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110)

안 되겠다, 저 앙큼한 인간에게 당장 내 마음을 전해야겠어. 더 있다가는 말라 죽을 것 같아.

운명? 꺼지라 그래. 내가 좋다는데. 두 번째 고백이니까 처음보다는 낫겠지.

그렇게 결심한 게 바로 한 시간 전이건만.

“하아…….”

나는 손에 붉은색 책을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은 보기 싫어서 가방 깊은 구석에 처박아 놨는데 기어이 꺼내서 다시 읽게 됐다.

이 망할 예언서, 이 책이 여전히 내 발목을 잡았다. 아니, 왜…… 도대체 왜? 왜 하필 나야?

여신에 대한 불경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꾸만 나 자신이 불쌍해서 죽을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무슨 세기의 대단한 사랑을 한 것도 아니고, 누구나 한번쯤은 해 볼 법한 뻔하고 찌질한 짝사랑인데. 그게 예언으로 엮인 운명을 이길 수 있을까?

두르고 있던 이불이 구겨지고 말려 나를 완전히 칭칭 감았다.

그래, 이렇게 앓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없어.

붉은 책을 들고 끙끙거리던 나는 결국 책을 내팽개치고 내게 합당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선배!”

교실 문을 쾅 열자 의자에 앉아 있던 글로리아 선배가 놀라 펄쩍 뛰었다. 백금색 머리카락이 기운차게 허공에 휘날렸다.

“깜짝이야!”

놀랐다는 듯 심장을 부여잡은 그녀가 나를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해?”

나는 심호흡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저 노아 선배한테 다시 고백하려고요.”

“아, 응……뭐? 어?”

내 말을 들은 글로리아 선배가 어벙하게 되물었다. 파란 눈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다시 말해 주었다.

“저 고백하려고요.”

“……너 차였다면서?”

“네. 그래서 다시.”

“어……그러니?”

글로리아 선배가 그렇게 말하며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나는 왜 찾아온 거야?”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방금까지도 고백한다고 설쳐 댔으면서 이게 뭐하는 짓이지 싶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그 책이 주는 불안감이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치마를 모아 앉고 우물거렸다.

“……제가 감히 노아 선배를 욕심내도 되는 건지 궁금해져서요. 그 둘은 운명이잖아요.”

“어……글쎄다.”

글로리아 선배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코를 긁었다.

“그래서 나한테 용기를 달라는 거야?”

나는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네. 저를 좀 안심시켜 주세요.”

“아하.”

금세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가 내 어깨를 다독였다.

“예언서는 미래에 닥칠 재앙을 막는 용도로도 쓰였잖아. 운명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거야, 케이트.”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건 그렇지만, 내가 뭐라고 둘 사이를 갈라놓지? 플로라 선배는 나보다 훨씬 더 오래 노아 선배를 알고 있었잖아.

아니, 운명이 바뀌었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그렇지만 운명이 바뀔 만한 변수가 딱히 없었잖아요.”

내가 옛 시대의 예언자들처럼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불현듯 드는 불안감에 내가 항변하듯 말하자 글로리아 선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없어, 차고 넘치는데.”

“뭔데요?”

내 물음에 답하듯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제 가슴을 가리켰다.

“나.”

지금 장난하는 건 아니겠지.

어리벙벙한 얼굴의 내게 글로리아 선배가 말했다.

“생각해 봐, 그 책에서 읽은 것보다 지금의 노아스가 좀 더 물렁하지 않아? 왠지 순하고.”

“어…….”

나는 머리를 굴려 책에서 읽은 내용을 되살려 보았다.

확실히 지금의 노아 선배가 그냥 내성적인 거라면 책 속 노아 선배는 무척이나 차가운 성격이었다. 책 속의 선배는 내게는 거의 관심이 없다시피 했고 플로라 선배만 신경 썼다. 그래서 읽으면서도 약간의 괴리감을 느꼈던 것도 같다.

“그거 다 내가 걜 사람 만들어 놔서 그래. 걔가 어릴 때 얼마나 싸가지 없었는지 알아?”

글로리아 선배가 으스대며 어깨를 씰룩거렸다.

그런가? 그녀가 일찌감치 책의 내용을 비틀어 버려서 운명도 바뀌어 버린 건가?

나는 간절한 얼굴로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진짜요?”

“그렇대도. 원래 원작은 비틀라고 있는 거야.”

선배에게서 긍정의 대답이 나오자 기쁨에 가슴이 뛰었다.

기쁘다. 정말 기쁘다. 사실 부정적인 대답이 나온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노아 선배와 이루어질 수 없다는 통보를 듣는다 하더라도 내가 노아 선배를 포기할 수 있을지 고민이었는데.

정말 기뻤다.

꿈결에 젖은 표정을 하고 있던 내가 문득 든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그럼 왜 지금까지 그걸 안 알려 주신 거예요?”

“에이, 너희 둘이 사귀면 네가 나랑 놀아 주는 시간이 적어지잖아.”

나는 눈을 부릅뜬 채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을 기세로 글로리아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이 선배가 진짜. 원래 조금 가볍고 장난스러운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속에서 열불이 이는 것 같았다.

“뭐라고요?”

“아니, 이전까지는 네가 그럴 생각이 없었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를 않았으면서.

글로리아 선배가 턱을 괴고서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듯 변명했다.

“아, 노아스 그 자식 좋은 일 하자니 좀 억울한데.”

그렇게 무어라 꿍얼거리던 선배가 고개를 돌려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파란 눈동자에 드물게 진지함이 서렸다.

“그냥 네 마음대로 해. 너도 걔가 좋고, 걔도 널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상관없잖아.”

“……정말요?”

“둘이 잘 되면 밥 한번 사고.”

선배가 내 등을 두드리더니 나를 꽉 껴안았다.

“아이고, 우리 애가 벌써 연애를 하네. 내 눈엔 아직 애긴데.”

나를 꼭 끌어안은 글로리아 선배가 과장되게 우는소리를 하며 내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혹시 플로라가 걱정되는 거라면 내가 보증하는데, 둘은 죽어도 그런 사이 아니야.”

내가 아직도 자신 없는 얼굴을 하고 있자 글로리아 선배가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아스는 플로라랑 사귀느니 차라리 나랑 사귈걸.”

“예?”

이게 무슨 소리야.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에 내가 매섭게 고개를 돌리자, 글로리아 선배가 질린 얼굴로 손을 휘적거렸다.

“차 버리면 다시는 안 봐도 되잖아.”

“아…….”

그럼 그렇지.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어휴, 나도 참. 질투에 눈이 멀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나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플로라는 이미 임자가 있잖니.”

요즘 플로라 선배 남자 친구가 안 보이는 것 같긴 하지만, 그렇지.

나는 속으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는, 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그냥 네 마음대로 해요. 설령 네가 걔한테 뽀뽀를 한다 해도 문제될 건 없어.”

물론 합의하에 해야겠지만.

글로리아 선배가 잔뜩 인상을 쓰느라 구겨진 내 미간을 꾹꾹 눌러 폈다.

나는 그녀의 손길을 쳐 내는 대신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런데 노아 선배는 어떤 사람이었는데요?”

글로리아 선배가 노아 선배를 사람 만들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솔직히 지금 보면 그 반대인 것 같은데.

속으로 버릇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으음……복잡하네.”

턱끝을 만지작거리던 글로리아 선배가 인상을 쓴 채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했다.

“그 책에 안 나와 있었니? 아, 그건 외전에 나왔던가.”

“……?”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선배가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그게, 고위 귀족가가 다들 그렇긴 한데 걔네 집안이 우리 집안만큼 유별나게 권위적이야. 노아스가 자기 형 같은 성격이었다면 넌 걔한테 말도 못 붙였을걸.”

이리저리 에둘러 말하던 선배가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모르겠다. 남의 가정사 문제라 내가 여기서 더 말하기는 좀 그러네. 나중에 걔한테 직접 들어. 너라면 말해 줄걸.”

글로리아 선배가 안 어울리게 고심을 하더니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랄까, 그녀답지 않게 굉장히 상식적인 행동이어서 조금 어색했다.

내가 묘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고 있자 글로리아 선배는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꼭 신데렐라 도와주는 요정 대모 된 기분이네, 이거.”

“네?”

“자, 신데렐라. 얼른 네 왕자님한테 가서 좋아한다고 말해 줘.”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은 글로리아 선배가 씩 웃었다.

“그러면 돼.”

온통 모르는 말투성이였지만 이상하게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그에 나는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괜히 목소리가 떨려 왔다. 그동안 억눌러 왔던 무언가가 터져서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저 이제 진짜 아무것도 신경 안 쓸 거예요.”

“그래.”

나는 잠시 망설이다 말고, 고개를 끄덕이는 글로리아 선배에게 말했다.

“저 진짜 가서 고백할 거예요. 어쩌면 노아 선배랑 사귈지도 모르고요. 키스도 할지도 몰라요. 저 진짜 가요?”

“그래.”

이번에도 글로리아 선배는 응원한다는 듯 웃어 주었다.

“……제게 확신을 주셔서 감사해요.”

기운차게 몸을 일으킨 나는 두 손에 주먹을 꼭 쥔 채 글로리아 선배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어, 자, 잠깐만. 너 지금 바로 가게?”

나른하게 턱을 괴고 손을 흔들던 글로리아 선배가 뒤에서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는데, 잘 들리지는 않았다.

“갈게요!”

나는 그를 무시하고 두 손을 흔들며 두 눈에 힘을 빡 주고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교실을 나서 창밖으로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복도를 걸었다.

유난히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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