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10)

노아 선배와 나.

수도의 후작 영식과 지방의 자작 영애.

그 책의 남주인공과 조연.

예언서에 나온 것처럼 내가 선배한테 첫눈에 반해서 티 안 나게 졸졸 쫓아다니긴 했지만, 눈만 마주쳐도 온갖 난리를 다 떨면서 일기에 쓰고 그날 밤 잠 못 이루고 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정말로 나랑 노아 선배랑 잘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선배를 볼 때마다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네가?’ 하고 비웃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눈에도 노아 선배와 플로라 선배의 사이가 워낙 각별해 보이기도 했고. 물론 지금은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플로라 선배가 너무나 잘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여튼 그래서 감히 고백할 생각은 못 하고 이불 덮어쓰고 끙끙 앓기나 했지.

아마 예언서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고백 한 번 못 하고 여태 앓고 있었을 거다.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긴 하지만.

“……누나, 누나?”

내 코앞에 대고 손바닥을 휘적거리던 아르한이 중얼거렸다.

“……누나 또 다른 생각 하지.”

“어? 아, 미안해.”

나는 황급히 양 뺨을 때리며 고개를 휘휘 돌렸다. 기껏 시간 내서 노는 건데 다른 생각에 빠져 버리다니,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았다.

“오늘 조금 피곤하네.”

그렇게 얼버무린 내가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손을 뻗어 내 손에 들린 과자를 가져가 먹은 아르한이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뜨겁다시피 한 시선에 나는 괜히 말을 더듬었다.

“뭐, 뭐야, 왜 그래.”

아르한이 제 눈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누나 눈이 빨간데. 잠 못 잤어?”

“아.”

나는 눈을 부비며 짧게 침음을 흘렸다.

“조금?”

어제 잠을 좀 설치긴 했지.

내가 졸린 듯 하품을 하자 아르한이 제 무릎을 두드리며 윙크를 했다.

“그래? 조금 잘래? 내 무릎 빌려줄 수 있는데.”

“아냐, 됐어.”

나는 짧게 대답하곤 몸에 힘을 뺐다.

기댄 벤치 등받이가 딱딱해서 불편했다.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뒤집혔다.

“와악.”

강한 힘에 균형을 잃은 나는 아르한의 무릎 위에 누워 있게 되었다. 근육 덩어리 허벅지는 벤치 등받이 못지않게 딱딱했다.

나는 눈앞을 가린 머리카락을 치우며 투덜거렸다.

“야, 놀랐잖아.”

“졸린 것 같은데, 좀 쉬어.”

아르한은 나를 제 무릎에 뉘여 놓고 내 눈을 피하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아르한의 무릎에 누워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아주 조금 자라 귀 언저리를 덮고 있었다. 내 시선이 엷은 입술을 지나 쭉 째진 가는 눈매를 훑었다.

항상 웃고 있어서 몰랐는데, 무표정으로 있으면 조금 사납게 생겼구나. 꼭 화난 것 같네.

“야, 넌 가능하면 웃고 다녀야겠다.”

내가 그렇게 툭 던지자 아르한이 피식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다른 사람한테 웃어 줬으면 좋겠어?”

“뭐야, 어째 어감이 이상하다?”

얘나 글로리아 선배나 무슨 옛날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치고 있어. 검술학부에서 이상한 거 가르치는 거 아냐?

“아, 이 곱슬머리 진짜.”

나는 누워 있던 탓에 엉키기 시작하는 머리카락을 짜증스레 헤집었다.

“다 쫙쫙 펴 버리고 싶다.”

“왜, 예쁜데.”

내가 몸을 일으키고 중얼거리자 아르한이 내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항변했다.

“그래? 잘생긴 애가 그렇게 말하니까 맞는 거겠지.”

그에 나는 수긍하며 바람을 불어 머리카락을 날려 보냈다.

“……나 잘생겼어?”

“그렇대도.”

아르한이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어른스러운 척해도 가끔씩 저럴 때마다 어린 티가 난단 말이지.

문득 더 놀려 주고 싶어 나는 입을 열었다.

“글로리아 선배 있잖아. 그 선배랑 있다가 네 이야기가 나왔거든.”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선배도 너 잘생겼댔어.”

“그래?”

의외로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아르한이라면 콧대 높이면서 잘난 척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야, 예쁜 사람이 칭찬해 주면 기분 좋지 않아?”

아르한은 잠시 고심하더니 별안간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그럼 누나는 예쁜 게 좋아, 잘생긴 게 좋아?”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다 말고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응? 예쁜 거.”

“…….”

“에이, 알겠다. 너 예쁜 게 아니라 잘생겼다고 해서 싫구나?”

나는 실실 웃으며 시무룩한 표정의 아르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럼 예쁘다고 해 줄까? 말만 해.”

“아, 됐거든.”

아르한이 내 손을 뿌리치며 툴툴거렸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 말인데.”

잠시 망설이던 아르한이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라는 호칭이 누굴 뜻하는지는 너무 뻔했기에 그게 누구냐고 구태여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둘이 사귀는 건 아니지?”

“어우, 아니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나였으면 좋아하는 사람을 헷갈리게 두진 않았을 거야.”

아르한은 조금 불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였다면 좋아한다는 걸 깨닫자마자 바로 달려가서 꽉 끌어안고 이렇게 말해 줬을걸.”

이제 속삭이다시피 낮아진 목소리로 아르한이 말했다.

“많이 좋아한다고.”

목소리 크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꼭 나한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깨닫자마자 바로 달려가서……좋아한다고.

“어……충고 고마워.”

나는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 * *

“좋아해요, 선배. 저랑 사귀어 주세요.”

한 2학년 여학생이 볼을 빨갛게 붉힌 채 말했다. 순정으로 물든 얼굴이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말과 무척 잘 어울렸다.

여학생의 뒤쪽에는 친구들인 듯한 여학생 두어 명이 응원하는 것처럼 모여 서 있었다.

아, 쟤 누군지 알 것 같은데. 수학 수업을 같이 듣는 애였던가?

그리고 우연히 지나가다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된 나는 기둥 뒤에 서서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고백이라, 생각해 보면 나처럼 선배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노아 선배랑 손 한번 잡아보고 싶은 여학생들로 교실 두 개는 너끈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당연했다. 예쁘고 공부 잘하고 성격도 다정하고 신분도 높은, 이를테면 왕자님 같은 사람이니까.

다만 다들 선배가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이성에게 관심 없는 모범생인 걸 아니까, 눈치 게임을 하면서 편지나 보내고 있는 거지. 거기서 간혹 이렇게 고백해 오는 대담한 학생들도 볼 수 있고 말이다.

와, 새삼 대단한 사람이 날 좋아하고 있구나.

나는 둘의 모습을 힐끗힐끗 훔쳐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선배가 저 고백을 거절할 걸 알았다. 웃기게도 거기서 오는 약간의 우월감마저 있었다. 하지만 선배가 뭐라고 할지 궁금해져 나는 기둥을 꼭 쥐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주 미약한 불안감에 심장이 뛰었다.

“미안해.”

기둥 뒤로 고개를 살짝 빼는 순간, 노아 선배가 때맞춰 입을 열었다.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무척이나 곤란하고 미안한 얼굴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고백에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만약 내가 저 여학생이라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을 거다.

……가만.

지난 학기에 내가 고백했을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내가 고백했을 땐 얼굴을 붉히고 고맙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워서 그런 줄 알았지.

그런데 다른 사람이 고백했을 때는 그런 반응이 아니네? 그냥 아예 거절이네?

혹시 그때도 나를……?

“……그게 누군데요?”

여학생은 약간의 미련이 남은 듯 되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곧장 머릿속으로 하던 생각을 멈추고 다시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여학생의 질문에 노아 선배가 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미안, 그건 좀 곤란해.”

“……흑!”

여학생이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돌아서 친구들에게로 갔다. 친구들은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달래며 자리를 벗어났다.

나도 속으로 그녀에게 심심찮은 위로를 건넸다.

야, 미안하다. 완전 진심으로 슬퍼해 줄 수는 없지만 얼른 털고 일어나서 다른 좋은 사람 만나렴.

“아.”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는데 순간 발을 헛디뎌 앞으로 나아가 버렸다.

“어, 아…….”

이제 와서 다시 숨기도 참 뭐했기에, 머쓱한 신음을 흘리며 한 팔로 기둥을 짚고 서 있는데 노아 선배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황금색 눈에 나를 담은 선배가 기다렸다는 듯 푸스스 웃었다.

“안녕.”

난 정말 멋대로 소설을 쓰고 싶진 않았다. 선배의 행동을 내 좋을 대로의 추측에 끼워 맞추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

고개를 들어 선배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화악,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젠 익숙해진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내 머릿속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야, 이거 큰일 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