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려 줄 수 있을까?”
노아 선배가 내 머리카락을 다정히 매만지며 물었다.
“이건 그냥 제 문제예요.”
줄곧 침묵하던 나는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냥, 그냥…… 선배는 저에 비해 너무 대단하잖아요. 가문도, 성적도, 외모도, 재능도.”
나는 말끝을 흐리며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그래서 가끔 제가 너무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주제에 선배랑…….”
우리 집안은 아이비 백작가처럼 오랜 교류가 있었던 것도, 루피너스 후작가처럼 엄청난 명문가도 아니다. 게다가 나는 다른 두 선배들처럼 특별히 예쁘거나 잘나지도 않았다.
특별히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선배가 너무 대단한 사람이다 보니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플로라 선배가 이별을 한 뒤로 더 잦아졌고.
나 혼자서 좋아할 때보다 지금이 오히려 더 불안한 것 같았다.
“죄송해요, 안 그러려고 노력하는데 자꾸 자신감이 떨어지네요.”
“글쎄, 난 너보다는 내가 운이 더 좋았다고 생각해.”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자 노아 선배는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네가 날 좋아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좋아해 줘서 고맙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어쩐지 숨이 막히는 것 같아 고개를 들어 선배를 올려다보자, 선배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내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랑 널 비교하지 마.”
나는 가만히 선배에 품에 파고들었다.
선배는 착한 사람이다, 정말로. 새삼 다시 반한 것 같았다.
“플로라가 헤어진 것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거야?”
노아 선배가 귀엽다는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매만지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놀리지 마세요. 전 정말 진지했다고요.”
그러면서도 탄탄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선배의 심장이 일정한 속도로 뛰는 것이 느껴졌다.
편하다.
여차하면 글로리아 선배를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생각해 보면, 앞으로 우리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런 걸 하나하나 따져 가며 살면 끝이 없었다.
다른 것들이 다 무슨 상관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데.
나를 비추는 황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무엇보다 노아 선배는 나를 좋아하니까.
그래, 그건 누가 뭐래도 확실한 사실이다.
나는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 * *
내가 아직도 플로라 선배를 의식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동아리 교실에 들어가기가 조금 망설여졌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던 플로라 선배가 내가 들어오자마자 인사를 했다.
“저…… 이제 조금 괜찮으세요?”
잠시 그녀의 눈치를 보던 내가 물었다.
“어, 그럼. 안 괜찮을 이유가 어디 있어.”
플로라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는데, 눈가가 살짝 일그러져서 정말 괜찮은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
평소라면 책을 읽어 왔냐며 무어라 말을 주고받았을 텐데, 오늘은 교실 안이 유난히 조용했다.
어색하고 머쓱해서 헛기침을 하며 괜히 읽지도 않는 책을 펼쳤다.
“크흠.”
다행히 몇 분 후 글로리아 선배와 노아 선배가 차례로 들어왔다.
“자, 여기.”
매점에 들렸다 온 건지 노아 선배가 간식 몇 개를 나와 플로라 선배에게 나눠 주었다. 그리곤 글로리아 선배에게는 싸늘한 투로 말했다.
“네 건 없어.”
“아니, 이놈이!”
글로리아 선배가 울컥 소리를 내지르며 두꺼운 책을 들어 올렸다.
“이런 차별이 어디 있어. 나도 초콜릿, 나도 초콜릿 내놔!”
나는 징징거리며 노아 선배에게 매달리는 그녀에게 내 몫 간식의 반절을 내밀었다.
“제 거 나눠 먹어요, 선배.”
“오, 역시 케이트밖에 없어. 너 그렇게 살지 마라, 나쁜 놈아.”
글로리아 선배가 낮게 으르렁거리는데도 노아 선배는 태연하게 제 몫을 내게 건넸다.
“잘 먹을게. 고마워, 노아.”
간식을 받아든 플로라 선배가 다소 침울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오늘 기분은 좀 어때?”
“그래, 좀 괜찮아?”
노아 선배에 글로리아 선배가 동조하자, 플로라 선배는 금방 활짝 웃어 보였다. 어떻게 사람 표정이 그렇게 빨리 바뀔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응, 나 완전.”
“그래요? 다행이네요.”
슬쩍 말을 보탠 나는 초콜릿을 녹여 먹으며 플로라 선배와 노아 선배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 딸기 맛 싫은데 바꿔 주라.”
“응.”
플로라 선배의 사탕을 받은 노아 선배가 자기 사탕으로 바꿔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보며 표정을 관리하려 노력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노아 선배가 이렇게 살갑게 대하는 여자 사람은 나랑 플로라 선배밖에 없네? 글로리아 선배랑은 좀 투닥거리는 편이고.
그런 생각을 하며 미간을 좁히다 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저 둘은 친구야, 친구. 이상하게 착각해서 질투하지 말자. 추하다, 케이트. 글로리아 선배도 안부를 물었잖아. 유난이야, 정말.
나는 양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뺨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는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그래도 내 생각보다 둘의 사이가 가까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같은 소꿉친구인 글로리아 선배는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책의 영향이 큰가 싶기도 했다.
무슨 일 있어?
내 침울한 표정을 본 노아 선배가 입을 뻐끔거리며 물었다.
괜찮아요.
선배의 입 모양을 본 내가 여상히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 * *
유난히 길게 느껴지던 동아리가 끝나고,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잠시 쉬고 또 금방 수업을 들으러 가야 했기에, 나는 무거운 몸을 침대에 뉘였다가 눈이 감기기 전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하암.”
요즘 잠이 조금 부족했나, 눈꺼풀이 무겁네.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하품을 쩍쩍 하던 내가 벽과 책상 사이에 떨어져 있는 붉은색 책을 주워 들었다.
꽤 험하게 다뤘는데도 책은 흠집이나 찢어진 자국 하나 없이 멀쩡했다.
나는 책을 펴 찬찬히 그걸 훑어보았다. 당연하게도 내용에는 변함이 없었고, 그럴 거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허탈해졌다.
“에잇.”
꺼림칙하게.
나는 다시 책을 구석으로 던져 넣곤 책을 들었던 손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절대 책에 먼지가 가득 묻어 있어서는 아니었다.
책을 눈앞에서 치워 버린 나는 꾸역꾸역 교과서를 챙겨 방을 나섰다.
아, 힘들어. 수업은 너무 긴데 점심시간은 너무 짧아…….
교실까지의 거리는 제법 있었지만 고뇌할 거리가 있었기에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봐, 지금까지 투덜거리기만 했는데도 벌써 복도를 반이나 지났네.
대체 소꿉친구란 뭘까. 정말 이성으로 보기 어려운 걸까.
나는 인상을 쓰며 복도를 걷다 말고 깨달음에 표정을 풀었다.
아, 멀리 갈 것도 없네. 소꿉친구라면 나도 있으니까. 더군다나 노아 선배가 자기 입으로 나랑 걔 관계 같다고도 했잖아.
아르한.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이 거의 평생인 아르한을 내가, 아르한이 나를 이성으로 볼 수 있을까? 잘 생각해 보자.
잠깐 아르한과 사귀는 나를 상상해 봤다가 곧장 머릿속에서 지웠다.
음, 답 나왔네. 걱정할 것 없겠다.
안심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린 나는 만족스럽게 복도를 걸어갔다.
우린 친구를 넘어서 가족 그 자체였다. 부모님들끼리도 아는 사이이고. 요즘은 애가 옛날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긴 하지만 열네 살까지는 정말 담백한 친구 관계였다고.
그러고 보니까 요즘은 허구한 날 노아 선배랑 있느라고 아르한을 못 봤네. 어디서 뭐 하고 있을까. 잘 지내겠지? 조만간 찾아가 봐야지.
여차하면 지금 1학년 층으로 가 볼까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계단 앞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플로라 선배를 보았다.
인사를 건넬까 하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관뒀다. 들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걸 것이, 플로라 선배는 정말로 친구가 많았다. 아마 복도에서 마주치는 친구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다 보면 수업에 늦을 것이다. 사람이 착하고 사교적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너 헤어졌다며. 괜찮아?”
오…… 저런.
인파 속에서 들린 한마디에 나는 미미하게 눈썹을 꿈틀거리며 코를 긁었다.
플로라 선배 정도로 유명하고 인기가 많으면 헤어졌다는 소식이 며칠 만에 다 퍼지는구나. 으음,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요란하게 이별했으니 당연한 건가?
뭐가 어찌 됐든 피곤하겠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 정작 사람들을 상대하며 웃고 있는 플로라 선배는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그래, 괜찮은 거겠지.
속으로 안심한 나는 작게 숨을 내쉬며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오늘은 유난히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수업이 많네. 그것도 나 혼자 외롭게.
나는 후관 복도를 지나며 속으로 신경질을 냈다.
수업 시간표를 고려해 보면, 수학 수업을 들으러 후원을 지날 때는 꼭 나 혼자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무슨 일이 하나씩 생기곤 했다. 오늘도 뭐 있나?
속으로 우스갯소리를 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어디선가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
거짓말 안 하고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정말 또렷하고 확실하게 들렸다. 누군가가 흐느끼듯 울고 있었다. 고양이 울음소리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 고양이는 어느새 내게 다가와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의아함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연못가에서 그 소리가 다시 들렸다. 흐으윽, 하고.
귀, 귀신인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그 괴담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아닐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괜히 침을 꼴깍 삼키며 연못가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