분을 대변하듯 맑고 청명했다.

나는 계단 벽에 몸을 기댄 채 위층을 연신 힐끔대고 있었다.

“케이트.”

분홍색 머리칼을 살랑이며 계단을 내려온 플로라 선배가 난간에 몸을 기대고 나를 바라보았다.

“잘하고 오셨어요?”

약간 걱정이 되어 그렇게 묻자, 편안하고 나른한 얼굴의 플로라 선배가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신문도 밟고 막 화도 냈어.”

“잘했어요.”

각성했구나, 선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몇 계단 위에 서 있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고 폴짝 뛰어내린 플로라 선배가 팔짱을 껴 왔다.

“우리 매점 갈래?”

“네? 또요?”

방금 초콜릿 먹었는데.

내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되묻자 플로라 선배가 지갑을 꺼내 보이며 웃었다.

“이번엔 내가 사 주고 싶어서.”

나는 아까보다 훨씬 후련해 보이는 그녀를 보며 미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 그래요.”

역시 상담 수업 시간에 안 졸길 잘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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