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좀 보세요, 무지개예요!”
나는 맑게 갠 푸른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비가 막 그친 후라 습한 공기도 땅에 고인 웅덩이도 마냥 기분 좋기만 했다.
하늘에 뜬 무지개를 올려다보며 선배의 손을 꼭 잡은 채 길을 걷는데, 마침 보석상이 보이길래 내가 물었다.
“혹시 저랑 커플링 같은 거 해 볼 생각 있으세요?”
수수한 반지나 목걸이 정도의 장신구는 아카데미 교칙에도 위반되지 않았다. 노아 선배랑 같은 반지를 끼고 다니면 기분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뭔가 정말로 사귀는 것 같기도 하고.
선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생각해 둔 게 있어?”
“아뇨, 선배랑 같이 보려고요.”
나는 팔짱을 끼고 선배를 보석상으로 이끌었다.
“와, 이거 보세요.”
나는 주먹만 한 보석이 떡하니 박혀 있는 반지를 가리키며 감탄했다,
장난 아니다. 이걸 끼고 다니면 엄청 주목받겠는걸.
딱히 비밀 연애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사귄다는 사실을 온 아카데미에 동네방네 알리고 다닐 생각도 없었다.
진열장을 찬찬히 구경하는 우리에게 직원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학생분들이세요? 커플링 고르시는구나, 부담 없이 하시려면 이쪽에 있는 것들이 좋아요.”
역시 주먹만 한 다이아는 좀 그렇지. 연인이라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아, 네.”
결국 나는 직원이 추천해 준 것들로 눈길을 돌렸다.
작은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부터 아무 장식 없이 매끈한 반지도 있었다. 확실히 학생들이 끼고 다니기에 좋을 것 같았다.
뭘 껴도 선배한테는 잘 어울릴 것 같아 고민하던 내가 노아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는 어떤 게 좋아요?”
“난 네가 좋은 건 다 좋아.”
“어머나, 로맨틱하시네. 그럼 제가 골라 드릴까요?”
얼굴 가득 흐뭇한 웃음을 지은 직원이 물어 왔고, 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직원이 추천한 것은 매끈한 은색 표면의 반지였다.
부담 없이 하고 다니기도 좋고 무난하게 예뻐서 고개를 끄덕이고 계산을 하려는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노아 선배는 고위 귀족이니까 엄청 화려하고 비싼 장신구들을 많이 봐왔을 텐데, 이게 눈에 차려나?
걱정스레 고개를 돌려 선배를 본 내가 금세 걱정을 떨쳐 냈다.
선배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연신 웃고 있었다. 디자인이고 뭐고 그냥 나랑 커플링을 맞춘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나 보였다. 그게 귀여워서 내 표정도 덩달아 흐물흐물 풀렸다.
그러고 보니까 고백하기 전, 그러니까 지난 학기까지만 해도 무뚝뚝하고 표정 변화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조금 가까워지고 나니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손만 잡아도 얼굴이 빨개지고 말도 더듬을 정도로 속이 투명하게 보였다.
아, 귀엽긴.
“절대 빼놓으면 안 돼요, 알겠죠?”
나는 선배를 올려다보며 두 눈을 깜빡거렸다.
내 신신당부에 노아 선배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배시시 웃었다.
나는 손을 들어 반지를 낀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선배가 제 손을 들어 내 손 옆에 펼쳤다. 선배 손에 나랑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흐뭇한 얼굴로 두 개의 반지를 번갈아 보고 있는데, 문득 보이는 옷가게 쇼윈도에 정말 예쁜 옷이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유리 너머를 바라보다 말고 간절한 얼굴로 노아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선배, 저거 한 번 입어 보실래요?”
오해할까 봐 그러는데, 참고로 여자 옷이 아니라 남자 옷이었다. 그것도 부디 노아 선배가 입어 줬으면 싶을 정도로 예쁜.
내가 눈망울을 반짝이자 선배는 잠시 두 눈을 끔뻑이더니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에게 원하던 옷을 입히는 데 성공한 나는 감격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감탄했다.
색부터 디자인까지 선배랑 너무 잘 어울렸다.
새삼 선배 정말 엄청 예쁘게 생겼네. 공주님 같다. 옷이 고급스러워서 더 그랬다.
“공주님…… 아니, 선배. 와, 엄청 잘 어울려요.”
글로리아 선배가 왜 날 가지고 인형 놀이 같은 걸 했는지 새삼 알 것 같았다.
싱글싱글 웃던 나는 옷의 가격표를 보고 멈칫했고 이 옷은 선배 생일 선물로 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까 선배 생일은 언제예요?”
“11월 9일.”
“아, 조금 남았네요.”
나는 안도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때까지는 모을 수 있는 가격이었다. 반드시 이걸 사서 선배한테 입히리.
그렇게 다짐하며 가게를 나오니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아쉬움이 듦과 동시에 켜져 있던 상점들의 불빛이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다.
후텁지근한 여름 공기가 피부에 닿아와 조금 더웠다. 주위가 어두워지니 괜히 분위기가 묘해졌다.
너무 오래 잡고 있었더니 조금 땀이 날 것 같아 잠시 손에 힘을 풀자, 놓지 말라는 듯 꼭 잡아 왔다.
놀라 고개를 들어 선배를 보니 귀까지 은은한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들고 있던 꽃다발에서 꽃 한 송이를 더 뽑아 선배의 은색 머리카락에 꽂았다.
어스름한 빛을 받아 노아 선배의 얼굴이 청초하게 빛났다.
아, 역시 인간이 아니라 요정이었나. 걱정 마요, 선배. 이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갈 테니.
속으로 주접을 떨고 있는데, 아직 닫지 않은 상점 몇몇 군데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선배의 은색 머리칼이 오렌지색으로 반짝였다.
어쩌다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문득 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건 기분 탓이 아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선배의 품에 안겨 있었다.
키스인가? 그런 타이밍인가?
당황과 기대에 침을 꿀꺽 삼키던 나는 스리슬쩍 손을 올려 점점 가까워지는 선배를 밀어냈다. 손바닥에 보드라운 입술이 닿았다.
“이건 조금…… 부끄러워요.”
“아.”
그에 선배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고분고분하게 물러났다.
“……네가 싫으면 안 할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까는데, 그 모습이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뭔데 이렇게 귀엽지? 왜? 내가 거절하니 날 유혹하는 건가? 지능적인걸.
나는 진지한 얼굴로 깍지 낀 손을 주물럭거렸다.
“……지금 저 꼬셔요?”
“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는 그 순진한 모습이 음심을 자극했다.
나는 살며시 주먹을 쥐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마침 으슥한 골목길이겠다. 에라, 모르겠다. 그래, 내 애인인데 뭐 어때. 첫 키스는 진작 해 버렸는데 더 뺄 게 있나? 역시 실전에서 배우는 거지, 뭐.
줏대가 없었던 나는 곧장 선배의 목을 휘감고 매달렸다.
“……!”
내 적극적인 행동에 선배는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은색 속눈썹이 가련하게 파르르 떨리는 것을 눈에 담고 나서야 나도 눈을 감았다.
따뜻한 손이 내 얼굴을 감싸 왔다. 낯선 손길에 움찔 놀라던 내가 이내 몸에 힘을 풀었다.
잇새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윽…….”
뱃속이 이상하게 꿀렁거리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그러면서도 나는 선배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릴 무렵 입술이 떨어지고 맞닿은 온기가 사라졌다.
천천히 눈을 뜨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방금까지의 행적과는 다르게 순진하고 멍한 표정이었다. 누가 보면 내가 저를 희롱한 줄 알겠네.
나는 또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또 당했다.
* * *
기숙사에 돌아오니 에코와 맬러리가 방에 와 있었다.
실실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본 에코가 말했다.
“오, 끝내주는 데이트를 했나 본데.”
“키스했어?”
앞뒤 다 자르고 물어 오는 맬러리에 나는 코를 쓱 닦으며 흐뭇한 표정을 했다.
“너희들의 수준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키스는 죽여줬지.”
“얼른 말해 봐, 얼른!”
“알아서 뭐 하게? 내 애인이야.”
내가 거만하게 눈을 깜빡이며 대답하자 친구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차게 식었다.
“야, 그동안 우리가 너 징징거리는 걸 얼마나 많이 받아 줬는데 이려면 섭섭하지.”
에코가 지적하고 나섰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는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냥 혀가 막…… 아, 몰라!”
불과 한 시간 전의 상황을 떠올리던 내가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 쥔 채 고개를 휘휘 젓자 에코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혀?”
“……그 키스가 진짜로 그 키스였단 말이야?”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맬러리가 어쩐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와, 그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범생이같이 생겨서는.”
노아 선배가 버드 키스도 얼굴 붉히면서 겨우 할 것처럼 생기긴 했지.
나는 헛기침을 하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선배가 반전 매력이 좀 있어.”
“아, 정말 듣기 싫다.”
오만상을 쓴 친구들이 눈꼴이 시리다며 너도나도 헛구역질을 해 댔다.
“나 갈래. 더 있으면 쟤가 계속 저 얘기 할 것 같아.”
“나도.”
에코와 맬러리는 도망치듯 방을 떠났고, 나는 한층 넓어진 공간에 쾌재를 부르며 책상 앞에 앉았다.
“아, 아빠한테 편지 보내야지.”
혼잣말을 하며 편지지와 펜을 꺼낸 나는 실실 웃는 얼굴로 아빠에게 보낼 편지를 적어 내려갔다.
애인이 생겼다고 하면 아빠뿐만 아니라 리타부터 제온 경까지, 저택의 모두가 기절초풍하겠지만 이걸 언제까지나 숨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또 얼굴 보고 내 입으로 직접 말하자니 좀 쑥스럽단 말이지.
그리고 만약 노아 선배랑 내가 결, 결혼까지 하게 된다면…….
“으흥.”
주책이야, 정말.
나는 입술 사이로 비식비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펜을 고쳐 쥐었다.
펜촉이 종이 표면 위를 긁어 댔다. 문장 몇 줄로 간단한 안부 인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치고서 본론을 종이 위에 끄적였다.
아빠, 나 애인 생겼어.
아마 평소라면 더 걸렸을 답장이 영지로 보낸 지 고작 일주일 만에 도착했다.
우리 가문의 인장이 찍힌 봉투를 뜯어 편지지를 펼쳐 든 나는 당황스러움에 침을 꿀꺽 삼켰다.
꼼꼼한 아빠답지 않게 맞춤법이 틀린 것도 여럿 있었고 글씨체가 조금 떨려 있었다. 그뿐인가, 급하게 썼는지 잉크는 군데군데 번져 있었다.
세상에케이트그게대체누구니아빠가아는사람이니어느가문의누구니어떤사람이니이름이뭐니언제부터사귄거니.
“……”
띄어쓰기 따위는 과감히 저 버린 편지를 읽던 나는 눈을 비볐다. 하도 따닥따닥 붙어 있는 글자 때문에 눈이 아팠다.
읽기로는 리타도 제온 경도 집사도 너무 놀란 상태라 지금 며칠째 저택이 삐걱대며 통 굴러가질 않는단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정말 유난스러운 반응에 웃음이 나왔다. 고작 내가 연애하는 거 가지고 이게 무슨 호들갑이람.
나는 다시 새 편지지를 꺼내 아빠에게 보낼 답장을 적었다.
아빠가 아는 사람이야. 지난번에 우리 영지 왔던 선배. 착하고 예쁘고 사려 깊은 사람이야.
이걸 받은 아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나도 빤히 보였다.
“역시 오늘도 실실 웃고 계시군. 연애하니까 좋냐?”
편지지를 고이 접고 있는데 방문을 열고 들어온 도라가 내 얼굴을 보더니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응, 엄청 좋아.”
“으, 커플…… 야, 그런데 언제부터 그렇게 콩깍지가 씐 거야?”
“아, 그거에 대해선 할 말이 많지.”
반쯤 시비조인 질문에 나는 편지봉투를 봉하며 씩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모르지만 이제 사귀는 사이이니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털어놓을 수 있었다. 어차피 선배는 내 거잖아.
“학기 초에 내가 도서관에서 책장에 책을 집어넣으려고 하고 있었거든.”
나는 파릇파릇한 신입생이었던 그때를 떠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어디가 제자리인지 모르겠는 거야. 그렇게 낑낑대고 있는데, 갑자기 선배가 손을 뻗어서…….”
내가 말끝을 늘리자 도라가 기대 어린 눈으로 물었다.
“오, 도와줬어?”
“아니, 자기 책만 꺼내 가더라고.”
“…….”
“그런데 햇빛에 선배가 막 반짝이는데, 그게 너무 예뻐서.”
나는 열기 어린 숨을 토해 내며 눈썹을 내려뜨렸다. 이런 사이가 되면서 더 자주 보게 된 얼굴이지만 볼 때마다 감탄이 나왔다. 사람들은 전부 노아 선배랑 같은 인간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야, 결국 얼굴 때문이라는 거 아냐.”
내 주접에 도라가 조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그건 계기일 뿐이야.”
나중에 좋은 사람인 걸 알고 더 빠져들었지.
내가 손가락을 허공에 휘휘 젓다 말고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사랑에 빠질 만한 얼굴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