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10)

* * *

“야, 야. 너 수프 다 흐른다.”

“아.”

멍한 얼굴로 정신을 팔고 있던 나는 도라의 지적에 스푼을 내려놓고 흐른 수프를 닦았다.

“프흡.”

그러던 중 문득 웃음이 나와 입가를 가리고 미소를 지었다.

“왜 저래?”

에코가 나른하고 몽롱하게 풀린 내 얼굴을 보더니 쟤 미쳤냐며 허공에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이해해라. 쟤 연애하잖아.”

“뭐?!”

체념한 얼굴의 도라가 말하자 맬러리가 눈을 부릅뜨고 몸을 이쪽으로 쭉 뺐다.

“여태 노아 선배 것이었던 네 마음을 훔친 게 도대체 누구니?”

“본인.”

“뭐?”

“흐흥.”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 그녀를 무시한 나는 접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음을 흘렸다.

아카데미 식당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는데, 도라가 심드렁한 얼굴로 멀리서 보이는 노아 선배의 모습을 가리켰다.

“어, 마침 저기 온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놀란 얼굴을 한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곤 생글생글 웃으며 노아 선배에게 다가갔다.

“선배.”

내가 선배를 부르자 선배가 웃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케이트.”

이제 자연스럽게 내 애칭도 부르는 선배였다.

나는 살포시 선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포근하고 기분 좋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재스민 향이 풍기는 너른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드니 황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말간 얼굴에 미미한 홍조가 돌며 태양빛을 머금은 눈이 휘어지는 모양새가 참 예뻤다.

어차피 며칠 뒤면 동아리에서 본다는 걸 아는데도, 지금 당장 얼굴을 보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저기, 선배.”

마침 할 말이 있었는데 잘 되었다.

잠시 손가락을 꼬물거리던 내가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주말에 시간 되세요?”

아직 글로리아 선배가 빌려준 책들을 다 읽지 못했지만, 뭐 어때. 내가 함께 있고 싶은데.

이전과 달리 선배가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미 머릿속으로 데이트 계획도 다 세워 둔 후였다.

“어디서 만날까?”

역시 내 기대대로, 노아 선배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살풋 웃었다.

나는 그에 답하듯 활짝 웃어 보였다.

* * *

나름 사귀고 나서 처음으로 하는 데이트였으니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 옷장을 헤집는 나 때문에 잠이 깬 도라가 침대에 앉아 피곤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나 어때?”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던 내가 묻자 도라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위협적인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장난해? 그 색 조합은 뭐야?”

내 차림에 기함하며 옷장을 뒤져 노란색 드레스를 끄집어낸 도라가 액세서리와 가방까지 던져 주며 혀를 쯧쯧 찼다.

“어휴, 진짜. 너는 나 없으면 어떡할래?”

“우와, 예쁘다.”

시간을 조금 남겨 두고 일찍 준비하길 잘했다.

나는 도라에게 고마움의 하트를 날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사랑한다, 친구야.

“고마워, 나 간다.”

“그래, 그래. 나중에 꼭 한턱 사고.”

나는 손가방을 휘휘 돌리며 날래게 교문까지 달려갔다.

내가 도도도 달려오자 교문 앞에 서 있던 노아 선배가 두 눈을 곱게 접으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고운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예쁜 꽃다발이었다.

“주고 싶었어.”

“뭐 이런 걸…….”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꽃다발에 얼굴을 묻었다가, 꽃가루가 코에 들어가 재채기가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크흠, 큼, 감사해요.”

꽃다발을 한 손에 소중히 쥔 나는 간지러운 코를 문지르며 배시시 웃었다.

기숙사 책상 위에 놔둬야지.

우리가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시내 인근의 공원이었다.

워낙 유명한 데이트 장소라 천지에 널린 연인들 때문에 지금까지는 와 본 적 없지만, 언젠가 연인이 생긴다면 꼭 같이 와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여름이라 온갖 꽃이 만발해 있어 엄청 예뻤다. 마침 오늘 하늘이 엄청 맑기도 했고.

알록달록한 꽃잎들 사이로 다정한 연인들의 모습이 종종 보였다.

나는 샐샐 웃으며 선배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선배는 몸을 움찔 떨면서도 내 팔을 꼭 잡았다. 귀여워서 죽을 것 같았다.

“……!”

만발한 장미꽃 화단 앞에 서 있는 선배를 배경으로 산들바람에 꽃잎이 휘날리는데, 그게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집 벽에 걸어 놓고 소장하고 싶었다.

은발이 여름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은 말 그대로 눈이 부셨다.

“꽃들 사이에 꽃이 있어서 못 알아볼 것 같네요.”

나는 생글 웃으며 들고 있던 꽃다발에서 뽑아낸 꽃을 선배의 머리카락에 꽂았다. 사실 글로리아 선배가 빌려준 책에서 본 대사였다.

뿌듯하게 웃는 얼굴로 선배를 바라보다 한층 더 아리따워진 모습에 아찔해진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와, 진짜 못 찾겠다. 이러다 두고 가면 어째.

이 사람이 내 거라니. 내 애인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못 보는 게 아까워서 도로 눈을 떴다.

발랑발랑 뛰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는데, 선배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얌전하게 귀 뒤로 넘기며 수줍은 미소를 짓자 금세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미친, 미친! 미친…… 미친 거 아냐?

와, 나 이거…… 안 되겠네.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을 느끼며 끊임없이 마른세수를 하고 있는데, 선배가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로 내 머리에 꽃을 가져다 꽂았다.

“예쁘다.”

자기소개를 하는 건가?

선배의 미모에 넋을 놓고 있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예쁜 건 선배고요.”

“아하하.”

그러자 선배는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파란 여름 하늘처럼 청명하고 맑은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는 그걸 홀린 듯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웃어? 웃어? 웃어?

지금 나랑 당장 키스해 줄 것도 아니면서 뭐 그렇게 밝게 웃어?

공공장소고 뭐고 그냥 확 키스해 버릴라.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내 본능을 붙들고 있는데, 물 좀 맞고 정신 차리라는 뜻인지 갑자기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피부에 와 닿는 차가운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비?”

* * *

불과 몇 분 지나자마자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다. 빠르게 실내로 몸을 피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쫄딱 젖을 뻔했다.

왜 요즘 단둘이 있기만 하면 비가 오는 것 같지?

나는 카페 창밖을 내다보며 머리를 파바박 헤집었다.

“여기 조금 있어야겠네요.”

“그러게.”

그렇게 우리는 카페에 고립되다시피 갇혀 있었다.

그래도 같이 있으니까 좋다.

서리가 낀 유리창 너머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몽롱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텔레포트 써 볼까?”

계속 축 쳐져 있던 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선배가 묻자, 나는 얼굴을 굳히고 답했다.

“아니요. 여기 조금 있죠.”

내가 보내 줄 것 같아? 최대한 오래 있을 거야.

내 대답에 입을 다물고 조용히 찻잔을 기울이던 노아 선배가 말했다.

“그래도 같이 있으니까 좋은 것 같아.”

“그죠?”

지난번에는 도와준다는 핑계 아닌 핑계가 따랐지만 오늘은 무려 진짜 데이트라고.

나는 행복하게 생글생글 웃다가 일순간 표정을 굳혔다.

“……!”

노아 선배를 힐끗거리며 얼굴을 붉히던 갈색 머리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에 나는 두 눈을 홉뜨고 그 여자를 빤히 노려보았다. 어림도 없지, 물러가라.

선배만 보느라 옆에 내가 있는 건 몰랐는지 그녀는 엉거주춤하더니 머쓱하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긴 우리 선배가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를 만큼 예쁘긴 해.

잘 했어요, 예쁜 언니. 다른 좋은 사람 만나세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 나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노아 선배가 의아한 낯으로 물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되고 나서는 네가 많이 웃어서 좋아.”

테이블 위로 내 손을 꼭 잡은 노아 선배가 청아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많이, 웃고 다닐게요.”

수국처럼 단정하고 청초한 그 모습에 나는 무척 진지한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내 앞에서만 웃어도 괜찮아.”

노아 선배가 조용히 내뱉은 말에 나는 숨을 멈췄다.

이, 이건, 그동안 숱하게 읽었던 소설들에 빠짐없이 나오는 질투? 질투 맞지?

그 많은 로맨스 소설들에 나온 자료들로 보아 아무래도 질투가 맞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드레스 자락을 꼭 쥐었다. 피가 안 통해 손가락이 하얗게 변했다.

야, 케이트 너 성공했다. 선배가 질투도 다 해 주고.

“그럴게요.”

내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찻잔은 비었고, 창문 유리를 두드리던 빗소리도 잦아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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