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10)

바람결에 분홍색 머리카락이 작게 휘날렸다. 숨을 죽이고 걸음을 옮기자, 아주 익숙한 누군가가 연못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놀란 내가 풀을 밟아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자, 눈물로 번들거리는 하얀 얼굴이 나를 향했다.

나는 당황으로 입을 가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 우셨어요?”

잔디 위에 쪼그려 앉아 있던 플로라 선배가 나 못지않게 놀라며 황급히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여,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나는 천천히 다리를 굽혀 선배 옆에 쪼그려 앉았다. 플로라 선배가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습게 보이겠지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거든.”

그녀는 내게 우는 모습을 보인 게 무척 부끄러운 것 같았다. 하긴 나라도 의연한 척해 놓고 후배 앞에서 울었다면 그랬을 거다.

“방에 가도 룸메이트가 있고, 수업 중에도 애들이 자꾸 말을 걸어서.”

“저런, 민폐네요.”

어쩌지, 지금이라도 혼자 있을 수 있게 해 줄까?

갈까 말까 고민하며 버벅거리는 동작으로 다리를 연신 구부렸다 펴고 있는데, 플로라 선배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건 많이 겪어 봤는데도 항상 힘드네.”

울어서 그런가, 평소보다 목소리가 훨씬 더 낮고 허스키했다.

나는 머뭇대다 말고 손을 들어 소심한 동작으로 플로라 선배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래도 이대로 가 버리면 신경 쓰여서 못 견딜 것 같았다.

“저는 선배가 이별을 여러 번 겪었다고 해서 이번 일이 덜 슬플 거라고 생각 안 해요.”

“……정말?”

내 말에 플로라 선배가 움직임을 뚝 그쳤다.

플로라 선배는 이성과의 교제가 활발한 편이었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내가 본 것만 해도 다섯? 여섯? 그쯤 될 것이다.

하지만 원래 다들 아카데미 와서 연애 몇 번씩은 해 보는 거 아닌가? 그게 뭐 나쁜 것도 아니고, 오히려 플로라 선배 정도로 잘난 사람이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당연하죠. 그 사람이랑 있을 때 선배가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봤는걸요.”

내가 노아 선배와 엄청 행복하게 연애 중이라서 그런지, 내 이야기가 아닌데도 괜히 몰입이 되는 것 같았다. 서로 좋아하던 연인과 헤어지게 된다면 얼마나 슬플지 가늠도 안 갔다.

불과 몇 주 전쯤만 해도 사이좋던 두 사람의 관계에 그새 금이 가다니, 인간관계라는 게 참 오묘하네.

생각에 취해 눈을 살며시 감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플로라 선배가 중얼거렸다.

“네가 말하니까 진심처럼 들리네. 하긴 너도 연애 중이니까…….”

밝고 높던 목소리가 거칠고 낮아져 있었다.

“왜 내 연애는 다 이렇게 끝나는지 모르겠어.”

지친 얼굴로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선배가 낮게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끝에 가면 다들 나한테 질리더라고. 내가 너무 집착하는 것 같다거나,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대.”

플로라 선배가 교복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신음하듯 말을 맺었다.

“정말 내가 문제인 거야?”

“그럴 리가 있나요. 그냥 안 맞았거나 상대가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었나 보죠.”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하고 있자니 기분이 조금 묘했다.

그 책에 따르면 지금쯤 플로라 선배와 노아 선배는 달콤한 기류에 둘러싸여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노아 선배는 내 옆에 있고, 절망하며 괴로워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 책의 여주인공인 플로라 선배다.

연신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는 플로라 선배는 보며,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혹시 내가 노아 선배와 이어졌어야 할 그녀의 운명을 가로채 버려서, 선배가 저렇게 힘든 건가?

심장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쿡쿡 아팠다. 꼭 도둑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우울하게 생각을 곱씹던 나는 작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난 도둑이라고 불릴 만큼 나쁜 짓을 하지 않았어. 플로라 선배라면 이것도 금방 이겨 낼 수 있을 거야.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모든 남자들이 다 노아 같았으면 좋았을걸.”

“…….”

내가 얼음처럼 굳자, 무심코 중얼거린 플로라 선배가 몸을 흠칫 떨며 변명했다.

“아, 미안. 그런 뜻은 아니었어.”

“네…….”

한순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흐르는 정적에 어색하게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던 내가 어색하게 손을 들어 매점 쪽을 가리켰다.

“음, 뭐 단 거라도 사다 드릴까요, 기분 전환하게?”

“응? 아냐. 내가 손이 없니 발이 없니.”

괜찮다며 힘없이 웃어 보인 플로라 선배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여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신기하다, 네 앞에서는 뭐든 다 술술 말하게 되는 것 같네.”

나는 그에 대고 농담을 던졌다.

“1학년 때 상담 수업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아, 나 그 선생님 알아. 나이 든 여자 선생님이지?”

“선배도 들으셨어요? 맞아요, 그 선생님 말투가 엄청 졸렸죠.”

작게 키득거린 선배는 조금은 나아진 것 같은 얼굴로 작게 머리를 털었다.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웠어, 케이트. 난 이제 가 볼…….”

오래 쭈그려 앉아 있다 보니 다리가 저린지, 몸을 일으킨 플로라 선배가 비틀거렸다. 그리고 하필 그녀가 서 있던 돌 위에는 이끼가 가득 껴 있었다.

“선배, 이끼, 이끼!”

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플로라 선배를 붙들었다. 그녀는 많이 놀랐는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딱 굳어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재수 없게도 내가 밟은 곳도 이끼 천지였다.

“!”

신발이 이끼가 낀 돌 위에서 미끄러졌다. 잔뜩 굳은 플로라 선배의 무게까지 지탱하느라 휘청거리던 몸이 결국 연못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풍덩.

마법을 쓸 새도 없이 플로라 선배와 나는 그대로 물속으로 빠져 버렸다.

물방울 몇 개가 얼굴에 튀더니 이내 온몸이 물에 잠겼다. 내 입에서 빠져나온 공기 방울이 뽀글뽀글 수면 위로 올라가는 것과 반대로 나와 플로라 선배는 점점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물에 젖은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 괴담이 진짜였단 말인가. 귀신이 진짜 있다고? 와,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이래서는 플로라 선배까지 데리고 올라갈 수 없을 거야.

조금만 생각해 보았어도 선배의 손을 놓고 먼저 헤엄쳐 나온 후 마법을 써서 그녀를 건져 올리던가 하면 되는 일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짧은 사이 절망까지 느끼고 있었다.

어느새 연못 바닥의 미끈미끈한 이끼가 만져졌다. 뾰족하게 솟은 돌에 손바닥이 긁혀 피가 났다.

나는 손바닥에 느껴지는 따가움에 인상을 썼다.

온갖 먼지와 찌꺼기, 물고기의 분비물이 물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눈을 게슴츠레 뜬 탓에 그마저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물속을 헤엄치던 금붕어가 내 팔을 훑고 지나갔다. 수면을 뚫고 들어와 일렁이는 햇빛에 금붕어의 비늘이 번뜩거렸다.

“……!”

팔에 소름이 돋아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입으로 물이 조금 밀려들어 왔다.

아 참, 플로라 선배.

잘 움직여지지 않는 고개를 돌린 나는 물속에서 일렁이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눈으로 좇으려고 노력했지만, 눈을 제대로 뜨고 있기가 너무 어려웠다.

내 손은 여전히 플로라 선배의 손을 잡고 있었으므로 나는 어떻게든 그녀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경직된 채 꼭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은 또렷했으나 그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몸부림치거나 수영을 해 볼 생각도 못 하고 있는데, 곧이어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손이 내 허리를 감쌌다.

“헉……!”

숨이 쉬어진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나는 이 사람이 누군지 보려 고개를 돌렸다.

긴 은색 머리카락. 보이는 것은 그것뿐이었지만 충분했다.

수심이 얕지 않은데도 나를 안아 올린 노아 선배는 연못 안에 서 있었다. 나를 담은 금색 눈동자가 걱정으로 파르르 떨렸다.

“괜찮아?”

아니, 어디 있었길래 이렇게 빨리 와서 건졌어요?

그렇게 말하려고 하는데, 입 안에 물이 차 있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푸헵, 켁, 웩, 우웩, 엑.”

노아 선배는 나를 안은 채 뭍으로 올라갔고, 마침내 땅으로 거두어진 나는 연신 구역질을 하며 물을 뱉어 냈다. 코끝에 역겨운 물비린내가 감돌았다.

“우웨에에엑.”

나는 마지막으로 헛구역질을 하며 젖은 머리카락을 털었다. 노아 선배가 뒤에서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어느새 주위에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찌어찌 물을 다 뱉어 내고 정신을 차린 내가 젖은 교복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정신이 혼미했다.

플로라 선배랑 같이 물에 빠졌고, 헤엄치려고 했지만 가라앉았다. 금붕어가 내 종아리에 뽀뽀하던 감각이 아직도 선연했다.

악, 더러워!

그 감촉을 떠올린 나는 인상을 쓰고 몸부림쳤다.

“괜찮아?”

제 겉옷을 벗어 내게 걸쳐 준 노아 선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네, 네에…… 웨엑.”

나는 기진맥진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끈미끈한 연못물이 교복을 적시고 있어서 무척이나 불쾌했다.

아, 맞다. 플로라 선배!

머리카락에 붙은 이끼와 풀을 떼어 내던 내가 황급히 그녀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물에 젖어 색이 짙어진 노란색 머리카락이 물기를 뿌렸다.

“……!”

플로라 선배는 파리한 안색을 하고서 근처 풀밭에 앉아 있었다. 물방울이 축축하게 젖은 분홍색 머리카락을 타고 바닥으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푹 젖어 있는 걸 보니 나보다 더 늦게 구해진 모양이었다. 누가 구했는지는 몰라도.

새하얗게 질린 입술이 살짝 벌려진 채 가쁜 숨을 내뱉었다. 괜스레 나까지 숨이 막혔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을 띠고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내 등을 두드리는 노아 선배를 말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양호실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는 내게 도라가 노트를 내밀었다. 아마 내가 옷을 갈아입고 젖은 몸을 말리고, 양호실에서 쉬느라 빠진 수업의 필기가 적혀 있을 것이다.

“아, 고마워.”

나는 노트를 받아 들며 양호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나를 힐끔거리던 도라가 슬쩍 물어 왔다.

“야, 너 괜찮아?”

“응, 완전.”

내가 덤덤하게 대답하자 도라는 조금 안심한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이었다면 감기에 걸렸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늦여름이었다.

“하긴 멀쩡해 보이긴 하네. 그냥 수업 들어오지 그랬어.”

“나도 옷만 갈아입고 중간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노아 선배가 제발 조금만 쉬라고 사정을 해서.”

하여간 걱정도 심해.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감싸고 몸을 배배 꼬았다.

“어우, 눈에서 꿀 뚝뚝 떨어지는 거 봐. 양봉해도 되겠다.”

눈꼴시다는 듯 일그러진 미소를 지은 도라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어쩌다 빠졌는데?”

“아니, 그냥 플로라 선배랑 같이 있다가 이끼 밟고 미끄러진 거야.”

실제로도 별것 아닌 바보 같은 실수였기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도라가 동정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 인생도 참 다사다난하다. 1학년 때는 성적 보려다 계단에서 구르지 않았어?”

“으……. 그래도 이번에는 그때만큼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뭐.”

생각해 보면 그때도 이맘때쯤이었네. 저주인가?

창피한 기억에 몸서리를 치던 내가 잠시 숨을 멈추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양호실로 옮겨지고 젖은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플로라 선배의 눈빛은 뇌리에 남았다.

네가 어떻게 나보다 그 애를 먼저 구해?

오롯이 노아 선배를 향해 있던 그 연하늘색 눈이 위태롭게 떨리며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고 하면, 너무 과대 해석인가.

“흐음.”

별거 아니겠지, 뭐. 내가 플로라 선배를 생각보다 더 많이 의식하고 있던 모양이다. 정작 둘은 그냥 친구 사이인데도. 부끄러워라.

“뭐 하고 있어. 다음 수업도 빠지려고?”

턱을 쥔 채 고민하던 내 어깨를 도라가 툭툭 쳤다.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 가.”

나는 서둘러 책을 챙기고는 양호실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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