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자신 있게 교실을 나선 나는 이윽고 크나큰 난관에 봉착했다.
……노아 선배 어디 있지?
평소에는 잘만 마주치는데 꼭 찾을 때는 없단 말이지.
아, 고백해야 되는데.
선배를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내가 불안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침부터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더니, 조금 전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려 온통 꿉꿉한 공기가 허공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코끝에 감도는 물비린내에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선배를 찾아 교실을 전전하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 혹시.
짐작 가는 곳이 하나 있었다.
나는 곧장 몸을 돌려 후원으로 향했다.
“윽.”
후원 앞 복도는 야외나 다름없어서 빗물이 얼굴에 튀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거센 빗줄기 너머로 노아 선배가 후원 연못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세상에, 저기서 뭐 하는 거야. 비가 이렇게 오는데.
“……!”
괜히 연못에 얽힌 괴담이 생각나 기겁한 나는 겉옷을 벗어 머리에 쓰고는 선배에게로 달려갔다. 여름이라 얇은 겉옷은 금세 젖어 셔츠까지 축축해졌다.
“여기서 뭐 하세요? 다 젖었잖아요.”
“아.”
내가 머리 위로 겉옷을 씌워 주며 묻자 노아 선배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은색 머리카락이 온통 젖어 축 늘어져 있었다.
선배 손에 안겨 있는 홀딱 젖은 털의 고양이가 보였다.
“위험할 것 같아서 옮겨 주려고.”
“아, 그렇구나. 아니, 얼른 들어가요.”
“응.”
두 팔로 고양이를 소중하게 안은 노아 선배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겉옷을 고양이 위로 드리운 채 조심조심 걸었다.
실내로 비를 피하고 나서야 겉옷을 허공에 털었다. 고양이는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야무지게 도도도 달려갔다.
나는 젖은 머리를 흔들며 노아 선배를 흘끔 바라보았다. 꽤 오랫동안. 그런데도 이상하게 계속 이쪽을 안 보길래 아예 적극적으로 눈 맞춤을 시도했다. 이제 더 이상 거리낄 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라?
그런데 노아 선배는 내 눈을 피했다.
이제 눈도 마주치기 싫다 이거야? 왜 이러는데, 사람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나는 눈썹을 찡그리고 노아 선배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러자 선배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서 뒷걸음질 쳤다.
이거 봐라?
빈정이 상한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선배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옷이.”
“네?”
“조금.”
내 옷이 뭐.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딱 굳은 채 어색한 침음을 흘렸다.
“아.”
교복 셔츠가 빗물에 젖어 안쪽이 비쳐 보였다.
“!!”
얼굴에 열이 잔뜩 올랐다. 이제 보니 선배의 얼굴도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선배가 아무 말 않고 제 겉옷을 벗어 내게 걸쳐 주었다. 잔뜩 젖어 있었지만 내 것보다는 덜했고, 젖은 셔츠만 입은 채로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 바람에 선배가 입은 셔츠도 안이 훤히 비쳐 보였다.
장관이다……. 이게 아니라, 그, 뭐지?
“일단 어디로 좀 들어가죠.”
슬며시 비치는 살색에 숨이 막혔다.
버벅거리던 내가 삐걱대는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마침 근처에 보건실이 있었다. 저기에 여분 옷이 있으면 좋으련만.
“여기 셔츠가 있네요.”
“괜찮은데, 너 입…….”
“아뇨, 제가 안 괜찮아요. 얼른 입으세요.”
내가 안 괜찮아. 계속 저렇게 있으면 고백이고 뭐고 못할 것 같다고.
나는 얼른 선배에게 서랍장에서 발견한 셔츠를 쥐여 주고 몸을 돌렸다.
조금 작아 보이기는 하지만, 선배가 어깨도 넓고 몸도 좋지만 그렇게 덩치가 막 큰 편은 아니니까.
젖은 셔츠 너머로 슬쩍슬쩍 드러나는 몸매도 탄탄하고, 잔 근육도 조각처럼 유려하긴 하지만 선배는 오히려 조금 슬림한 편이지? 체구도 늘씬하고 말이야.
항상 느끼지만 우락부락하지 않은, 딱 보기 좋은 몸매다. 허리는 낭창하고, 엉덩이는 봉긋하니 예쁘면서 팔뚝은 또 탄탄하고.
나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노아 선배가 벗어 놓은 셔츠를 건조 마법으로 말리는데, 선배가 다 입었다며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으음…….”
조금 끼나?
아무래도 핏이 조금 아슬아슬한 것 같아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갑자기 셔츠 단추가 터져 이쪽으로 총알처럼 날아왔다.
“으악!”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단추를 피했다. 단추는 보건실 침대 기둥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곤란한 표정의 선배를 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거 이래도 되는 건가? 괜찮은 건가?
터진 셔츠 사이로 가슴골이 훤히 보였다. 둥글고 예쁜 것이 그, 참 장관이었지만 참 보기 민망한 모습이었다.
나는 겉옷을 바리바리 주워 들어 선배의 몸을 가렸다.
“저, 저 아무것도 못 봤어요.”
“…….”
“일단 그거라도…… 어이쿠.”
나는 눈을 가린 채 단추를 찾아 바닥을 더듬다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선배는 그사이에 셔츠를 벗어 내게 내밀었다.
“주인 있는 옷이면 어떡하지?”
“괜찮아요. 보건실에 두고 간 걔 잘못이지.”
나는 선배의 걱정 어린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고서 단추 터진 셔츠를 홱 구겨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결국 본전도 못 찾고 노아 선배를 등진 채 건조 마법을 마저 사용했다. 다행히 내 간절함이 통했는지 셔츠는 금방 말랐다.
젖은 내 셔츠는 손으로 물기를 쥐어짜다 말고 힘들어서 바람 마법을 써서 말렸다. 잘 말랐다.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다.
허탈한 얼굴로 서 있는데, 옷을 제대로 챙겨 입은 노아 선배가 닦으려는지 빗빙울이 묻은 안경을 벗었다.
“……!”
안경은 미모 봉인구였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선배의 맨얼굴은 좀…… 아니, 많이 묘했다.
마냥 단정하던 얼굴이 한순간에 색스럽게 보였다.
은은하게 붉은 기를 띤 눈매며 기다란 속눈썹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와, 진짜 사람 홀리게 생겼구나.
자꾸 엄한 생각이 들어 아예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우리는 보건실 침대에 나란히 앉아 침묵을 지켰다. 창밖에서 들리는 빗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눅눅한 공기에 나도 모르게 코끝을 찡그렸다.
“……저, 손 한 번만 잡아 봐도 돼요?”
내가 침묵을 가르고 문득 입을 열자 노아 선배는 당황스러운 듯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더니 잠자코 제 손을 내주었다. 나는 그걸 꽉 잡았다.
예쁘고 큼직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 선배 손이다. 손잡는 건 상상으로만 해 봤는데.
손깍지까지 야무지게 낀 채 얼굴을 붉히던 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선배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동안 속으로 꾹꾹 눌러만 왔던 말이었다. 막 미치게 떨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덤덤하게 말이 나왔다.
내 손을 잡은 손이 움찔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황금색 눈과 시선을 맞추었다.
“어떻게 좋아하냐면요,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뜻이에요. 하루 종일 선배 생각만 할 때도 있어요. 선배도 저를 좋아했으면 좋겠고, 선배 얼굴을 보면 심장이 뛰, 뛰고요…….”
아, 취소. 말을 이어 나갈수록 부끄러움에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심호흡을 한 내가 결론을 꺼내 놓았다.
“선배랑 사귀고 싶어요.”
얼굴에 열이 올라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쭉 좋아하다 지난 학기에 고백을 했고요.”
호흡이 떨려 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손이 벌벌 떨리는 걸 감추려고 선배의 손을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꽉 쥐었다.
“그런데 선배는 절 찼고, 그래 놓고서 갑자기 잘해 주니까…….”
“……잠깐, 뭐라고?”
“예?”
노아 선배는 당황한 얼굴로 되묻더니 연신 입을 뻐끔대다 간신히 말을 꺼냈다.
“난 너 거절한 적 없어.”
“……예?”
나는 쏜살처럼 고개를 돌리고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지, 지금 뭐라고?
그러자 놀란 얼굴의 선배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난 지금까지 우리 사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어.”
“……예?”
선배가 조금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린 채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원래 교제하기 전에는 서로를 알아 가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들 해서. 내 나름대로 호감을 표시해 봤던 건데.”
“……예?”
그러니까 선배는 나를 찬 게 아니고, 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던 거라고? 여느 연인들이 사귀기 전에 그러는 것처럼?
가만, 내가 고백했던 날 선배가 직접적으로 나를 거절했었나?
아니잖아.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렸다.
생각해 보니까 그동안 모든 게 다 플러팅이고 대시였지.
고백했던 그날이 나한테는 끝이었는데, 선배한테는 시작이었구나.
선배가 내 고백을 받아 들였을 거라는 가정을 아예 배제해 버린 탓에, 예언서를 너무 맹신해 버리는 탓에 지금까지 내가 헛짓을 했다는…….
짝.
나는 내 뺨을 스스로 쳤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뭐 하는…….”
“이런 멍청이가.”
내가 작게 읊조리자 선배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잘게 떨렸다.
나는 뺨에서 얼얼하게 느껴지는 통증을 무시한 채 노아 선배를 마주 보았다. 언제나처럼 예쁜 금색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 저랑 사귀어요.”
두 번째 고백이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빗방울이 토독토독 창틀을 두드렸고, 맞닿은 손의 온기는 여전히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