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10)

* * *

노아스가 딱 열 살 때 있던 일이었다.

어느 가문에서 보낸 건지는 모르겠으나 생일 선물로 들어온 잉크가 참 마음에 들었었다. 한 방울 한 방울이 아까워 잘 쓰지도 않고 빤히 바라보기만 하다 서랍에 넣어 두었던 기억이 났다.

하루는 평소처럼 잉크를 꺼내서 보고 있다가, 서랍에 넣어 두는 것을 깜빡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노아스의 방에 놀러온 여동생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 잉크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여동생은 한사코 자기가 그 잉크를 갖겠다고 떼를 썼다. 마음만 먹으면 잉크 따위는 얼마든지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잉크병을 꼭 쥔 동생이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오빠는 이깟 잉크 몇 개는 더 사 올 수 있잖아.

그 한마디 앞에서 그건 그냥 잉크가 아니라느니, 외국에서 들여온 귀한 재료로 만든 선물이라느니 하는 건 너무 치졸한 변명 같았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 심술이 나 가시 돋친 말을 툭 던졌었다.

어차피 넌 글도 못 쓰잖아.

그 말에 동생은 집이 떠나가라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가 자길 무시한다고. 물론 정말 그 이유는 아닐 것이다. 오빠가 평소처럼 고분고분하게 나오지 않아서, 그리고 잉크가 갖고 싶어서였겠지.

그에 이상하게 오기가 생겨 어머니가 동생에게 양보하라 종용해도 거부했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싫다고 고집을 부렸던 날, 처음으로 체벌을 당했다.

힘이 다 빠진 어머니의 회초리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지만 그 쓰라림은 제법 오래도록 남았다.

동생은 바로 다음 날 빼앗은 잉크를 가지고 놀다 시트에 쏟았다. 어머니는 여동생이 철없이 시트를 더럽혔다며 한숨 쉬었지만 잉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아스는 하녀가 잉크로 물든 시트를 치우는 것을 보며 종아리의 쓰라림을 느껴야만 했다.

평소에는 어머니 대신 아픈 여동생을 곧잘 간호해 주곤 했다. 그래도 어머니에게 좋은 오라비 소리를 듣고 싶어서.

하지만 그 이후로 여동생 방에 들락거리는 것은 관뒀다. 동시에 자신의 물건에 애착을 두지 않았다. 이름도 쓰지 않았다.

잉크에 대한 미련과 함께 사랑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렸다.

자신이 노력한다고 동생의 병이 나을 리 없으며 자신이 후계자가 될 수 있을 리도 없었으므로.

누가 들어도 화목한 가정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노아스는 멀쩡하고 건실한 사람으로 자랐다.

플로라,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글로리아의 덕이 있긴 했다. 글로리아가 늘 말하는 ‘우리 아니었으면 네 그 음침한 성격이 배가 되었을 거다’ 라는 일침에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비록 인간관계에 서툴고 숫기 없는 것은 여전했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바라던 대로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마법에 푹 빠져 공부하다 보니 어느새 1년이 쏜살같이 지나갔고 2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애를 처음 본 것도 그때였다.

새 학기의 시작이자 봄이었는데, 그 애도 꼭 봄을 닮은 사람이었다.

처음에 수두룩했던 신입 부원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가는 와중에도 꿋꿋이 남아 있던 그 애. 같은 동아리에서 꾸준히 활동하다 보니 자연히 지인 범위에 들어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다.

그냥 우직하고 성실하고 착한 후배로만 생각했다. 귀찮게 하지 않아서 편하고, 뭐든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고, 또…….

웃는 얼굴이 참 예쁘네. 더 자주 웃었으면 좋으련만.

언젠가 친구들과 함께 있는 그 애를 먼발치서 보고 든 생각이었다.

알고 지낸 시간이 적지 않은데도 그 애가 웃는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친구들 앞에서는 자주 웃는 그 아이는 노아스의 앞에서는 늘 굳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조금 서운해지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미소가 제대로 보고 싶어졌다.

또 하루는 아카데미 식당 앞에서 친구들과 떠들며 지나가는 그 애를 마주쳤다. 정확히는 스쳐 지나갔다. 아마 그 애는 자신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오늘 점심 메뉴가 맛있다며 깔깔거리는 그 애의 웃음을 처음으로 바로 눈앞에서 마주 보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녹색 눈동자를 담은 눈이 휘어지는 모양새며 꽃잎 같은 색의 금발이 햇살에 녹아드는 모습이 너무 찬란해서. 꼭 배경에 꽃이 피어나는 환각이 보일 정도로 예뻐서.

아카데미 식당 입구에 바보처럼 멍하니 서 있던 기억이 났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마도 첫 번째로 반했던 때가 아닐까 싶다.

두 번째는 곱슬거리는 병아리색 머리카락이 귀엽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세 번째, 그 아이의 웃는 얼굴이 다시 보고 싶다고 느꼈을 때. 네 번째, 동아리 교실에서 조는 그 소녀를 깨우지도 않고 가만히 보고 있던 순간.

이것까지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후로 반했던 순간을 꼽자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게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걸 깨닫게 된 건 한참 후였다.

* * *

그날 사물함에 산처럼 쌓여 있던 편지들 중 그 편지를 집어 든 건 우연이었다. 편지 봉투엔 익숙한 필체가 적혀 있었다.

무언가 지워 낸 듯 잉크 얼룩이 진 편지에는 어딘가로 나와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이유 모를 기대감이 일었다.

“저 선배를 많이 좋아해요.”

그리고 케이틀린은 본인조차 모르는 노아스의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그러니까 이거, 고백이 맞지?

노아스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나를 좋아한다고? 케이틀린이?

나를……좋아한다고.

다소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일단 기뻤다.

……기뻐?

눈을 깜빡거리던 노아스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 순간부터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몸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아……고마워.”

얼굴이 급작스레 뜨거워졌고 당혹스러움에 가쁜 숨을 들이쉬는데, 초록색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노아스는 바로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나 이 아이를 좋아하는구나.

“!”

이제 알았다. 어쩜 이렇게 바보 밭을 수 있나.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한참 전부터 네 모습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와 심장이 간질거렸다고.

이제야 그게 무슨 감정인지 알았다고.

당장 그렇게 말해 줘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마 너무 기쁘고 떨려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사실 할 말은 따로 있었어요.”

뭐지?

케이틀린이 운을 떼자 불안함에 떨던 노아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저 동아리 탈퇴하려고요.”

……갑자기?

대답을 하려다 선수를 빼앗긴 노아스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왜?”

“역시 플로라 선배가 슬퍼하시겠죠?”

케이틀린이 머쓱하면서도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고, 노아스는 당혹감에 한참 말을 골랐다.

“꼭 플로라가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도. 나는 네가 탈퇴하는 걸 원하지 않아.”

그 후로 무슨 말을 나눴는지는 심장이 떨려서 잘 기억나지 않았다.

대화 내내 달빛을 등지고 있어서 그 애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노아스는 방금 했던 대화를 조용히 곱씹었다.

케이틀린이 나를 좋아한다는데, 분명 사귀자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케이틀린이 좋은데. 사귀고 싶고.

그래, 남녀 사이에 꼭 연인만 있는 건 아니지. 교제하기 전에는 서로를 알아 가는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다정하고 부드럽게, 너무 빠르지 않게 천천히.

노아스는 언젠가 글로리아가 억지로 건넸던 로맨스 소설의 내용을 상기하며, 자신이 너무 앞서가지 않기를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 * *

“선배!”

품에 꼭 안겨 오는 온기를 느끼며 노아스는 웃음을 지었다. 노란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찬란한 빛을 뿌렸다.

“숙제 너무 많아요. 교수님 미친 것 같아.”

그의 연인은 칭얼거리는 것마저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입술을 삐죽대며 영롱한 초록색 눈으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노아스는 연인의 삐져나온 금발 머리를 넘겨 주며 숨을 들이켰다. 너무 예뻐서 제대로 마주 보기가 어려웠다.

가끔씩 각질이 이는 입술은 옅은 분홍색.

셔츠 단추는 늘 끝까지 잠근 채 동그란 안경을 쓰고, 가끔씩 보이는 미소가 햇살 같은 아이.

칭찬을 들으면 기분 좋은지 배시시 웃고, 집중할 때면 눈이 반짝거린다.

그런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가 제 마음을 붙들었다.

무엇보다 이 애가 짓는 햇살 같은 웃음이 참 예뻤다.

가만히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던 노아스는 비누 냄새가 나는 폭신폭신한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보고 싶었어.”

“저도요.”

그러자 연인은 제 품에 더 파고들었다. 제가 반했던 그 햇살 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걔가 그런 말을 했다고? 우엑…….”

내 말을 들은 글로리아 선배가 실소를 흘리더니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오래 알아 온 소꿉친구의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스울 법도 하지.

“네가 웃는 모습이 좋…… 으에엑.”

나는 상관하지 않고 두 눈을 살며시 감은 채 몽롱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선배.”

내게 용기를 준 사람은 글로리아 선배였고, 그녀 덕분에 내가 노아 선배와 맘 놓고 사귀게 될 수 있었으니. 맨날 저렇게 능글거려서 그렇지 사실은 항상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내가 대뜸 내뱉은 말에 글로리아 선배는 놀란 듯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게 괜히 부끄러웠던 나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

“크흠, 전부터 저한테 눈길이 갔었대요.”

“아, 젠장. 내가 유학을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교환 학생 그깟 거 그냥 플로라한테 양보할걸.

금세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글로리아 선배가 신음하듯 안타까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평생 놀림감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하……어쩜 사람이 그렇게.”

우리는 서로 다른 주제로 한탄하고 있었다.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내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노아 선배의 비해서 제가 너무 키스를…… 못 하는 것 같아요.”

“와, 그 녀석. 온갖 점잖은 척은 다 하더니 그런 모습이 있었어?”

글로리아 선배가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어린 것들이…….”

선배랑 입만 맞추면 내가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것 같았다. 현란하게 내 혼을 다 빼 놓고서는 천천히 입술을 떼고 수줍고 긴장한 얼굴로 ‘어땠어?’ 하고 묻는데, 솔직히 조금 약 올랐다.

“특훈이 효과가 없었나 봐?”

“특훈이요?”

야한 소설 무더기로 건네준 게 특훈이라고 할 수 있나?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긴가민가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키스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글로리아 선배가 익살스러운 얼굴로 두 손을 얽었다. 열 손가락이 서로 얽혀 현란하게 움직였다.

“아, 진짜. 저급해요. 그만하세요, 선배.”

나는 오만상을 쓰고 두 눈을 꾹 감았다. 이미 실전을 경험했지만, 글로리아 선배가 저러니 남사스러웠다.

글로리아 선배는 확실히 고마운 사람이지만 이런 쪽으로는 영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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