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10)

* * *

다음 날 나는 글로리아 선배를 만나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내 말을 들은 선배는 앉은 자리에서 ‘으학학학학’ 하고 웃다가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을 뒹굴었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좀 일어나세요.”

격한 반응이 부끄러웠던 나는 턱을 괴고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으하하, 아, 배 아파.”

글로리아 선배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의자 등받이에 의지해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커플이시겠다? 키스까지 하셨겠다?”

“네에, 노아 선배 입술은 참 부드러웠어요.”

몽롱해진 얼굴의 내가 두 손을 꼭 모은 채 그렇게 대답하자 글로리아 선배가 오만상을 쓰고 몸을 뒤로 쭉 뺐다.

“미친…… 그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젤리같이 말랑하면서도 보습이 잘 되어 있어서 촉감이 무슨 실크 같은데, 저보다도 부드럽고……. 혹시 관리를 따로 하나?”

내가 신경도 쓰지 않고 연신 나불거리자 선배가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어땠는데?”

“죽여주던데요,”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와, 정말 쩔어 줬지. 몸이 막 찌릿찌릿했고. 아직도 어제를 떠올리면 호흡이 조금 가빠져 온다.

“노아 선배는……엄청 잘 하더라고요.”

“로판 남준데 당연히 잘해야지.”

글로리아 선배가 턱을 괴고 낮게 구시렁거렸다. 이내 나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선배가 제가 처음이 아니면 어떡하죠.”

“걔 모태 솔로였다.”

“네? 그럼 어떻게 그렇게 잘해요?”

“로판 남주…… 타고난 건가 보지.”

“와, 이 요망한.”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 깜찍 발칙한 인간.

그 얼굴에 처음? 처음인데 그렇게 막, 어후? 어쩜…… 어쩜 사람이 그렇지?

“저도 키스 잘하고 싶어요.”

“어이구.”

내가 쥐어짜듯 말하자 글로리아 선배가 놀란 듯 눈알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으응, 네가 좋다니 나도 좋긴 한데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니?”

“네에…….”

“내 말 듣고 있긴 해?”

솔직히 말해서 잘 안 들렸다.

나는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 연신 헤실헤실 웃었다.

“와, 이제 남자 친구 생겼다고 나 상대도 안 해 주는 거야?”

글로리아 선배가 푸념하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네에.”

결국 내게서 제대로 된 대답을 받아내는 걸 포기한 선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음, 키스는 나도 경험이 없어서 조언은 어렵겠다.”

“네? 경험이 없다고요?”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홱 들었다. 글로리아 선배가 두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응. 왜?”

“아뇨, 선배는 예쁘니까 당연히 해본 적 있을 줄 알았죠, 전.”

“오……듣기 좋은 말이네.”

글로리아 선배가 제 백금발을 쓸어 올리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예쁜 건 나도 알아.”

“예에.”

“경험은 없는 대신 내가 자료는 많지.”

이따 잠깐 내 방에 가자.

글로리아 선배가 제 가슴을 두드리며 윙크를 했다.

이번엔 또 뭐지. 어쩐지 조금 불안해져 왔다.

“……뭐예요 이게?”

“뭐긴 뭐야, 참고 자료지.”

글로리아 선배는 기어이 나를 자기 방까지 데리고 왔고, 나는 아연한 얼굴로 선배의 방에 산처럼 쌓인 로맨스 소설을 바라보았다.

“선배 로맨스 소설 좋아했어요?”

“응. 재밌잖아.”

뭔가 의외였다.

검 휘두르는 것만 좋아할 것 같았는데 은근 감수성도 있는 것 같네. 하긴 이 선배도 나랑 같은 독서 토론부지.

“이, 이게…… 이건 또 어떻게 구하셨어요?”

책장 한구석에서 새빨간 색 표지의 성인 소설을 발견한 내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에 글로리아 선배가 자랑스레 가슴을 쭉 폈다.

“다 방법이 있지.”

“무슨…….”

나는 얼굴을 뒤로 쭉 빼며 집게손가락으로 소설을 옆으로 밀어냈다.

“선배 룸메이트는 뭐라 안 하세요?”

“응, 걘 적응했어.”

마음속으로 그 룸메이트 분을 응원하면서, 나는 제일 멀쩡해 보이는 소설을 집어 들었다.

표지를 보니 대충 금발의 황제가 남주인공 같아 보였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응?”

“평민과 황제의 결혼이라니, 이건 신분제의 붕괴라고요.”

나는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며 코웃음을 쳤다.

“귀족들이 들고일어났겠는데요.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 없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글로리아 선배가 한껏 웃음을 참고 있었다.

“뭐, 뭐예요.”

“너, 재밌구나?”

“……!”

나는 빨개진 얼굴로 후다닥 책을 덮었다.

“너나 플로라나 너무 재미없고 딱딱한 독서만 해.”

글로리아 선배가 킬킬 웃으며 책 한 무더기를 더 가지고 왔다.

“역사책이나 순수 문학만 읽지 말고, 가끔은 이런 걸로 머리도 비워 줘야 한다고.”

결국 선배에게 붙들려 열 권이 넘는 로맨스 소설을 탐독한 걸로도 모자라 소설을 한가득 빌려 오게 되었다.

로맨스 소설에서 연애 조언을 구하려 하다니, 선배도 참.

“그 책도 같이 끼워 줄 걸 그랬나?”

“됐거든요!”

빨개진 얼굴로 소리치는데 노아 선배가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반가움에 손을 흔들려던 내가 멈칫했다.

그런데 여기서 소리치기는 좀 그렇지.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갈팡질팡하는 나를 본 글로리아 선배가 혀를 쯧쯧 차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야, 노아스!”

글로리아 선배의 목소리에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노아 선배의 눈이 반짝였다. 몸 뒤에서 꼬리가 살랑이는 것 같았다.

이리 달라고 손짓하는 글로리아 선배에게 들고 있던 책들을 넘긴 나는 들뜬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노아 선배가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달려와 내 손을 꼭 잡았다. 맞닿은 손이 따뜻해 기분이 좋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햇살처럼 따스한 빛을 담은 눈이 곱게 휘어졌다.

“안녕.”

나도 다른 쪽 손을 맞잡으며 웃는 얼굴로 답했다.

“안녕하세요.”

우리 사이에 따뜻한 핑크빛 기류가 흐르고 있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글로리아 선배가 끼어들었다.

“야, 너희 사귄다며?”

순식간에 싸늘해진 표정의 노아 선배가 고개를 돌렸다.

글로리아 선배가 허공에 주먹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일단 축하하고, 케이트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네 눈에서는 피눈물 나는 거다. 알았냐?”

뭔가 말이 연결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내가 글로리아 선배를 올려다보자 선배는 세상 친절하게 웃어 보였다.

“둘이 같이 있었어?”

“네에, 방에 잠깐…….”

나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웃었다.

책을 한 무더기 들고 있는 글로리아 선배를 향해 노아 선배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뭘 들고 있는 거야?”

“표정 뭐냐?”

글로리아 선배가 빈정이 상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는 노아 선배의 팔을 꼭 잡으며 웃었다.

“제가 빌린 거예요.”

“아, 그래?”

“와, 태도 달라지는 거 봐.”

내 말을 들은 노아 선배가 반색하자 글로리아 선배가 얼굴을 구기곤 내게 책을 넘겨주었다.

“기숙사 가? 내가 들어줄게.”

“감사합니다.”

노아 선배가 책들을 넘겨받는 동안 나는 선배가 책 표지를 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걸 바라보며 입가를 씰룩거리던 글로리아 선배가 들고 있던 다른 책을 건네주며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134쪽, 267쪽.”

“네?”

“잘 가!”

그녀가 웬일로 우리 둘을 향해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뭐지?

조금 걸어가다 말고 호기심이 들어 134쪽을 펼쳤다가 1초만에 도로 덮었다.

이, 이게 뭐야.

펼친 페이지에는 그렇고 그런 묘사로도 모자라 낯간지러운 삽화까지 그려져 있었다.

내 옆에서 걷던 노아 선배가 멈칫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이런 거 좋아해?”

나는 수치심에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아뇨!”

기숙사에 도착해 내게 책을 넘겨주던 노아 선배가 표지를 보곤 멈칫했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안녕.”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의 노아 선배가 인사를 건넸다.

나는 닫힌 방문에 머리를 박으며 이를 박박 갈았다.

두고 봐, 복수할 거야.

“미쳤나 봐, 미쳤나 봐.”

나는 연신 혀를 내두르고 중얼거리며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겼다.

물론 내가 알 건 다 알긴 하지만 아직 성년식도 안 치른 미성년자란 말이다.

게다가 이런 소설에서 연애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을 얻긴 어렵지.

노아 선배를 닮은 청초한 여주인공이 그려진 삽화가 나오는 책을 덮은 내가 도로 침대에 누웠다.

“음…….”

돌이켜 보면 인생 최대 흑역사로 남은 내 처음이자 마지막 연애는 열다섯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연애라고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한심한 짓이었지만 말이다. 으, 그 찌질한 새끼. 아르한이 말렸을 때 들었어야 했는데.

연애는 뭐 어떻게 하는 거지?

아마 노아 선배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선배도 내가 처음이랬으니.

그런데 새삼 그 얼굴로 처음이라니,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참…….

“우흐흣.”

나는 괴상한 웃음을 흘리며 몸을 배배 꼬았다.

“쯧쯔.”

아까부터 도라가 나를 향해 혀를 쯧쯧 차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내 알 바인가. 나는 마냥 기분이 좋아 실실 쪼개며 침대를 굴러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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