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10)

어라?

“……들었어요?”

방금 플로라 선배 목소리 같았는데.

내가 돌아보며 묻자 노아 선배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키가 작은 여자분 뒤로 다가가 까치발을 하고 인파 너머를 내다보았다.

“내가 지금 왜 이러는지 몰라서 그래? 너 자꾸 왜 그러는데.”

다투고 있는 남녀 중 여자는 역시 플로라 선배가 맞았다.

아니, 둘이 화해한 거 아니었나?

의아한 얼굴로 서 있는데 플로라 선배가 매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 생각 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플로라 선배가 그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남학생의 손목을 잡은 그녀가 그를 돌려세웠다.

그에 입을 뻐끔거리며 뜸을 들이던 남학생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헤어지자.”

하늘색 눈동자가 부릅뜨였다.

“……뭐?”

플로라 선배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자 남학생은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넌 나한테 바라는 게 너무 많더라. 솔직히 조금 힘들어.”

“데이트 장소 정할 때 조금 적극적으로 해 달라는 게 너무 많은 걸 바란 거야?”

기가 차다는 듯한 물음에도 남학생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 널 좋아하지 않아.”

선배의 푸른 눈동자가 상처받은 듯 거세게 흔들렸다.

남학생이 몸을 돌려 떠나갈 때까지 플로라 선배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의도치 않게 그 대화를 전부 들어 버린 노아 선배와 나 역시도.

* * *

그날 플로라 선배는 붙잡을 새도 없이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그런 상황에서 아는 척하는 것도 조금 아닌 것 같아 나와 노아 선배는 그대로 기숙사로 돌아왔다.

“야, 그 새끼 어디 있는지 말해! 내가 당장 그 새끼 목을……!”

목검을 휘두르며 으름장을 놓던 글로리아 선배가 플로라 선배의 표정을 보더니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너무 슬퍼하지 마. 세상의 절반이 남잔데 그 새…… 놈보다 좋은 사람이 없겠어?”

글로리아 선배가 위로를 건네는 동안 노아 선배는 조용히 플로라 선배에게 겉옷을 덮어 주었다.

나도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리며 말을 보탰다.

“맞아요. 어휴, 그 새…… 선배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한대요.”

지금까지 실연한 선배를 위로해 준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무너진 선배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정말 많이 좋아했었나 보다.

동아리 교실 의자에 앉은 플로라 선배가 텅 빈 푸른 눈을 하고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했어?”

“…….”

“또, 또 내 잘못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광분해 목검을 휘두르려는 글로리아 선배를 내가 막았다.

마음은 알지만 플로라 선배 전 남자 친구의 모가지를 따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요.

플로라 선배는 잠시 말없이 앉아 있다가 교실을 나섰다.

“추태 부려서 미안. 이만 가 볼게.”

“잠깐, 플로라. 같이 가.”

글로리아 선배는 나와 노아 선배에게 눈짓을 한 뒤 플로라 선배를 따라 나섰다.

“걱정이네.”

“그러……게요.”

안타까운 얼굴로 교실 문을 바라보는 노아 선배의 얼굴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당연했다. 내가 무엇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지 알 리가 없었으니.

플로라 선배가 있었던 의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요 며칠간 완전히 잊고 있던 붉은색 책이 떠올라, 나는 불안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니겠지?

“!”

불현듯 든 생각에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굳혔다.

플로라 선배가 헤어져서 저렇게 속상해하고 있는데, 나는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어쩜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본능적으로 플로라 선배를 경계하고 있는 내 자신이 환멸스러웠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머리를 빗던 빗을 집어던진 나는 살짝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노아 선배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안녕. 아무도 없어?”

“네, 도라는 동아리 갔어요.”

도라는 여기서 이상한 짓을 하면 오늘 밤은 에코랑 맬러리네 방에서 잘 거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곤 동아리 활동을 하러 갔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 단둘만 있다.

방문을 닫고 돌아선 나는 30분에 걸쳐 정돈한 방의 모습을 보며 코를 쓱 닦았다.

“앉으세요.”

나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도라의 책상 의자를 끌고 왔다.

남의 방이라 몸을 사리는 건지, 의자에 앉은 움직임이 조심스러웠다. 선배가 앉는 걸 본 나도 내 의자에 앉았다.

“먼지가 묻었어.”

“어, 정리하다 붙었나 봐요. 떼 주세요!”

내가 헤실헤실 웃으며 머리를 들이밀자 손가락으로 먼지를 털어 낸 선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다정한 손길에 눈을 감았다.

선배가 홀린 듯이 내 머리카락을 만지다 말고 말했다.

“폭신폭신해.”

“엥, 그럴 리가. 머리 엄청 많이 빗었는데요.”

나는 방금까지도 머리를 빗었던 것을 떠올리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곱슬이라서 그럴 거예요.”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관리하기도 힘들고 자꾸만 엉키는 곱슬머리는 속눈썹 길이를 비롯해 내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귀엽다.”

“아하. 선배가 더요.”

“네가 더.”

“선배가 더.”

직감이 왔다. 누구 하나가 먼저 그만두지 않으면 이 유치한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진지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노아 선배와 마주 보고 있는데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우리는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노아 선배가 청명하게 웃으며 두 눈을 깜빡거리자 은백색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였다.

와우.

“……혹시 속눈썹 길이 한번만 재 봐도 돼요?”

내가 저돌적으로 묻자 선배는 순순히 눈을 감아 주었다.

책상에서 자를 가져와 하얀 속눈썹의 길이를 재 본 나는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와.”

길다. 길어. 그것도 엄청.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객관적인 자료가 있으니 새삼 와 닿았다.

속눈썹 길이에 감탄하고 있는데 선배가 눈을 껌뻑거렸다. 그 모습이 순간 기죽을 정도로 예뻐서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내가 가만히 선배의 목에 팔을 두르자 선배는 나를 마주 안았고, 나는 너른 품에 폭 안겼다.

방 안은 시계 초침 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끼며 따뜻한 품에 안겨 편안히 있다 보니 문득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곤조곤한 투로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선배, 우리가 헤어지면 어떨 것 같아요?”

맞닿은 몸이 흠칫 굳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너는 네 방에 불러 놓고서 하는 말이 그거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본 노아 선배가 상처받은 얼굴로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분홍색 입술이 움찔거리더니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를 토해 냈다.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미안해요, 미안.”

화들짝 놀란 나는 서둘러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거의 울먹이는 선배를 품 안에 가두고 다독였다.

“헤어질 생각 없어요. 결혼까지 갈까 해요. 안 헤어진다니까.”

“……응.”

노아 선배가 조금 진정한 듯하자 나는 은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선배, 선배는 제가 왜 좋아요?”

“글쎄, 하나로 말하긴 조금.”

선배가 어렵다는 듯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대답했다.

“그냥 이유 없이 좋아.”

달콤한 말이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한 나는 거기다 대고 농담을 던졌다.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으면 사랑이라던데.”

“응, 사랑인가 봐.”

어우, 훅 들어오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머리카락을 배배 꼬던 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실 저는 예전부터 선배가 플로라 선배랑 특별한 사이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 말을 들은 노아 선배가 차분한 투로 대답했다. 자꾸 이상한 말만 해 대서 짜증 날 법도 한데 나를 안은 손길과 목소리는 다정하기만 했다.

“글쎄, 여기서 플로라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잘 모르겠어.”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줄곧 옆에 있었는데, 제가 눈에 찰 거라는 생각이 안 들어서요.”

나는 노아 선배의 품에 안긴 채 변명하듯 웅얼거렸다.

“선배들은…… 많이 친하잖아요. 저보다 훨씬 오랫동안 알았고요.”

“우린 아는 동생이라는 그 친구랑 너 같은 관계야.”

노아 선배가 다정한 손길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달콤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우린 친구고 서로 얼굴 못 볼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 애초에 그런 마음도 전혀 없고.”

그렇게 말한 선배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너도 그 동생이랑 사귈 생각은 없지?”

“당연하죠.”

내가 즉각 대답하자 선배는 어쩐지 기분 좋은 얼굴로 덧붙였다.

“그런 거야.”

내 허리를 붙잡고 끌어당긴 선배가 애끓는 표정으로 속삭였다.

“그리고 나는 네가 제일 좋아.”

“…….”

“좋아해.”

그리고 황금색 눈에 비친 나는 최고로 얼간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잘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달싹여 물었다.

“……플로라 선배보다도?”

조금 유치하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뇌리를 스치기도 전에 나와 버린 질문이었으니까.

“응.”

노아 선배가 내 눈가에 입을 맞추곤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맞잡은 손에 깍지를 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글로리아 선배가 말해 준 게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또 예언서 내용대로 흘러갈지도 모르고, 언젠가 사이가 틀어질지도 모르고. 나는 선배와 운명으로 얽힌 플로라 선배가 아니므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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