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10)

* * *

입술을 꾹 깨문 채 단박에 계단 두 층을 오른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동아리 교실 문을 열었다.

이미 백금색 머리카락의 여학생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글로리아 선배! ……뭐 하세요?”

나는 책상에 발을 올리고 있는 글로리아 선배를 부르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녀의 한쪽 손엔 잔뜩 구겨진 학교 신문이 들려 있었다.

선배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쓴 새끼 누구니?”

“그건 저도 몰…… 아니, 검은 왜 꺼내시는 거예요.”

그것도 목검이 아니라 은빛으로 번뜩이는 진검을.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말렸다. 이러다 누구 죽겠다.

그러자 글로리아 선배가 한층 느슨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안 때려, 안 때려.”

“네? 그럼…….”

그녀는 태연한 낯으로 살벌한 소리를 했다.

“저며 버릴 거야.”

“그건 더 안 돼요!”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말렸다.

“이런 건 징계를 먹여서 학점을 조져야지, 물리적인 폭력은 안 돼요.”

“케이트가 맞아.”

문가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 선배도 보셨어요?”

“응.”

문가에 서 있는 노아 선배의 손에도 잔뜩 구겨진 신문이 들려 있었다. 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나는 선배가 나나 글로리아 선배만큼 화가 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네가 때린다고 해결될 일 아니야.”

글로리아 선배에게 그렇게 말한 노아 선배가 책상에 구겨진 신문을 내려놓았다.

나는 신문을 도로 펼치곤 얼굴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오다 들었는데, 이걸 기사로 내서 나눠 주는 걸 신문부장이 허락했대요.”

“신문부장은 플로라랑 아는 사이야.”

미간을 잔뜩 좁힌 노아 선배가 말을 이었다.

“꼴에 팔아먹어도 될 만큼 플로라랑 친하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플로라를 호구로 봤거나.”

“무뇌아거나, 개새끼거나 둘 중 하나지.”

불쑥 끼어든 글로리아 선배가 말했다.

노아 선배는 그녀의 험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의미는 대충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뇌아 개새끼한테 따질 예의는 없지.”

글로리아 선배가 푸른 눈을 서늘하게 빛내며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말만 해, 그 새끼 명찰을 검에 꿰어 올 테니까.”

“그것보다는 신문부에 항의를 하는 게 낫지.”

노아 선배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글로리아 선배의 말대로 하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

“저…… 근데요.”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둘의 설전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내가 입을 열었다.

“지금…… 플로라 선배는 어디서 뭐 하고 있을까요?”

사실 그게 지금 제일 중요한 거 아닌가.

내가 소심하게 내뱉은 말에, 교실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 * *

와, 이거.

복도를 지나던 나는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만히 있어도 아카데미 온 구석에서 플로라 선배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투신했다는 기사 때문에 지금은 동정론이 많았지만, 지나가던 모르는 사람에게서 불쌍하다는 눈길을 받는 건 썩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신문부 부실은 2층이야.”

지금 당장 플로라 선배를 찾기는 어려우니 일단은 신문부 부실을 찾아가기로 했다.

“신문부장 여기 있냐?”

우리 셋 중 가장 빨리 부실에 도착한 글로리아 선배가 험악한 표정으로 거칠게 발로 문을 차 열었다.

“……어?”

“왜요?”

그런 그녀가 무언가를 보고 놀란 듯 문가에 가만히 서 있자, 나는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플로라 선배?”

부실 안에는 플로라 선배가 먼저 와 있었다. 기사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걸까?

글로리아 선배를 옆으로 제치고 부실에 들어선 내가 그녀를 불렀다.

“여기 계셨어요?”

“…….”

선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플로라 선배가 거칠게 몸을 돌리자 분홍 머리카락이 허공에 붕 떴다가 내려앉았다.

그녀가 기사 이야기를 한 게 맞는지, 의자에 앉은 신문부장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 플로라, 이미 나간 기사를 정정하는 건 어렵다니까…….”

그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굉음과 함께 책상에 검이 박혔다. 목검이 아니라 날카롭게 번뜩이는 진짜 검이었다.

“야.”

“어…… 어?”

신문부장이 멍청하게 되묻자 글로리아 선배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플로라한테 사과하고 자진해서 그 기사 수습할래, 아니면 내일 제국 신문에 너희 가문 사업 다 쫄딱 망했다고 나오게 해 줄까?”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새파란 눈이 희번덕거렸다.

나긋나긋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신문부장이 땀을 뻘뻘 흘렸다.

“아니면 지금 여기서 오러에 맞아 보는 것도 나름 영광이겠다. 네가 살면서 소드 마스터를 만나 볼 일이 또 있겠어?”

“나, 나 이제 수업 가야 하는데…….”

“아, 걱정 마. 곧 병결 처리될 테니까.”

노아 선배는 글로리아 선배를 말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말리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처음 보는 살벌한 표정으로 신문부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받는 건 내가 아닌데도 괜히 등골이 서늘했다.

두 선배가 신문부장을 겁박하고 있는 사이,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던 플로라 선배는 교실을 나서 복도로 걸어갔다.

“어, 어디 가세요?”

그녀를 연신 힐끔대고 있던 내가 물었지만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제가 갈게요! 계속하세요.”

부실의 두 선배를 지지해 주곤 플로라 선배를 따라나섰다.

“선배!”

그 잠깐 사이 플로라 선배는 복도 끝까지 가 있었다.

내가 몇 번을 불러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오르던 내가 떨리는 손으로 난간을 붙잡았다.

“잠, 잠깐만…… 헉.”

너무 빠르다.

나는 잠시 멈춰서 흐른 땀을 닦았다.

글로리아 선배더러 따라가라고 할 걸 그랬나.

나는 터질 듯이 벌렁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플로라 선배가 빠른 걸음으로 향한 곳은 우리 동아리 교실이었다.

문에 작게 노크를 한 내가 교실 안에 대고 물었다.

“……들어가도 돼요?”

답이 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교실 문을 열어젖혔다.

“괜찮으세요?”

창가에 서 있는 플로라 선배의 하얀 얼굴에 옅게 눈물 자국이 나 있었다.

내가 교실로 들어오는 것을 본 플로라 선배가 얼굴을 문지르며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 추하지?”

하나도 추하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멋대로 입이 열렸다.

“추하면 뭐 어때요.”

나는 쓸쓸히 눈을 깔고 있는 플로라 선배의 옆으로 다가가 책상에 몸을 기댔다.

“너한테는 유독 이런 꼴을 자주 보이네.”

민망한 듯 살짝 웃으며 플로라 선배가 중얼거렸다. 울어서인지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선배가 진정될 때까지 여기 있을게요. 노아 선배랑 글로리아 선배는 신문부 부실에 있어요.”

내가 조용히 말하며 손수건을 건네자 플로라 선배는 창피한 듯 고개를 돌렸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교실 안에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몇 분이 지나자 가쁘고 거칠던 호흡이 점차 안정되었다.

“기사 보자마자 깜짝 놀랐어요. 뭐 그런 놈들이 다 있나 하고요.”

이쯤이면 진정된 거겠지?

나는 플로라 선배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남의 사생활을 그렇게 함부로 적으면 안 되는 거죠. 선배, 얼른 가문에 연락해서 신문부장 놈을 제대로 조지…….”

“아, 안 돼.”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열변을 토하는데, 방금까지는 가만히 듣고만 있던 플로라 선배가 내 옷소매를 꽉 쥐었다.

“네?”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시면 절대 안 돼.”

플로라 선배는 희게 질린 얼굴로 손톱을 마구 물어뜯었다. 내 소매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머니는 안 돼, 어머니는…….”

“……알았어요, 진정하세요.”

나는 선배를 살며시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어머니 이야기에 왜 선배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가문에 알리자는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겠다.

내 품에 안긴 플로라 선배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한심해.”

뭐시라?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귀를 의심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나를 포함해서 플로라 선배보다 못한 대다수의 인간들은 뭐 어떡하란 말인가. 그렇게 자기혐오를 해 버리면 선배보다 더 한심한 사람들이 슬플 텐데. 물론 나도.

“애초에 내가 호구처럼 다니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선배 탓이 아니…….”

내가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데, 플로라 선배가 일순 고개를 돌리고 내 팔목을 잡아 왔다. 물기 어린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케이트, 너도 내가 불쌍해?”

“네?”

“매 학기마다 실연당해서? 신문에 저런 기사가 나서?”

“…….”

“하도 애인 사귀고 다녀서 옆자리가 빌 날이 없대. 혹시 고백 거절 못 할 정도로 호구인 거 아니냐던데?”

작게 실소를 흘린 플로라 선배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는 애들이 나보고 호구라고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 그걸 듣고도 아무 말도 못 했으니 호구가 맞는 걸지도 몰라.”

아니, 이게 무슨…….

나는 황당함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가끔 플로라 선배가 호구처럼 착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어도, 불쌍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동아리에 들지 않았고 지금 복도에 있는 아이들과 같이 있었다면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2년 가까이 옆에 있으면서 나름 오래 봐 왔다.

선배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를 동정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주제 넘는 짓을 하려면 적어도 선배보다 모든 면에서 잘나고 나서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지난번엔 노아랑 멀어질까 봐 너를…….”

그녀가 분홍색 입술을 깨물며 말끝을 흐렸다.

잠시 침묵하던 선배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너도 1층에 있는 애들처럼 내가 불쌍하니?”

“아뇨.”

단호하게 대답한 나는 담담하게 그녀의 등을 쓸었다.

“어떤 대답을 기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배는 하나도 안 불쌍해요. 한심하지도 않고요.”

노아 선배도 그렇고 플로라 선배도 왜 이렇게 자존감이 낮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 사정이 있겠지.

나는 눈을 접어 활짝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애인한테 몇 번 차인 거 가지고 동정하네 마네 하기에는, 선배는 너무 멋지거든요.”

선배의 하늘색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에 나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선배처럼 매력 있는 사람한테 애인이 끊이지 않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 않을까요. 제가 남학생이었어도 선배를 좋아했을 것 같은데요.”

“…….”

“아니, 그런데 사실도 아니고 개인 감상을 기사랍시고 싣다니, 신문부라고 부를 가치도 없을 거 같은데요.”

너무 화가 나서 자세히 읽지는 못했는데, 연애 많이 한다고 까는 내용도 있었단 말이야?

나는 속으로 분노를 억누르며 플로라 선배의 손을 꼭 잡았다.

“어쨌든 그런 사소한 것 때문에 스스로를 평가 절하 하지 마세요. 선배는 잘하고 있으니까, 뭐든.”

와, 나 멋진 척 장난 아니었다. 자기 개발서 읊는 것 같네.

아직도 플로라 선배가 아무 반응이 없길래, 머쓱하게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내가 입을 열었다.

“좀 뻔한 말이긴 하지만, 음…… 선배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

“아냐, 난 네가 아는 것처럼 완벽하지 않아. 어머니가 알면 실망하실 거야. 난…… 아직 많이 부족해.”

플로라 선배가 겨우 입을 열자 푸른 눈동자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걸 보며 멀뚱하게 두 눈을 깜빡거리던 내가 입을 열었다.

“당연하죠. 선배는 열여덟 살인데.”

“……!”

플로라 선배가 고개를 들어 나를 살며시 올려다보았다. 벽안이 알 수 없는 기색을 담고 떨리고 있었다.

“우리 나이대에 완벽한 게 이상한 거예요. 그리고 아카데미는 배우러 오는 거잖아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씩 웃었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말들이 너무 오글거려서 그런지 조금 덜 진지해지니 살 것 같았다.

“비밀인데, 사실 전 5년째 가주 수업 안 듣고 있어요.”

“……진짜?”

너무합니다, 선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놀라는 표정이 조금 씁쓸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네, 전 마탑에 들어가는 게 꿈이거든요.”

어느새 우울한 기색을 얼굴에서 지워 버린 플로라 선배가 나직하게 말했다.

“둘 다 하면 되지 않아? 나도 졸업하면 신관 일이랑 가주 일을 병행할 생각인걸.”

“거 봐요. 선배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두 일 같이 하는 거 쉽지 않다고요.”

“아…….”

내 말에 얼굴을 붉힌 채 플로라 선배가 살며시 웃었다.

“고마워.”

“어,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푸흡.”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선배가 청명한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칭찬받는 걸 좋아해.”

앗, 노아 선배도 그렇던데.

나는 두 눈을 흥미롭게 반짝이며 플로라 선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남들한테는 아무리 칭찬받아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는데, 케이트 네 말에 이렇게 기분 좋은 걸 보니 네가 나한테 소중한 사람인가 봐.”

“…….”

나는 아무 말 없이 플로라 선배의 손을 꼭 잡았다.

신문부 이 몹쓸 놈들이, 어떻게 이런 사람을…….

“아, 그리고 이 일로 어머니께서 선배를 책망하신다면 그건 나쁜 부모예요.”

단호하게 그렇게 말해 놓고선 잠시 플로라 선배의 눈치를 살피던 내가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만약에 말이죠. 만약에…….”

“……그런가. 그래도 어머니는 나쁜 분이 아냐.”

아이비 백작이 뭐 어떤 사람이더라?

나는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이 멍청이.

자책하며 입술을 깨물던 내가 입을 열었다.

“여쭤 볼 게 있는데요.”

“응, 말해.”

조금 진정된 듯 차분한 표정의 플로라 선배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물었다.

“혹시 플로라 선배는 노아 선배를 이성적으로…… 좋아하시는 건가요? 음, 가끔 보면 선배 눈빛이 좀…….”

“뭐, 뭐? 아니, 잠깐만. 그럴 리가.”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플로라 선배가 말을 이었다.

“노아는 내가 처음 사귄 친구야. 그래서 조금 각별하긴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냐, 맹세코!”

플로라 선배가 믿어 달라며 고개를 붕붕 내젓자 분홍색 머리카락이 허공에 휘날렸다.

“그렇군요, 믿을게요.”

나는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제 더 생각할 필요 없겠다.

“고마워. 케이트 네가 많은 힘이 됐어. 그렇게 말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아.”

플로라 선배가 편안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아까보다 훨씬 표정이 펴진 것 같았다. 이거 내 덕분 맞지?

나는 은근한 뿌듯함을 느끼며 웃음 지었다.

나도 플로라 선배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줄은 몰랐네. 그만큼 꽁꽁 숨겨 왔다는 거겠지.

새삼 묘한 기분이 들어 입술을 오므리고 있는데, 선배가 태연한 어투로 말했다.

“생각해 보면 난 이렇게 털어 놓을 친구가 없는 거 같아.”

“네? 노아 선배랑 글로리아 선배는요?”

“솔직히 말해서…… 리아는 좋은 친구지만 위로를 받은 적은 없는 것 같아.”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묻자 선배가 말을 이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달까……. 그래서 노아가 내게 많은 의지가 되어 줬었는데, 이제 맘 놓고 기대기는 조금 그렇잖아. 너한테 여러모로 실례고.”

플로라 선배가 거북하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랬구나. 선배는 그런 생각을…….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그럼 저한테도 똑같이 공평하게 기대 주세요.”

“으, 응?”

나는 플로라 선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가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럼 됐죠? 이제 그 정도 사이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한번 씩 웃어 보인 내가 창틀에 앉아 있는 선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조금 괜찮으세요? 선배 점심도 제대로 못 드신 것 같은데, 제가 사 드릴 테니까 우리 매점이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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