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10)

“겨우 플로라 달래서 보내 놨더니 넌 또 표정이 왜 그러니?”

내가 몇 분째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자 글로리아 선배가 매점에서 사온 음료수를 건네며 물었다.

나는 차가운 음료수 병에 여름 더위에 달아오른 뺨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그, 플로라 선배가 남자 친구랑 싸웠다니 안타깝기도 하고 조금 불안하네요.”

“불안해? 왜? 노아스 때문에? 상식적으로 애인이랑 깨졌다고 해서 10년 본 소꿉친구한테 연애 감정 가지는 사람은 없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은 글로리아 선배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보다 요즘 너 나한테 너무 소홀한 거 아냐? 매일 노아스랑만 있고.”

“켁. 뭐예요, 삐치셨어요?”

음료수를 마시다 사레가 들린 내가 조심스레 묻자 선배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애인 생기더니 나는 보러 오지도 않고.”

“뭐예요, 질투하세요?”

내가 웃음을 참으며 묻자, 선배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쉽게도 나는 남자가 좋아. 그래도 뭐, 케이트 너라면.”

“제 쪽에서 거절할게요.”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듯 어깨를 두 손으로 어깨를 감쌌다. 그러자 선배가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야. 아니, 너 그거 한심하다는 눈빛이니?”

“그럴 리가요.”

“제대로 말해. 나 노아스 때문에 눈빛만 보고 무슨 뜻인지 다 알아들을 수 있어.”

“노아 선배요? 노아 선배는 왜요?”

내가 아까와는 사뭇 다르게 저돌적으로 물어 오자 글로리아 선배가 황급히 해명했다.

“아니, 걔가 어릴 적부터 말을 잘 안 하는 데다 나랑은 말 섞기도 싫어해서. 자연스럽게 눈빛만으로 무슨 소릴 하고 싶어하는지 알게 됐어.”

눈빛만으로도 아는 사이……. 뭔가 애틋한 것 같은데. 마음에 안 들어.

내 떫은 표정을 본 글로리아 선배가 구슬프게 소리쳤다.

“뭐야, 애가 완전 변했어! 노아스 이 자식이 우리 애 다 버렸다.”

“저는 원래 이랬는데요. 그리고 우리 선배 욕하지 마세요.”

“아, 몰라! 나 빼고 다 커플이지. 외롭다, 외로워. 솔로가 최고라니까.”

“글쎄요, 전 요즘 너무 행복한데.”

나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연신 웃음을 흘렸다. 그걸 뭔가 아니꼽게 바라보던 글로리아 선배가 입을 열었다.

“야, 그런데 연애는 밀고 당기기가 제일 중요하다, 응? 이 완급 조절, 어?”

“밀고…… 당기기.”

글쎄. 선배가 밀면 난 울 것 같고, 선배가 당기면 속절없이 끌려갈 텐데.

작게 침음을 흘리던 내가 뱁새눈을 뜨고 글로리아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선배 연애 경험 없으시다면서요.”

“내 모솔 여부랑 상관없이 그건 당연한 거지, 인마! 너 연애 처음이야?”

“아니, 처음은 아닌데요.”

내 대답에 글로리아 선배가 입을 크게 벌리더니 후다닥 내 옆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누군데, 누군데?!”

“아카데미 합격도 못 한 골 빈 놈이라 여기 없어요.”

나는 당장이라도 내 전 남자 친구를 찾아낼 것 같은 기세의 선배를 진정시키곤 말을 이었다.

“15살 때 다과회에서 만났는데 그땐 걔가 잘생겨…… 보였나 봐요. 어휴, 왜 그랬지.”

노아 선배를 만난 후 주제도 모르고 치솟은 지금의 내 심미안으로 생각해 보면 그놈을 잘생겼다고 생각한 과거의 내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하여튼 그놈이 2달 만에 바람피워서 헤어졌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무슨 난리였나 싶네요.”

“와, 누군지는 몰라도 등신 같은 놈이네. 널 두고 바람을 피우다니.”

“네네, 등신이었죠. 조금 좋아해 주니까 신나서 그 짓거리를 하고.”

험한 말까지 섞어 가며 내 전 남자 친구를 욕하는 선배를 보니 어쩐지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진탕 욕을 내뱉은 글로리아 선배가 길쭉한 두 다리를 꼬며 제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밀당이 필요한 거지. 상대 쪽에서 더 안달 나게 말이야.”

안달 내는 노아 선배?

조금 혹한다.

나는 두 눈을 번쩍 뜨고 글로리아 선배의 말을 되뇌었다.

“밀당, 이요. 밀당…….”

헉, 혹시 내가 그동안 너무 바보같이 굴었으면 어쩌지?

항상 얼굴 보면서 웃고, 말도 훨씬 많이 걸고, 눈만 마주쳐도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고. 물론 노아 선배도 나를 많이 좋아한다는 게 느껴졌지만 그거랑 별개로 선배한테 내가 어떻게 보였을지 조금 신경이 쓰였다.

“……어떻게 하는 건데요?”

“음, 예를 들어 일부러 약속을 깬다던가, 기쁘거나 설레더라도 감정을 조금 티를 안 낸다던가?”

“오, 조금 알 것 같아요.”

나는 머릿속에 정보를 꼭 박아 넣었다.

“어, 정말 하게?”

진짜 할 줄은 몰랐다는 듯, 글로리아 선배가 싸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가 알려 줬는지는 노아스한테 말하지 마라. 걔가 날 죽이려 들 테니까.”

* * *

“야, 저기 네 애인 왔……오셨다.”

도라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실 밖에서는 노아 선배가 여기 좀 봐 달라는 듯 손가락으로 창문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반 아이들이 덩달아 창문 너머를 흘끔거리자 나는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안녕, 수업 잘 들었어?”

조금 교과서적이면서도 노아 선배다운 인사말이었다. 아, 귀여워. 내가 저기에 반했지.

나는 무심코 평소처럼 웃으며 마주 인사하려다 말고 들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밀당, 밀당 해야지.

“네. 선배도요?”

속으로 그렇게 되뇐 내가 평소보다 더 단조롭게 웃으며 대답하자 선배가 멈칫했다.

교실을 나서 같이 복도를 걷는데 선배가 머리를 작게 흔들며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좀 시원하네.”

“네, 그렇네요.”

나는 셔츠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을 꼬집으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려 노력했다.

또 단조롭고 조금은 딱딱한 말투. 아마 선배가 내게서는 절대로 받아 본 적 없는 태도일 것이다.

선배가 계속 이쪽을 흘깃대는데도 나는 새침하게 머리카락을 넘길 뿐이었다.

몇 분간 계속 내 눈치를 보던 노아 선배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내가 뭐 잘못했어?”

“네, 네?”

“아까부터 계속 말이 없길래…….”

황금색 눈이 시무룩한 기색을 띠었고 하얗고 긴 속눈썹이 퍽 처연하게 팔랑였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내가 뭐라고 저 얼굴을, 선배를 밀어낸단 말이냐. 어쭙잖기는.

“아뇨,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내가 단박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자 노아 선배가 안심한 듯 표정을 풀고 물었다.

“무슨 생각?”

나는 선배의 두 손을 꼭 잡고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 주말에 또 데이트 갈래요?”

때려치워. 역시 난 저 얼굴에 못 당해. 밀당? 꺼지라 그래. 난 지금도 앞으로도 당당당당이야.

오늘도 패배를 외치며 내 데이트 신청을 승낙하는 선배의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생각해 보면 내가 노아 선배를 밀어 낸다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내 밀당은 어쩐지 허무하게 끝나 버렸지만, 안달 내는 노아 선배를 보겠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 * *

“미안, 좀 늦었지.”

아무 생각 없이 교문 옆 담벼락에 기대 선배를 기다리던 나는 저만치서 다가오는 노아 선배를 보고 발을 헛디딜 뻔했다.

“……그 옷은.”

“전에 네가 좋아하는 것 같길래.”

노아 선배는 지난 데이트 때 내가 눈여겨 보던 옷을 입고 있었다.

파란 선이 들어가 있는 하얀 셔츠. 내가 생일 선물로 사 주려고 했는데! 선배 생일 메모도 해 놨는데, 11월 9일!

아쉬움이 드는 것도 잠시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와, 미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리다 입을 틀어막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고 있긴 하지만, 사실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 내 입은 조금 험한 편이었다. 어릴 적부터 시내에 자주 놀러가 영지민들과 어울려서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런 면은 내면 깊숙이 꾹 누르고 있었는데, 선배가 저 옷을 입은 걸 보니 벅차오르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거친 말이 나와 버린 것이었다.

후하, 후하.

이마를 팍팍 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은 나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노아 선배를 빤히 바라보았다.

선배는 내 돌발 행동에 당황해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아는 듯, 내심 좋은지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고 있었다.

“……가죠. 오늘 선배가 너무 멋져서 사람이 너무 많이 꼬일 것 같네요. 긴장해야겠어요.”

나는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선배의 손을 잡고 카페로 끌었다.

점심을 먹기 전 케이크로 입맛을 돋우기 위해서였다. 마침 여기가 케이크가 맛있기로 유명하기도 했고.

“뭐 드실래요?”

내 질문에 흔들리는 시선으로 메뉴판을 훑은 노아 선배가 실토했다.

“……사실, 나 단 거 별로 안 좋아해.”

“네?”

그 말을 들은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뭐, 뭐라고.

“저, 정말요? 솜사탕도요?”

“응…….”

노아 선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그럼 저희 영지에서는 왜 그걸 먹겠다고 하셨어요.”

“네가 먹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제가요?”

그랬던 것 같기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내가 이마를 짚고 끙, 소리를 냈다.

그럼 솜사탕을 찔끔찔끔 녹여 먹던 게 아껴 먹으려던 게 아니라 그냥 못 먹던 거였냐고.

“……미안합니다.”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나는 메뉴판을 샅샅이 뒤져 가장 덜 단 케이크를 찾아냈다.

“그럼 제일 안 단 걸로 시킬게요. 녹차는 괜찮으세요?”

“아냐, 그냥 너 먹고 싶은 거 골라.”

“저 녹차 좋아해요. 그럼 주문할게요.”

거짓말이었다. 나는 단 걸 엄청나게 좋아했다. 오죽하면 아빠가 걱정할 정도로.

오늘도 초콜릿 크림 위에 초콜릿 시트를 얹고 초콜릿을 입히고 그 위에 초콜릿을 바르고 뿌린 케이크를 시킬 생각이었다. 선배는 모를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게 선배가 아니었다면 ‘야, 미쳤어? 케이크는 달아야지!’ 하면서 제일 단 걸 시켜 버렸을 거라는 걸.

하지만 노아 선배를 위해서라면 그깟 녹차 케이크 하나 못 먹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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