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안녕하세요, 선배.”
복도를 지나가던 플로라 선배가 나와 노아 선배를 보더니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미안, 케이트. 내가 먼저 찾아가 봤어야 하는데.”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손을 와락 잡은 그녀가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로 사과했다.
“그리고 나 때문에 너까지…….”
죄책감에 젖은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그녀의 손등에 손을 얹고 괜찮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선배는요?”
“응, 나야 뭐 회복이 빠르기도 하고 원래도 그냥 물에 빠진 거였으니까.”
플로라 선배는 헤헤 웃으며 머쓱하게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다른 것도 괜찮으신 거죠?”
내가 노아 선배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아……. 좀 괜찮아진 것 같아.”
“아닌 것 같은데요.”
무척이나 어색하고 뚝뚝 끊어지는 플로라 선배의 대답에, 나는 의심스레 미간을 좁혔다.
“하, 하.”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주세요. 말씀드렸다시피 전 그 지루한 상담 수업을 한 번도 안 졸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고요.”
그녀의 기분도 풀어 줄 겸 농담을 던지고 인사를 하며 몸을 돌렸다.
“그, 노아.”
“응?”
플로라 선배의 목소리에 노아 선배가 뒤를 돌아보며 눈을 깜빡였다. 나도 같이 몸을 돌렸다.
플로라 선배는 나와 노아 선배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눈썹을 내려뜨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아냐. 둘 다 잘 가.”
“? 알겠어.”
의아한 얼굴로 플로라 선배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노아 선배가 몸을 돌렸다. 나는 선배보다 조금 더 늦게 돌아섰는데, 그사이에 보고 말았다.
플로라 선배는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색 눈동자를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뜨린 채.
아, 또다. 저 씁쓸하고 섭섭하다는 표정은 대체 뭐지?
마음 한구석이 또 욱신거리고 불편해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린 나는 이내 침을 꿀꺽 삼켰다.
“요즘 플로라가 조금 이상하네.”
“그렇죠, 선배도 느끼셨죠?”
노아 선배에게 맞장구를 친 내가 머뭇거리다 말고 입을 열었다.
“그, 선배.”
제가 모르는 선배의 시간 동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결국 삼켜 버렸다.
플로라 선배와 내가 연못에 빠졌던 그날 노아 선배는 오직 나만 보고 있었으니 그녀가 자신을 향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모를 터였다. 음, 어쩌면 내가 예민하게 구는 걸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노아 선배는 플로라 선배랑은 그냥 친구 사이라 했으니까.
나는 두 눈을 접어 무해하게 활짝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들 왜 그래, 실없게.”
웃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노아 선배가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으응.”
선배의 큼직한 손에 얼굴을 부비며 어리광을 피우던 내가 우리가 지나온 곳을 힐끔거렸다.
방금 전의 플로라 선배를 생각하면 내가 과하게 반응하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지만 분쟁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 뭐 인생이 이런 거지. 가끔은 애인의 신경 쓰이는 여자 사람 친구를 모른 척하고 지나가야 할 때도 있고.
게다가 내가 과연 플로라 선배랑 진심으로 싸울 수 있을까, 그 솜사탕 같은 사람이랑? 못할 것 같은데. 한마디 하고 미안해서 펑펑 우는 거 아냐?
“아직도 플로라가 신경 쓰여?”
“아니요, 우울해 보이시길래 조금 걱정이 되어서요.”
“착하네.”
“헤헤.”
배시시 웃는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노아 선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아직도 플로라가 신경 쓰이면, 내가 플로라한테 말해 볼까?”
“어, 어우. 아니에요. 플로라 선배 서운하시겠어요.”
그것보다 뭐라고 말하시게요.
나는 거듭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무엇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멀어지라 마라 명령을 해.
“그래도 혹시 고민 같은 게 있으면 바로 말해 줬으면 좋겠어.”
노아 선배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이었다.
“난…… 네 연인이니까.”
용케도 선배가 귀엽다는 감상보다 다른 생각이 앞섰다.
사실은 선배랑 선배 소꿉친구랑 이어져야 할 운명인데 그걸 제가 비틀어 버렸어요. 그래서인지 플로라 선배가 노아 선배한테 자꾸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네에. 꼭 그럴게요.”
머릿속으로 모든 것을 착착 정리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노아 선배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노아 선배를 사랑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선배의 인간관계는 협소한 편이었다. 글로리아 선배나 플로라 선배를 제외하면 그렇게 친해 보이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고 가만히 보면 거의 늘 혼자였다. 노아 선배 또래의 고위 귀족 남자가 몇 없어서인가.
물론 선배가 따돌림 당한다기보다는 선배가 세상을 따돌리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몇 없는 친구, 그것도 가장 오래된 소꿉친구와 멀어지게 할 수는 없단 말이다. 분명 노아 선배한테도 소중한 사람일 텐데.
그래, 너무 신경 쓰지 말자.
플로라 선배는 헤어진 지 얼마 안 돼서 힘들어 하는 걸 거야. 금방 괜찮아지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결심한 나는 잔뜩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러자 내 머리를 소심하게 만지고 있던 노아 선배가 흠칫 놀라며 손을 뗐다.
“뭐예요.”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카락이 도로 흐트러지자 선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손을 뻗었다.
선배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걸 유독 좋아했다. 복슬복슬해서 귀엽다나 뭐라나.
복슬복슬, 글쎄다. 나는 노아 선배의 곧은 은발이 더 예쁜 것 같은데.
흐음, 하고 침음을 흘리던 내가 은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여름 햇살을 머금은 은발이 내 손 안에서 언뜻 금빛으로 반짝였다.
봐, 이게 훨씬 더 예쁘잖아.
내가 감탄을 흘리든 말든 노아 선배는 연신 내 머리카락만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 *
노아 선배와 헤어진 뒤, 나는 두 손에 책을 든 채 다른 수업에 들어가려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런 내 노란 머리카락은 정갈하게 땋인 채 일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노아 선배의 솜씨였다.
다음에는 내가 노아 선배 머리를 땋아 줘야지. 분명 엄청 단아하고 청순하니 예쁠 거야.
나는 주먹을 꾹 쥔 채 그렇게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다.
교실 근처 복도에서 신문부로 보이는 학생 하나가 신문을 나눠 주고 있었다. 내게도 신문 한 부가 건네졌다.
“뭐야, 이거 돈 내야 하는 거 아냐?”
길 가다가 갑자기 원래도 잘 안 보는 신문을 받게 된 내가 그렇게 물었지만 그 학생은 대답도 하지 않고 지나쳐 가 버렸다.
“……뭐야.”
나는 머쓱함에 신문을 대충 구겨 책들 사이에 껴 두고 교실 문을 열었다.
“……?”
반 아이들의 태반이 내가 받은 것과 똑같은 신문을 든 채 그걸 읽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교실이 더 시끄러운 것이, 무슨 일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야, 너…….”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 있는 내 어깨를 잡은 도라가 머뭇거리다 말고 입을 열었다.
“너 그거…… 봤어?”
그렇게 묻는 그녀는 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이었다.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이것 좀 봐.”
무슨 일인가, 하고 도라가 건넨 신문을 받아들어 그 면을 천천히 읽어 내려간 내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이게 뭐야.”
오늘 자의 신문에는 어제 플로라 선배가 실연의 상처로 후원 연못에 투신을 했다는, 그런 어이없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신문을 와작 구겼다.
“이 XX가 잉크병 대신 대가리에 깃펜을 꽂았나!”
어떤 놈이야, 누가 이딴 기사를 썼어?!
내가 내뱉은 험한 말에 반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었다.
이거 이래도 되는 거 맞아? 신문부 미친 거 아니야?
신문부의 상식 수준에 대한 의문 다음으로 든 생각은 플로라 선배에 대한 걱정이었다.
“미쳤나 봐, 이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냐?”
광분해 마구 비명을 지르는 내게, 머뭇거리던 도라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야, 이거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나도 같이 빠졌는데. 이끼 때문이었다고, 이끼! 넌 이딴 걸 믿어?!”
나는 꽥 소리를 지르며 발광을 했다. 도라는 조용히 하라며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아, 알았어. 알았어. 진정해.”
“미쳤어, 진짜. 이딴 걸 기사랍시고 내는 거야?”
신문을 옆 책상에 패대기치듯 내려놓고서, 나는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교실을 나섰다. 뒤에서 도라가 어딜 가느냐고 물어 왔지만 무시했다.
나는 거칠게 교실 문을 닫고는 복도에서 신문을 나눠 주고 있는 학생에게 다가가 신문 무더기를 낚아챘다.
“이런 거 함부로 써서 내도 되는 거야?”
내 날카로운 질문에 신문을 나눠 주던 남학생은 잠시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당당한 얼굴로 내 손에서 신문을 도로 빼앗아 갔다.
“신문부장이 허락했는데 네가 뭐 어쩔 거야.”
“……뭐?”
요즘 신문이 잘 안 팔려서 신문부 실적이 안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미쳤어, 미친 거야.
나는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
복도에 보이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신문 한 부씩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큰일이다.
* * *
노아 선배에게 홀딱 반해서 독서토론부에 입부하려던 1학년, 내가 플로라 선배를 처음 봤을 때.
“안녕? 독서 토론부 입부 신청하려고? 내가 부장이야, 나한테 주면 돼!”
뭐 저렇게 생긴 사람이 있나 싶었다.
뭐야, 인간 장미꽃이야? 세상의 온갖 청순함을 끌어 모아 태어난 것 같은데.
이미 노아 선배를 한번 봐서 나름의 훈련이 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혼이 팔린 채 입부 신청서를 주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을 거다.
마침 그때 열린 창문으로 분홍색 꽃잎이 날아 들어와 내 머리에 내려앉았다.
“아, 머리에 붙었다.”
그리고 플로라 선배가 내 머리에서 떼어 낸 꽃잎을 한 손에 들고 그렇게 웃는데.
그때였던가, 이 동아리에 뼈를 묻어야겠다고 생각한 게. 지정 도서를 살펴보자마자 그 결심이 흔들리긴 했지만.
하여튼 그때, 노아 선배한테랑은 좀 다른 의미로 반했던 것 같다.
연심은 당연히 아니었고, 동경이었다.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엄청난 사람이었으니까. 공부도 잘하는데 성격도 좋고 친구도 많고.
그러니까 단순히 동아리 부장을 넘어 존경하고 닮고 싶은 선배 정도 되겠다.
고위 귀족이라는 것이 믿기 어려운 정도로 무른 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걸 빼면 얄미울 정도로 완벽한 플로라 선배는 나를 포함한 아카데미의 모든 여학생들의 워너비였다.
유명한 사람이면 추문이나 험담 같은 게 늘 따르기 마련인데 플로라 선배는 그런 것마저 없었다. 인성부터 성적까지 깔 구석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나도 가끔씩 노아 선배와 가까운 플로라 선배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면서도 그녀에게 나쁜 감정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마주칠 때마다 밝게 지어 주는 미소, 가끔씩 웃으며 건네주는 사탕. 플로라 선배의 그 친절함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이번 일을 보아하니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플로라 선배는 대체로 밝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나는 분명 플로라 선배라면 이번에도 금방 회복할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