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래서 그때 첫눈에 반했어요.”
말을 마친 나는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양 뺨을 감쌌다.
내 말을 들은 노아 선배는 약간 얼이 빠진 얼굴로 부끄러운 듯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더니 조금 의기소침해진 얼굴로 물었다.
“내가 예뻐서 좋아?”
“네!”
당연하지, 지극히 당연한, 진리처럼 당연한 소리를.
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선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보다 예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좋아할 거야?”
“……선배, 잘 들어요.”
통탄스럽기 그지없어 이마를 짚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사람은 없어.”
내 말에 선배가 안심한 표정을 했다.
“내 눈에는 선배가 제일 예뻐요.”
작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노아 선배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전 7월 22일생이고 가족은 아빠, 단 거랑 예쁜 걸 좋아해요.”
“응?”
뜬금없는 소리에 선배가 당황한 듯 되물었고, 나는 거기다 대고 웃었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서요. 선배는 어떤 사람이에요?”
오죽하면 생일도 얼마 전에 알았겠어. 더 일찍 알았다면 작년에 그 핑계로 선물 주면서 말 한마디라도 더 붙여 봤을 텐데.
나는 두 눈을 순진하게 끔뻑거리며 웃었다.
내가 이 표정을 하면 선배가 나를 귀여워하는 게 한눈에 보여서 좋았다. 그러는 자기가 더 귀엽다는 것도 모르고.
“알고 싶어요.”
역시나 좋아서 입매를 씰룩거리던 선배가 멈칫하며 말했다.
“잠깐, 그럼 생일 지났네. 선물은…….”
“아뇨, 선배 얘기 해 주세요.”
“아, 그래. 똑같이 대답하면 되는 거야?”
내가 말을 끊자 착한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생일은 11월 9일. 부모님이랑 세 살 위로 형이 하나 있고 네 살 아래 여동생이 하나 있어.”
“네, 그리고요?”
나는 두 눈을 깜빡이며 선배의 말을 재촉했다.
“형은 검술을 잘하는데, 형이랑은 별로 안 친해. 형은 항상 바빴거든.”
그 유리엘 후작가의 장남이니 당연히 그럴 테지. 오죽하면 남부 끝자락에 사는 나도 소후작의 무용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 있었다.
“엘로이즈는…… 몸이 많이 아파. 동생들이 다들 그렇다고는 하지만, 나를 싫어하고.”
“……아.”
조용히 선배의 이야기를 듣던 내가 몸을 움찔 굳혔다.
어, 이건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인데.
“부모님은…… 엘로이즈가 아파서 어머니는 간호하느라 바쁘시고, 아버지는 날 마뜩잖아 하셔. 난 검술에 형만큼 재능이 없거든.”
다소 비극적인 이야기를 선배는 조곤조곤 태연하게도 말했다. 그래서 더 짠하게 들렸다.
졸지에 연인의 가정사를 전부 듣게 된 나는 땀을 뻘뻘 흘렸다.
노아 선배는 형제자매와 부모님의 무관심 속에서 홀로 쓸쓸하게 조용히 컸단다.
글로리아 선배가 말했던 그 집안 사정이라는 게 이거였어? 아니, 글로리아 선배도 그렇고 고위 귀족들은 왜 가정사가 다 이렇지.
“그런데 내가 감히 널 좋아해도 될까.”
“……감히랄 것까지는.”
당황스러움에 눈을 깜빡이는데, 내 손을 꼭 쥔 선배가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를 이렇게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내가 잘 모르겠어.”
가, 갑자기?
가족 이야기 하다 북받쳐 올랐나.
“네가 좋아해 주는 만큼 나도 널 좋아해 주고 싶은데, 누가 날 이렇게 좋아해 준 것도 처음이고 누굴 이렇게 좋아해 본 것도 처음이라…….”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말들에 숨이 막혔다.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한 번도 이만큼…… 이래 본 적이 없었어. 다 네가 처음이야.”
평소에는 말 한마디 더듬는 법 없는 그 노아 선배가, 내 앞에서 입술을 깨물며 말을 거르고 있다. 게다가 다 내가 처음이라면서 울먹거리고 있다.
선배가 내 손을 제 얼굴에 가져다 댔다.
“혹시라도 내가 너무 서툴고 바보 같아서 널 질리게 하면 어쩌나, 네 마음에 보답해 주지 못하면 어쩌나…… 매일 생각했어.”
나는 다른 한 손을 들어, 더듬거리는 노아 선배의 얼굴을 감쌌다.
어쩌다 화제가 이쪽으로 흘러 온 건진 모르겠지만.
“다 상관없어요.”
“…….”
“선배가 절 좋아하지 못한다 해도 제가 그만큼 선배를 좋아할게요.”
금색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긴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보답 받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그만큼 좋아하니까요.”
나는 잘게 파르르 떨리는 선배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말해 주세요.”
절 좋아한다고.
내가 밝게 활짝 웃으며 선배의 손을 내 뺨에다 가져다 댔다.
“……좋아해.”
그에 노아 선배가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그거면 됐어요.”
기대했던 대답에 뿌듯하게 웃던 내가 은근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그거 알아요? 사실 저도 누굴 이렇게 좋아해 본 건 선배가 처음이에요.”
노아 선배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감격한 표정을 하자 내가 황급히 덧붙였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아요. 저는 선배를 좋아하고, 선배도 저를 좋아해요. 그거면 됐잖아요?”
선배의 양 뺨을 감싸고 황금빛 눈을 빤히 바라보던 내가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선배는 언제부터 저를 좋아했던 거예요?”
“아……그건.”
노아 선배는 입가를 가리고 살포시 웃었다.
“네가 아파서 동아리를 빠졌던 날 있잖아.”
부끄러운지 뜸을 들이던 선배가 특유의 조곤조곤한 투로 말을 이었다.
“고작 하루였는데 네가 없으니까…… 기분이 많이 이상하더라고.”
“아…….”
“그것 말고도 그냥 은연중에 네가 웃는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선배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고백해왔다.
“그래서 네가 요즘 자주 웃는 게 좋다고 한 거야.”
“…….”
“아니면 나도 너한테 첫눈에 반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쩜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할까.
나는 선배 품에 폭 끌어안긴 채 낭창한 허리에 팔을 휘감고 너른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안 그러면 이 터질 것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들켜 버릴 것 같았기에.
쿵쿵 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를 울리던 그때 타이밍 좋게 예비종이 울렸다.
“아, 수업 듣기 싫어요……. 선배랑 있고 싶어요.”
내가 오만상을 쓰고 품을 파고들며 투정을 부리자 나를 안아 올리다시피 붙잡은 선배가 내 이마에 부드러운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래도 수업은 들어야지.”
그에 나는 곧바로 수긍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건 그렇죠.”
아카데미 1년 학비가 얼만데 내가 어떻게 수업을 빠지나.
나는 허탈한 얼굴로 책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런 나를 달래듯 내 손을 한번 꼭 잡았다 놓은 노아 선배가 수줍게 물어왔다.
“수업 끝나면 여기서 만날까?”
그에 나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힘차게 대답했다.
“네!”
외전 - 노아스 유리엘
가족은 서로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아 주는 존재이며, 항상 돌아갈 수 있는 집이다.
책에 나온 ‘가족’의 정의였다.
그리고 어린 노아스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야 했지만 공감할 수 없었다.
고위 귀족들이 다들 그렇다지만 그의 가족은 다정함이나 단란함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식들이 태어나기 전의 부모님은 다정한 부부였고, 그때는 후작저가 이렇게 삭막하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시녀들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됐건 지금은 건조하고 삭막한 전형적인 귀족 가문이었다.
제국의 기사단장이자 후작, 권위적인 가장인 아버지.
한때는 사교계를 주름잡는 미인이었지만 지금은 막냇동생 생각에 늘 우울한 어머니.
장차 가문을 이을, 아버지의 기대에 완전히 부합하는 형.
어머니의 걱정과 애정을 한 몸에 받는, 몸이 약해 항상 침대 신세인 막내 여동생.
그리고 혼자서 둬도 알아서 잘하는 귀염성 없는 둘째 노아스.
노아스는 기사단장과 후작의 업무를 병행하는 아버지가 얼마나 바쁜지 알았다. 그 후계자인 형도 마찬가지였다.
쌍둥이 동생들 중 막내가 죽고 어머니가 얼마나 슬퍼하고 자책했는지, 살아남은 아픈 여동생이 하루에 몇 번씩 열이 올라 괴로워하는지 알았다.
일찌감치 철이 든 어린 노아스는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나 깨물었을 때 덜 아픈 손가락이 있기 마련이니까.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자식들을 똑같이 사랑해 주기란 어려운 일일 터였다.
그래서 더 씁쓸하게 느껴지곤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