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렇게 생각했는데.
“자!”
글로리아 선배가 어리벙벙한 표정의 내게 체리 꼭지 몇 개를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식당 메뉴에 체리가 있었던가.
“네?”
“묶어 봐.”
내가 어벙하게 되묻자 선배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대답했다.
“혀로.”
미쳤나!
내가 새빨개진 얼굴로 주먹 쥔 손을 바들바들 떨자 글로리아 선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어, 키스 잘하고 싶다며? 원래 이런 걸로 하는 거야. 소설에서 봤어.”
그 말에 나는 머뭇거리다 말고 꼭지를 입에 넣었다.
와, 이거 보기보다 어렵네. 체리 꼭지를 묶으려고 혀를 빙빙 돌리다 보니 혀가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으으.”
나는 아려오는 턱을 만지작거리면서도 체리 꼭지 묶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기숙사 방에 와서도 말이다.
도라가 턱을 괸 채 건너편 책상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뭐 하냐…….”
“체리 꼭지 묶는 연습.”
“으, 뭐야. 턱 아프지 않아?”
피식피식 비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모습에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네가 만들어 온 케이크 씹었을 때보다 덜 아프니까 걱정하지 마라.”
“야, 내 케이크가 뭐 어때서!”
내가 맞받아치자 도라가 발끈했다.
거참, 맞는 말에 왜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가 만든 케이크는 후관 뒤쪽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단단한데 말이다. 이미 그걸 잘라 보겠다 난리를 피우다 칼을 부숴먹은 전적까지 있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요리 동아리에서 연금술을 가르치는 게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그런 걸 나한테 먹이려 하다니. 그건 연구 대상이라고.”
밀가루랑 버터랑 계란 가지고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내다니, 넌 천재야.
내가 입에 체리 꼭지를 문 채 깝죽대자 도라가 남은 케이크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 미안, 미안! 잘못했어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케이크를 보며 나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저건 짱돌보다 단단하지만 케이크를 흉기로 인정하지는 않을 테니 도라가 저걸 가지고 날 패도 형량이 그리 크게 나오지는 않을 터였다. 그게 억울해서라도 못 맞겠다. 안 그래도 요즘 노아 선배 때문에 코피 터질 일이 많은데 여기서 더 피를 낭비할 순 없었다.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도망쳤다. 여전히 입에 문 체리 꼭지를 매듭지으려 노력하면서.
* * *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이제 체리 꼭지 열 개를 연달아 혀로 묶을 수 있었다. 구경하던 도라가 박수를 칠 만큼 빠르게 말이다.
아, 남자 기숙사는 처음 와 보는데.
나는 머뭇거리다 말고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며 눈앞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케이트? 여긴 어쩐 일로…….”
문을 열고 나온 선배의 모습을 본 내가 숨을 들이키며 등 뒤로 주먹을 꼭 쥐었다.
기숙사 방에서 쉬고 있던 건지 평소보다 흐트러진 차림이었다. 교복 바지에 목을 감싸는 까만색 윗옷. 조금 달라붙는 상의 탓에 몸의 윤곽이 은은하게 드러났다.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몸도 진짜 좋다. 허리가 저렇게 낭창한데 몸은 또 탄탄하네. 어머, 어머! 남사스러워라.
무엇보다 평소에는 묶고 다니던 긴 은발이 풀어진 채 어깨에 늘어져 있었다. 황금색 눈동자는 당혹스러움에 차 있었다.
미쳤다, 미쳤다! 최고다!
평소와는 달리 흐트러진 모습에 나는 이마를 연신 팍팍 쳤다. 룸메이트 분은 선배의 이런 모습을 매일 보는 건가. 나는 그분이 진심으로 부러워졌다.
“잠깐 들어가도 돼요? 아무도 없어요?”
부끄러움에 신발로 바닥을 문지르던 내가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물었다.
선배가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살피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룸메이트는 지금 없는 모양이었다. 타이밍 좋고.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방에 들어섰다.
남자 방에, 내가 남자 방에 와 있다니. 아니, 그런데 선배도 내 방에 들어와 본 적 있으니 상관없잖아? 심지어 기숙사 방도 아니고 저택에 있는 방이었는데.
금세 부끄러움을 지우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완전 깔끔할 줄 알았는데, 선배 혼자 지내는 방이 아니다 보니 생활감이 조금 있었다. 그래도 선배 혼자 쓰는 침대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방 안을 둘러보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선배가 벗은 안경을 닦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갑작스레 찾아와서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하긴, 나도 편한 옷차림인데 선배가 찾아오면 저럴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이쯤은 괜찮잖아? 우린 연인인걸.
푼 머리에 안경도 벗은 모습이라니. 뭔가 무방비해. 청순한데 눈매가 붉어서 요염하기까지 했다.
늘 새롭고 짜릿한 미모를 감상하던 나는 슬며시 선배의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안경은 가능하면 벗지 마세요.”
“……왜? 나 못생겼어?”
“기숙사에 거울 없으세요?”
세상에.
선배가 처연하게 묻자 나는 통탄스러움에 이마를 짚었다.
못생김과 노아 선배라니 정말 하나도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너무 예뻐서 다른 사람들이 눈독들일까 봐요.”
나는 선배의 하얀 손끝에 입을 맞추며 두 눈을 휘었다. 선배는 놀란 듯 얼굴을 붉히며 손을 슬쩍 뒤로 뺐다. 그게 귀여워서 나는 또 웃었다.
“……아.”
노아 선배가 바닥에 떨어진 옷을 보더니 그걸 주웠다. 룸메이트 옷 같은데 방이 어질러진 것 같아서 부끄러운가 보다.
이 정도는 나랑 도라 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우리 방은 걷다가 발에 채는 게 옷들인데.
멍하니 옷을 정리하는 선배를 지켜보던 내가 몽롱한 얼굴로 생각했다.
엉덩이 완전 예쁘다.
주머니 달린 교복 바지의 살짝 달라붙는 천이 예술이었다.
신전에나 있을 법한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
엄한 생각을 하던 내가 정신을 차리곤 부끄러움에 내 뺨을 스스로 마구 쳤다. 따가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뺨이 좀 부어올랐을 테지만, 대충 부끄러워서 빨개졌다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미안, 조금 더럽지.”
“아뇨, 저희 방에 비하면 완전 깨끗한걸요…….”
너스레를 떨며 웃는데 노아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새삼스럽지만 태양을 닮은 황금색 눈동자가 지독하게 예뻤다.
정적만이 우리 사이를 메웠다.
전부터 이랬다. 신나게 이야기하고 놀다가도 가끔 이렇게 분위기가 묘해질 때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암묵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마침 안경도 벗었겠다, 지금이 키스 갈길 타이밍이라고.
“키스해도 돼요?”
“어, 어?”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금색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선배는 무척 당황해하는 듯했지만 이내 얼굴을 붉히며 순순히 입술을 내주었다.
두 입술이 닿자마자, 나는 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파묻고 선배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맞닿은 입술이 움찔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평소보다 적극적으로 나오자 선배는 당황한 듯 주춤거렸다. 아까부터 내 몸에 손도 못 대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왠지 내가 주도권을 쥔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읏.”
얌전히 키스를 당하던 선배가 달큼한 비음을 흘리자 입술이 가냘프게 떨렸다.
그에 멈칫하던 내가 슬슬 숨이 막혀 선배를 밀어내자 입술 사이로 은사가 늘어졌다.
정신을 차리니 노아 선배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나는 선배를 덮치듯 두 팔로 침대를 짚고 있었다.
후텁지근한 공기에 머릿속이 온통 몽롱했다. 몸을 지탱한 팔이 후들후들 떨렸다.
선배와 내 시선이 진득하게 얽혔다. 나는 가빠지는 숨을 들이켰다.
큰일 났다.
왠지 엄청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까는 부러웠던 선배의 룸메이트께 왠지 미안해졌다.
시트 위에 흩어진 은색 머리카락, 붉게 달아오른 하얀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가쁜 숨을 들이쉬며 시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양호실에서도, 시내 골목에서도 이렇게 진득한 분위기는 나지 않았다. 선배 방이라서 그런 건가.
어쩐지 분위기가 견딜 수 없이 위험해져서,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공책보다 무거운 건 들어 본 적 없는 팔로 몸을 지탱하고 있자니 슬슬 팔이 아프기도 했고.
침대를 손으로 짚고 일어나려는데 선배가 내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
“?”
키스 한 번 더 하자는 건가 싶은 내 기대가 무색하게도 선배는 수줍게 나를 제 옆에 앉히고 내 머리를 제 가슴에 기대게 했다. 너른 품은 포근하고 편해서 좋았다.
노곤함에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서 내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제 아는 동생이요.”
“……걔는 왜?”
내가 꼭 끌어안은 선배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노아 선배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전에 저 보고 걔가 애인이냐고 물어봤어요? 우리가 특별한 사이인 줄 알았다면서요. 그럼 화부터 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생각해 보면 그랬다. 애인이냐고 묻는 정도면 충분히 어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물론 아르한이랑 나는 애인도 어장 치는 사이도 아니지만.
“아…….”
내 말을 들은 노아 선배가 잠시 두 눈을 깜빡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땐 두 번째……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켁!”
나는 사례가 들려 콜록거렸다.
“미친 거 아냐!”
“응, 그땐 조금…….”
“제가 미쳤다고 선배를 세컨드로 둬요?!”
“지금은 싫어.”
노아 선배가 미약하게 항변하듯 말하자 나는 선배의 얼굴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싫은 게 맞는 거예요.”
만약 선배한테 다른 여자가 있었다면 나는 그 사람 머리채를 확…… 했을 텐데.
“이제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전 이제 선배밖에 없으니까.”
나는 부끄러움에 그렇게 중얼거리며 은은한 향기가 나는 은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노아 선배가 감동을 받았는지 반지 낀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 오길래, 부끄러웠던 나는 황급히 주제를 돌렸다.
“선배한테 재스민 냄새 나는 거 알고 있어요? 방에서도 나네.”
어째 나보다 선배가 더 향기로운 것 같다. 향수를 쓰는 건가?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가져가 냄새를 맡아 본 선배가 말했다.
“넌 비누 냄새 나.”
“씻기야 자주 하니까요.”
“냄새 좋다.”
노아 선배가 조그맣게 속삭이자 나는 킥킥 웃었다.
“선배는 참 착한 것 같아요.”
“나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닌데.”
선배가 두 눈을 깜빡거리자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너한테만 그래.”
“아니, 선배만큼 착하고 바른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에 나는 분개하며 소리쳤다.
다른 남자애들처럼 신분 가지고 유세 떨지도 않고 짜증 나는 헛짓거리도 안 한다는 점에서 이미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그리고 우리 선배는 진짜로 착하단 말이야.
광신도처럼 소리 지르는 나를 본 노아 선배가 피식 웃었다.
“그런 오해로라도 날 좋아해 준다면 그걸로 좋지.”
“아니, 선배가 안 착해도 좋아했을 건데요.”
또다시 이상할 만큼 자신감 없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선배는 다 좋은데 가끔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니까.
그래도 웃는 모습이 귀엽고 예뻐서 거기서 더 확신을 주기로 했다.
“잘 들으세요. 선배가 천인공노할 대역죄를 짓지 않는 이상, 제가 선배를 안 좋아하게 될 일은 없어요.”
선배의 얼굴을 꼭 쥐고 눈을 맞춘 내가 말했다.
“혼자서 1년 넘게 좋아했는데.”
나는 선배의 얼굴을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응…….”
안심한 듯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내 첫사랑이 너라서 정말 다행이야.”
“첫…… 번째.”
나는 바람나서 헤어진 전 남자 친구를 떠올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 새끼는 어쩜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냐.
“……아니야?”
첫 번째라는 단어에 내가 눈을 피하자 금색 눈동자에 동요가 일었다.
“음, 사실…… 제 첫 연애는 열다섯 살 때.”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렸다.
“그 새……놈, 아니 애가 바람나서 열여섯 살, 아카데미 오기 전에 헤어졌어요.”
“바람? 너를 두고?”
“네, 그냥 머저리 새끼였어요. 볼 건 얼굴밖에 없는.”
나는 꿍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허구한 날 나 무시하고 친구라는 여자애와 시간을 더 보냈던 그 쓰레기를 그때 내 딴엔 예쁘게 생겼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그 후로 얼굴 좀 그만 밝히자고 다짐했건만 아카데미 와서 바로 무너졌지.
노아 선배가 조금 안심한 얼굴로 물었다.
“걔가 예뻐, 내가 예뻐?”
“당연히 선배죠. 선배에 비하면 걔는 말라비틀어진 사과만도 못하게 생겼어요.”
나는 바로 대답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안 그래도 좋지 못하게 끝난 상대인 데다, 나는 노아 선배를 본 이후로 이미 미적 기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진 상태였다.
얼굴 밝혀서 어디다 쓰냐고 하지만, 글쎄. 얼굴 밝혀서 사귀게 된 게 이 사람인데?
“세상에, 걔랑은 키스도 안 해 봤어요. 지금 이런 것들은 선배랑 하는 게 처음이라고요.”
그래도 노아 선배가 의기소침해 있자 나는 선배를 끌어안은 채 단호하게 말했다.
선배가 나를 꼭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난 네가 아예 처음인데.”
와, 귀엽다.
나는 미소가 절로 나오는 것을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사람은 지금 진지한데 나는 눈치 없이 그걸 귀엽다고 느끼고 있는 거니까.
내 허리를 끌어안은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내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헉, 지금 몇 시예요? 이제 가야겠다.”
시계를 본 나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벌써 가?”
선배가 눈썹을 내려뜨린 채 아쉽다는 듯 물었고, 나는 평생 여기 있겠다는 대답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다니.
나는 내가 앉아 있던 침대 시트에 진 주름을 정리하고서 구겨진 치마를 폈다.
“내일 봐요, 선배.”
“데려다줄까?”
“아뇨, 괜찮아요.”
선배와 헤어지고 남자 기숙사 복도를 지나는데, 한 남학생이 선배의 방으로 들어갔다.
룸메이트분을 보니 어쩐지 조금 죄송해져 나는 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미안합니다. 근데 정말 키스밖에 안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