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10)

* * *

“……큰일 났다.”

기숙사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은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공부하기 싫어…….”

책을 펴도 펜을 들어도 계속 노아 선배 생각만 난다. 몇 분째 문제 하나도 못 풀고 있었다.

큰일이다, 정부에게 빠져 일 안 하고 나라를 말아먹는 폭군이 된 기분이었다. 왜 역사 속에 여자한테 빠져서 일 안 하던 황제가 그렇게 많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지극히 정상이야.”

옆에서 펜을 돌리며 묘기를 하고 있던 도라가 핀잔을 주었다.

“아냐, 이건…….”

나는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산처럼 쌓인 과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 달콤한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래, 이게 내 현실이었지.

“에휴…….”

마지못해 책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에는 의욕이 하나도 없었다.

* * *

나는 하품을 하며 후관 복도를 지났다. 밀린 과제를 하느라 늦게 잔 탓에 아까부터 죽을 것 같았다. 잠 깨느라 물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모른다.

“하암.”

덥고 졸리고 피곤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벅벅 긁고 있는데 어디선가 야옹, 하고 우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하얀 고양이가 멀뚱멀뚱 나를 보고 있었다.

“야, 오랜만이다?”

나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인사를 건넸다.

너 덕분에, 어? 노아 선배 젖은 모습도 보고 그랬다. 고맙다.

“요즘은 안 보이더니 어디 있었어?”

고양이가 대답하듯 야옹, 하고 울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입에 물고 있던 것을 떨어뜨렸다. 연못에 있던 금붕어가 잔디 위에서 거세게 펄떡거렸다.

“야, 그건 먹으면 안 돼!”

나는 진한 주홍색을 띤 금붕어를 보고 아연한 얼굴로 펄쩍 뛰었다. 이 금붕어 비싼 품종일 텐데. 연못에서 잡아 왔나? 어떻게 잡은 거야.

손끝으로 펄떡이는 금붕어를 잡고 연못으로 달려가 놔주었다.

어쩐지 손이 미끈거리는 것 같아 바닥에 문지르는데 어디선가 고함 소리가 들렸다.

뭐야, 누가 싸우나?

금붕어를 잡았던 손이 아닌 쪽 손으로 머리를 긁으며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

후원 건너편의 복도에서, 학생 두 명이 무어라 소리치며 싸우고 있었다. 대충 보니 연인 사이로 보이는 여학생과 남학생이었다.

뭐라고 하는지,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얼굴은 보였다. 여학생은 플로라 선배였고, 그 앞에 서 있는 남학생은 플로라 선배의 남자 친구였다.

분위기가 꽤나 살벌했다.

엄마야.

아무래도 계속 거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침을 꿀꺽 삼키며 잠시 눈치를 보던 나는 손을 치마에 문질러 닦으며 후다닥 실내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도 불안함에 아까 그곳을 계속 힐끗거렸다.

플로라 선배가 저러는 모습은 처음 보네. 괜찮은……거겠지?

“야옹.”

찜찜함에 치마 천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고양이가 나를 원망하듯 바라보며 울었다. 내가 제 밥을 빼앗아서 버렸으니 당연했다.

“어, 어? 미안. 뭐 사 줄까? 기다리고 있어.”

금붕어를 빼앗은 게 내심 미안했던 나는 매점으로 달려가 고양이가 먹을 만한 간식을 사 왔다. 매점 간식은 엄청 고급이니까 고양이가 먹어도 될 거다.

무엇을 먹여야 할지 고민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는데도 고양이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자.”

내가 간식을 내밀자 고양이는 만족스레 꼬리를 살랑였다. 그 거만한 모습이 ‘그래, 이래야지’ 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다 먹고 혀를 내어 입 주변을 핥는 고양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내가 고개를 돌려 아까 플로라 선배가 있던 곳을 흘깃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조금 찜찜한 마음으로 기숙사로 돌아왔더니 도라가 내게 편지를 던지며 투덜거렸다.

“갈 때마다 나한테 온 건 없고 죄 너한테 온 거야.”

“오, 고마워.”

역시나 아빠한테서 온 편지였다. 사실 아빠 말고는 올 데가 없었다.

봉투를 뜯은 내가 편지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래? 그 선배 말이니? 그래도 괜찮은 사람 같아서 다행이구나. 나중에 꼭 아빠한테 데리고 오렴. 어떤지 좀 자세히 보게.

그보다 우리 딸, 건강하게 지내고 있지? 밥은 잘 먹고 있고? 잠은 잘 자고? 공부는 잘 하고 있고? 친구들끼리 무슨 문제는 없고? 너 덜렁거리는 것 때문에 아빠는 항상 걱정이야.

바쁠 테니 이만 줄인다. 아빠가 항상 사랑하는 것 잊지 말고.

이번엔 띄어쓰기가 되어 있었으니 전에 보냈던 것보다는 나았지만 역시나 삐뚤어진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편지를 다 읽은 나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편지 봉투로 볼을 탁탁 두드렸다.

……데리고 오라니, 이거 상견례 하자는 건가?

* * *

좋아하는 사람과 알콩달콩 사귀다 보니 내가 너무 들떠서 앞서가는 것 같기도 한데 뭔가 상견례 같았다. 아니, 아빠한테 데리고 오라는데 솔직히 이건 상견례 아닌가? 아니라고? 어쩌라고.

결혼? 내가 선배랑 결혼? 결혼이라……하고 싶다.

나는 턱을 쥐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너무 이득인데?”

그랬다. 내가 너무 이득이었다.

노아 선배 같은 사람이 자작가의 안주인으로 오려고 할까 싶었다. 아니, 그러려면 내가 가주가 되어야 하는데. 잠깐, 그럼 지참금은 뭐 어떻게 되는 거지? 이거 복잡해지네.

신나게 설레발을 치며 혼란함에 머리를 싸맨 채 복도를 걷다 보니 동아리 교실에 도착했다.

문을 여니 노아 선배가 먼저 와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응, 빨리 끝나서.”

내 양손을 잡고 손깍지를 끼며 선배가 대답했다.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말이 나왔다.

“있잖아요, 선배. 저 선배랑 결혼하고 싶어요.”

“어?”

나는 선배와 맞잡은 두 손에 힘을 주며 우렁차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졸업하면 저랑 약혼해 주세요!”

사실 나는 고사하고 선배가 졸업할 때까지도 1년 넘게 남긴 했다. 게다가 우린 사귄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으니 얼토당토않는 소리였다.

누가 나한테 이런 소릴 했다면 얘가 왜 이러나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좋아하는 우리 선배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나갈 수 있었다.

“네?”

내가 대답을 종용하듯 두 눈을 부릅뜨자, 하얀 피부를 붉게 물들인 채 노아 선배가 입술을 달싹였다.

“왐마야.”

바로 그때, 타이밍 좋게 교실 문을 연 글로리아 선배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내 청혼 아닌 청혼을 들어 버린 모양인지, 정말 꼴값을 떤다는 표정이었다.

“얘들아, 우리 교실에선 좀 자제하자.”

“뭐, 뭘요.”

입술 부딪힌 것도 아니고 그냥 말만 했는데.

그렇게 툴툴거린 내가 다시 고개를 돌려 노아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대답은요?”

가만히 노아 선배를 올려다보자, 선배가 내 손 끝에 입을 맞추며 활짝 웃었다.

“당연히 좋지.”

순간 선배 주위로 꽃이 피어나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 멍한 얼굴로 서 있는데, 글로리아 선배가 옆에서 심드렁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이야, 이것들이 신성한 학교에서 연애질로도 모자라서 프러포즈를 하고 있네.”

“뭐야, 왜 다들 서 있어?”

문을 열고 들어온 플로라 선배가 의아함에 두 눈을 깜빡거렸다.

“아, 오셨어요.”

어쩐지 아까 봤던 모습이 떠올라, 노아 선배의 손을 놓은 나는 슬그머니 플로라 선배의 눈을 피하며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플로라 선배가 양팔 가득 책 한 무더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본 글로리아 선배가 걱정스레 물었다.

“책이 많네? 시험이 없어서 그런가 요즘 과제가 많더라.”

“맞아요.”

격하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나는 노아 선배의 손을 꼭 잡으며 칭얼거렸다.

“요즘 공부하기 너무너무 싫은 거 있죠.”

“그럼 같이 할까?”

“와, 진짜요?”

노아 선배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다정하게 묻자,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선배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플로라 선배가 들고 있던 책을 정리하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케이트 노아랑 둘이 공부하게? 벌써? 아직 시험은 많이 남았는데.”

“아, 그게 사실…….”

아까 남자 친구랑 싸우는 것 같던데 여기서 우리가 사귄다고 하기도 좀 뭐하고……. 어떡한담.

나는 말끝을 흐리며 난처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보니 케이트 너…….”

플로라 선배가 미간을 좁혔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너 기말고사 수석이 목표구나!”

이제 알았다는 표정의 플로라 선배가 신나게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래, 열심히 해, 케이트 너라면 할 수 있어. 노아한테 실컷 도와달라고 하고.”

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하는 그녀에게 글로리아 선배가 말했다.

“쟤네 둘이 사귄대.”

“아, 뭐, 뭐……?”

두 눈을 크게 뜬 플로라 선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둘이 사, 사귄다고?”

글로리아 선배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어, 언제부터?”

“음, 아마…… 지지난 주였나?”

플로라 선배가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왜 난 몰랐지……?”

플로라 선배의 눈이 해명을 바라고 있었다.

“음, 아, 네. 맞아요. 그렇게 됐어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머리카락을 수줍게 귀 뒤로 넘기며 노아 선배와 깍지를 낀 손을 들어올렸다.

“와, 노아가 연애를…….”

플로라 선배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어쨌든 축하해. 둘이 잘 어울린다.”

그녀는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이 놀랐는지 동아리 시간 내내 플로라 선배는 집중하지 못했다.

역시 지금 알리면 안 되는 거였나 봐. 글로리아 선배 입이라도 막을걸.

나는 죄책감에 두 눈을 꾹 감고 땅을 치다시피 후회했다.

“우린 여기서 공부하다 갈 건데, 같이 할래?”

평소와는 다른 플로라 선배가 걱정된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노아 선배가 선뜻 제의했다.

“아, 그럴까?”

“그럼 나도 할래.”

플로라 선배와 글로리아 선배까지 합류해 4인 파티가 완성되었다.

자리에 앉아 잡담을 나누는 것도 잠시, 이내 교실 안이 펜을 사각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아.”

문제를 풀다 중간에 막혀 버린 탓에 얼굴 가득 인상을 쓴 내가 손에 든 펜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어 옆을 보았다. 노아 선배한테 도와달라고 해야지.

금색 눈과 내 눈이 마주치자 나는 바로 눈웃음을 쳤다. 노아 선배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고개를 홱 돌렸다.

그게 귀여워서 나는 또 웃음을 흘렸다.

“흐흥.”

선배가 불타오를 듯 화끈거리는 양 뺨을 감싸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곤 애써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하더니 선배는 문제에 완전히 집중했다.

와, 집중하는 모습 완전 섹시해.

괜히 노아 선배의 옆모습을 힐끗거리던 내가 손을 뻗어 선배의 공책에 꼬물꼬물 하트를 그렸다. 어느새 문제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

하트 안을 펜으로 칠하고 있는데, 놀랐는지 몸을 흠칫 굳힌 선배가 살며시 내 공책에도 하트를 그렸다. 찌그러진 모양이었지만 귀여웠다.

이 페이지만 보존하고 잘라서 부적으로 갖고 다녀야겠다.

나는 그 페이지를 넘기고 다음 쪽에다 문제를 풀었다.

“으…… 플로라, 쟤네 좀 봐.”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글로리아 선배가 닭살이 돋은 팔을 벅벅 긁어 댔다.

“응…… 사이 좋아 보여서 부럽네.”

플로라 선배가 턱을 괸 채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체로 밝았던 사람이 저러니 나도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플로라 선배, 아까부터 표정이 계속 안 좋으신데요.”

“그러게 무슨 일 있어? 예쁜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담.”

내가 조심스레 묻자 걱정 가득한 표정의 글로리아 선배가 맞장구를 치며 플로라 선배의 뺨을 쓸어내렸다.

“으응.”

우울한 표정의 플로라 선배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실은 에드랑 싸웠어.”

선배 남자 친구 이름이 에드였던가.

어쩌다 싸우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나는 처음 들은 척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뭐? 거의 처음 아냐?”

글로리아 선배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묻자 플로라 선배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게. 이번엔 좀 다를 거라고 생각한 내 잘못이지, 뭐.”

“그렇게 생각하지 마. 보나마나 걔가 잘못했겠지!”

얼굴을 구긴 글로리아 선배가 플로라 선배의 어깨를 토닥이며 능숙하게 그녀를 달랬다.

“그런 것까지는 아니고…… 데이트 장소 정하다가 다른 얘기들까지 나와서 조금 언쟁한 거야.”

침울한 얼굴로 분홍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플로라 선배가 손을 맞잡은 노아 선배와 나를 향해 물었다.

“너희는 그런 걸로 안 싸워? 에드랑은 예전부터 의견이 조금 안 맞았거든.”

“아? 아, 네.”

지금까지는 한 번도 싸운 적 없어요.

나는 다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노아 선배도 나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럽네, 완전 천생연분이다. 운명이네.”

“사귄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하하.”

플로라 선배가 자조적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딱히 그런 것도 아니라서요. 오히려 운명은 선배들 둘이지.

운명, 운명이라.

그 두 글자를 곱씹어 보다 아주 약간 느껴지는 불안함에, 나는 노아 선배의 손을 꼭 쥐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