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내 말을 들은 노아 선배가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그에 나는 와락 얼굴을 구기며 되물었다. 기껏 자신감을 가지고 고백했는데 반응이 영 밍밍해서 조금 자존심이 상한 탓이었다.
“뭐야, 설마 싫어요?”
“아니!”
선배는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부끄러운지 하얀 피부가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이런 게 처음이라 잘 몰라.”
머뭇거리던 노아 선배가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것도 네가 고백을 하고서야 깨달았어.”
맞닿은 손과 함께 늘 매끄럽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난 네가 처음이라 많이 서툴고, 그래서 어쩌면 널 실망시킬지도 모르겠지만…….”
노아 선배가 내 손을 꼭 쥐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보드라운 입술이 피부에 꾹 눌렸다. 이상야릇한 감각이었다.
황금색 눈이 애틋함을 담고 나를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많이 좋아해.”
“…….”
“우리 사귀자.”
장장 2년에 걸친 내 짝사랑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나는 복숭아처럼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선배의 얼굴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행복했다.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이 사람이 이젠 내 연인이라니. 혹시 꿈인가?
가만히 내 뺨을 꼬집어 보던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선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저 좋아하신다고요?”
제대로 잘 들었지만 한 번 더 듣고 싶었다.
선배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며 내 손을 더 꼭 잡았다.
“사랑스럽고 귀엽고 안아 주고 싶다고 느끼는 게 좋아하는 감정이 맞다면.”
그에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세상에, 우리 아빠도 내가 열세 살이 지난 후로 그런 말 안 하는데!
부끄러우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아 멍청하게 헤벌레 웃으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는데, 불현듯 인중에서 뜨끈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손에 묻은 붉은 핏자국을 본 내가 두 눈을 부릅떴다.
……코피!
“……!”
붉은 피를 본 선배가 혼비백산하며 선반을 뒤져 소독용 천을 한가득 찾아냈다. 천으로 코를 막은 나는 창피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아? 요즘 많이 피곤했어?”
선배가 내 턱을 조심스레 쥐고 끌어올렸다. 내 수치심은 배가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코피?
천으로 코를 훔치다 말고 의문이 든 내가 선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내가 코피가 터진 이유를 납득했다.
덜 마른 채 축 가라앉은 은색 머리카락에 맺혀 있던 물방울 하나가 뺨을 타고 내려와 턱에서 떨어졌다. 회색 교복 바지에 얼룩이 남았다.
아찔한 모습이었다.
“크흠.”
나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게 코피까지 터질 일인가. 이럴 수가, 내가 이렇게 나약했다니.
몇 분 후 코피는 자연스레 멈췄지만, 창피함은 별개였다. 고백하고 사귀기로 한 뒤 상대가 너무 예뻐서 코피가 터지다니, 누가 들으면 웃겨서 넘어갈 만한 일이었다. 내 이야기만 아니었으면 나도 웃었을 거다.
“……그럼 이제 좋아한다고 해도 되는 거예요?”
내가 침묵을 깨고 그렇게 묻자 선배는 내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노아 선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선배, 좋아해요.”
“나도.”
“좋아해요.”
나는 가쁜 숨을 한번 고르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 좋아해요.”
이 포근하고 따뜻한 품에 안겨 있자니 그동안 숨겨 왔던 말들이 흘러넘쳐 목이 메었다.
“좋아, 해요.”
“나도.”
짧게 대답한 선배가 내 머리카락에 입술을 꾹 눌렀다.
감격에 차 셔츠로 감싸인 몸을 꽉 끌어안는 순간.
뭐, 뭐지.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는 편이어도, 분위기가 급작스레 묘해지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저기.”
여전히 몸을 끌어안은 채 선배를 빤히 올려다보자, 나를 불러 놓고 잠시 망설이던 선배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입 맞춰도 될까.”
“!”
키, 키스? 키스?
안경 벗은 맨얼굴로 그런 소리까지 하니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입만 뻐끔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내 얼굴을 쥔 선배가 애끓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싫으면 밀어내도 괜찮아.”
설마 제가 거절할 리가 없잖아요.
삐걱거리는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대답하려는데 벌써 입술이 닿아 왔다.
나는 코로 숨을 훅 들이켰다.
만약 키스를 하게 된다면 내가 먼저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보다 진도가 왜 이렇게 빠르지?
하지만 그런 의문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맞닿은 입술은 부드럽고 말랑하고 따뜻했다. 선배 입술은 립스틱이라도 바른 것처럼 늘 은은하게 분홍빛을 띠고 있어서 촉감도 말랑말랑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맞았다.
물컹한 살덩이가 입술을 핥았다. 내가 금방이라도 밀어낼까 봐 걱정되는지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잘해?
나야 이게 첫 키스였으니 잘한다 못한다 판단할 재간은 없지만 객관적으로 기분이 좋았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선배는 이게 처음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 미간을 좁히고 있는데 정중한 손길이 내 뺨을 감쌌다.
서로의 열띤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쩐지 숨이 막혀 왔지만 그만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선배의 옷깃을 구겨질 정도로 꽉 쥐고 끌어당겼다.
“흐으.”
세상에, 저 소리 내가 낸 거야?
내가 경악하며 미간을 찡그리는 동시에 선배의 몸도 잠시 굳었다.
이윽고 미지근한 온기를 남기며 입술이 떨어졌다.
왜, 왜.
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입 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선배는 내 얼굴을 살짝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신중한 금색 눈동자가 나를 면밀히 살폈다.
아무래도 내가 아파서 신음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말하려니까 조금 창피한데 더 하고 싶었다.
“저기, 선배.”
“응?”
나는 나를 살펴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선배에게 침착한 투로 말했다.
“전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리고 손을 뻗어 선배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선배의 뺨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뭐, 나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눈 감아요.”
노아 선배가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나도 눈을 감았다.
분명 먼저 입 맞춘 건 난데, 막상 입술이 닿으니 자꾸 버벅거렸다. 나는 선배의 옷깃을 더욱 세게 꼭 쥐고 벌벌 떨었다.
혀, 혀가 들어와? 나 어떻게 해야 돼.
당혹스러움에 속눈썹을 파르르 떨고 있는데 문득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아, 맞다. 혀로 숫자를 1부터 그리랬어.
나는 뻣뻣하게 굳어 있던 혀를 움직여 숫자 1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게 맞나 싶기도 했지만 그만두기엔 너무 늦었다.
온몸을 덜덜 떨며 혀끝으로 9를 그릴 무렵 입술이 떨어졌다.
“……하.”
나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눈알을 도륵 굴려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서로의 숨결이 얼굴을 간지럽힐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새삼스럽게 또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선배랑 키스했다.
……내가? 진짜로?
온몸에 열이라도 난 것처럼 뜨끈뜨끈했다. 이러다 정말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아, 안 돼. 버텨, 버텨.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사귀기로 한 지 아직 한 시간도 안 지났다.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애써 태연한 척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훅 내려가는 게 아닌가.
다리에 힘이 풀린 거였다.
“으억.”
나는 선배 허리춤에 매달려 무력한 신음 소리를 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내 힘으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팔을 몇 번씩이나 휘적거린 끝에 간신히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키스 두 번 했다고 주저앉다니. 아, 쪽팔려.
한번쯤은 웃겨서 웃을 법도 한데 노아 선배는 고맙게도 웃지 않았고, 나를 끌어당겨 부축까지 해 주었다. 내 치마에 묻은 먼지까지 털어 주고 내 허리를 받친 채 걸음을 옮겼다.
“이제 들어가자. 옷 갈아입어야지, 감기 걸리겠다.”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선배가 나를 부축한 채 양호실을 나서자 내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나를 붙잡은 몸이 움찔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귀여워서 한마디 더 하려 선배 쪽으로 돌렸던 고개를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에 예쁜 홍조가 떠 있었다. 언제 다시 썼는지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별빛 눈동자가 거세게 떨렸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나를 눈에 담는 것이 보였다.
아, 진짜. 왜 저렇게 예쁘지. 선배가 나랑 같은 인간은 맞을까?
방금까지도 침대 위에서 키스까지 했던 사이답지 않게, 우리는 눈만 마주쳐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잠깐, 침대 위라니까 어감이 조금 이상한데 침대에 앉아서 했다는 얘기다. 양호실 의자는 너무 낮단 말이다.
결국 복도를 지나 기숙사까지 가는 길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어색하고 설레는 침묵 속에 오직 빗소리만이 귓가를 울렸다.
“너 왔…… 어어? 어?”
내 노크 소리에 편하게 문을 열었다가, 노아 선배 품에 안긴 나를 본 도라가 뒷걸음질 쳤다.
“흐억.”
나는 간신히 벽을 짚고 걸었다. 나를 계속 부축하고 있던 선배가 다정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가 볼게. 나중에 보자.”
“네에. 안녕히 가세요.”
애정이 뚝뚝 흘러넘치는 우리의 대화를 듣던 도라의 얼굴이 해괴하게 일그러졌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냐? 설명 부탁한다.
그녀의 흔들리는 남색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고 있는데, 선배가 이쪽으로 몸을 기울이곤 도라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런데…… 아까 혀로 뭘 쓴 거야?”
“……!”
나는 빨개진 얼굴로 문을 쾅 닫곤 방바닥에 엎어졌다.
죽자. 그냥 죽자.
나는 힘 풀린 다리를 끌고 바닥을 질질 기어가 침대에 몸을 늘어뜨렸다.
도라는 덜 마른 내 머리카락을 보고 코를 막았다.
“윽, 물비린내. 너 왜 이렇게 젖었어. 밖에 비 오는데 뭐 했어?”
“으응.”
나는 몽롱하게 웃으며 침대 기둥을 꼭 잡았다.
“너 피……!”
어디선가 느껴지는 피비린내에 코를 킁킁거리던 도라가 식겁하며 뒷걸음질 치자 나는 핏자국이 묻은 셔츠를 내려다보며 머쓱한 얼굴을 했다.
“아, 이건…… 선배 때문에.”
“……선배가 너 때렸어?”
“아니!”
강하게 부정한 나는 쪽팔림을 감수하고 상황을 설명했다. 양호실에서 이러쿵저러쿵한 이야기를 다 들은 도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 둘이 사귄다고? 아니, 키스까지 했다고?”
“으응…….”
“와, 얘 좀 봐라.”
도라가 충격 받은 얼굴로 입을 틀어막고 중얼거렸다.
“차인 거 아니었어?”
“으음, 알고 보니까 내가 오해한 거더라고.”
나는 행복하게 웃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헤헤.”
“으휴, 축하한다. 아주 입이 귀에 걸렸구먼.”
내가 이불로 몸을 둘둘 감고 침대를 뒹굴자 도라가 인상을 팍 쓰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야, 씻고 누워!”
도라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실실 웃음을 흘렸다.
꼬집은 볼이 아픈 걸 보면 꿈은 아닌데, 왜 이렇게 현실감이 없는지.
“으흐흥.”
나는 아직도 보드라운 촉감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입술을 매만졌다.
“선배랑 키스했어.”
쾅!
“깜짝이야!”
내가 주먹으로 벽을 치자 그 소리에 놀란 도라가 소리쳤다.
“아파…….”
“당연히 아프지.”
“꿈이 아니야!”
“얘가 실성했나.”
“흐흐흥.”
나는 베개에 마구 주먹질을 하며 이불을 뻥뻥 찼다.
자꾸만 음흉한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