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일로 늦었어, 케이트 네가?”
시간을 못 지킨 건 아니었지만 평소보다는 늦은 게 맞았다.
나는 의외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플로라 선배에게 웃어 보였다.
“수업이 조금 늦게 끝나서요.”
“그랬구나, 들어와.”
교실에 들어오던 중 노아 선배와 눈을 마주친 나는 선배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옆을 보니 글로리아 선배가 입을 틀어막으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나는 냉큼 그녀 옆에 가 앉았다.
“왔어? 왜 이렇게 늦었어, 설마…… 읍.”
킥킥대며 내 볼을 건드는 선배의 입을 막고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렇게 내내 노아 선배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일부러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동아리가 끝나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저 약속이 있어서…… 바로 가 볼게요.”
“잠깐만…….”
“안녕히 계세요.”
뒤에서 노아 선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고 곧장 그곳에서 튀었다.
* * *
“나 좀 숨겨 줘…….”
“분명 지난 학기에 지금이랑 똑같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도라가 저에게서 나를 거칠게 떼어 내며 말했다.
“너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런 게 있어…….”
나는 우울한 얼굴로 다시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사실대로 다 말하면 엄청 놀리겠지?
뭐어, 안고 싶다고?
하이 톤으로 깔깔대며 뒤로 넘어갈 도라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교실 창문 너머로 보이던 은색 머리카락이 사라지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도라가 물었다.
“너 선배 아직 좋아해?”
주저하던 내가 대답했다.
“……아마?”
“선배랑 사귀고 싶어?”
“글쎄, 그럴…… 수 있으려나. 아마 아닐걸.”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녀가 지겹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 생각엔 네가 단념한다고 한 게 1학기였던 것 같은데. 참 오래도 가네.”
“앗.”
“정신 좀 차리고 다녀. 아까도 수업에 집중 못하더니만. 쯧쯔.”
도라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으응.”
나는 괜히 뻐근해져 오는 어깨를 주물렀다.
꼭 무거운 짐을 계속 끌고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나는 하품을 하며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이번 수업은 친구들과 전부 떨어지게 되어서 조금 외로웠다.
터덜터덜 후원 앞을 지나가던 나는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전방에 노아 선배가 보였다.
그런데 저기서 뭐 하는 거지?
나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가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노아 선배는 후원 풀밭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냥 지나칠 법도 한데, 축 처진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해 보여서 자꾸 시선이 갔다.
나는 멀뚱히 서 있다가 선배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넌지시 물었다.
“뭐 하세요?”
“아.”
내가 여기 서 있는 걸 몰랐는지 노아 선배가 당황스러운 침음을 흘렸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몰랐다니,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 고양이.”
나는 선배 팔에 안겨 있는 익숙한 하얀 고양이를 보며 머리를 긁었다.
지금 보니 그냥 쪼그려 앉은 게 아니고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던 거였다.
“위험하게.”
선배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꾸짖는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네?”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는지 연못가에 있더라고.”
“아이구, 고양아…….”
조금 친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호들갑을 떨며 다가가 손을 뻗자 그 하얀 고양이는 어김없이 도망갔다.
이거 씁쓸하네.
민망함과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데, 선배가 긴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어제 네가…… 누굴 안고 있는 걸 봤어.”
늘 그렇듯 차분한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기운 빠져 보였다. 금색 눈이 초연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황스러움에 눈을 깜빡거렸다.
아마 아르한을 말하는 거겠지?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혹시 이상하게 오해했나? 아니, 그걸 보고 있었다고? 아니, 그런데 뭐 어쩌라고?
“그런데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내가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선배가…… 무슨 상관인데요?”
내 말에 선배가 금색 눈을 처연하게 깜빡거리다, 이내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네.”
이내 선배는 내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
입꼬리가 가련하게 파르르 떨리는 것이 조금 상처받은 것 같았다. 주눅 든 얼굴에 괜히 가슴이 아려왔다.
왜 그래요.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그런 얼굴을 해요? 그런 표정을 지으면 꼭…….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우리가 무슨 사이라도 되는 것 같잖아요.
* * *
수업 시간, 나는 연신 우울한 얼굴로 칠판에 적힌 내용을 필기했다. 하지만 집중은 전혀 되지 않았다.
선배의 작게 흔들리던 눈이며 떨림을 감추려는 기색이 역력했던 목소리, 그 비 맞은 강아지처럼 우울한 얼굴을 생각하니 어쩐지 죄책감이 느껴져서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조금만 더 냉철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생각 따위 안 해도 됐을 텐데. 아니지, 애초에 이렇게 감정을 질질 끌고 갈 일이 없었겠지!
인상을 쓰고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던 내가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17년 인생 동안 내가 이렇게 호구 같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선배를 안고 싶다는 생각은 이 생각에 묻혀 사라졌으니.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교과서 페이지를 넘겼다.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왜 이렇게…… 미안하지? 무슨 상관이냐, 그 한마디 한 게 뭐라고.
답은 의외로 빨리 나왔다.
왜긴 왜야, 좋아해서지.
공책에 공식의 답을 적던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걸까.
이런 내가 짜증 나고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멍청이야.”
“……?”
낮게 읊조리자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짝이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펜을 놀려 필기를 했다.
그러나 손은 금방 멈췄다.
사과를…… 해야 하려나?
나는 입술을 깨물며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펜촉이 거칠게 종이를 긁었다.
아, 제발 그만. 또 노아 선배 생각.
할 수만 있다면 선배한테 제발 내 머릿속에서 나가라고 하고 싶다.
내가 계속 딴생각 중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필기는 산만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정말, 정말, 정말로 선 좀 그어야지.
한 천 번쯤은 하고 또 했을 생각을 다시 하며 공책을 넘겼다.
* * *
“아아악.”
나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나 있는 금을 보며 휘적휘적 걸어가는데, 바로 앞에 낯선 발 한 쌍이 보였다.
의아함에 고개를 드니 노아 선배가 있었다.
딱 마주쳤다. 스쳐 지나간 것도 아니고, 이번에는 아주 그냥 제대로 맞닥뜨렸다. 정신 팔고 계속 걸었으면 부딪힐 뻔했다.
모른 척하기도 참 뭐했지만 마주하기도 좀 그랬기에 어색하게 몸을 휙 돌려 떠나려는데 노아 선배가 나를 불렀다. 평소와 달리 조금 동요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케이틀린.”
“!”
저 호칭은 들을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다. 다들 날 케이트라 부르지, ‘케이틀린’이라는 호칭은 아빠한테 혼날 때 빼고는 듣지 않는단 말이다.
뭐, 조금 딱딱하게 들리지만 내가 애칭을 허락한 적은 없으니 저게 예법에 맞긴 하다. 노아 선배답다고 해야 하나.
내 손목을 조심스레 쥔 노아 선배가 물어 왔다.
“괜찮으면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금색 눈동자에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가만히 서 있던 나는 다른 손을 들어 조심스레 손목을 빼냈다.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혹시 전의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거라면……. 아니, 선배는 왜 그 얘기를 하려 했을까?
“……이거 놔주세요.”
선을 긋겠다는 내 의지가 반영된 건지 내가 들어도 놀라울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였다. 노아 선배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굴을 굳힌 채 말을 이었다.
“제가 바빠서. 이만 가 볼게요.”
말이 조금 어색하게 뚝뚝 끊겼지만 이만하면 꽤 훌륭했다.
내가 돌아서서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는데, 선배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일부러 걸음을 조금 천천히 하며 지켜보았는데, 몇 분이고 계속 가만히 서 있었다.
……뭐지? 내가 말이 너무 심했나?
불안한 얼굴로 등 뒤를 흘끗거리던 나는 다시 온 길을 되돌아가 노아 선배의 얼굴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호흡이 잘게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힘없이 드리워진 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 우세요?”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우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미친, 어떡해. 내, 내가 울린 거야?
아, 어떻게 나라는 사람은 중간이 없어, 중간이. 선 좀 그으랬더니 아예 울려?
입을 헤벌리고 멍청하게 서 있던 내가 다급히 사과를 건넸다.
“죄, 죄송해요. 제가 진짜 그러려던 건 아닌데 저도 모르게 그런 말투로…… 우, 울지 마세요.”
손수건이 있던가? 내가 세탁을 해뒀었나?
나는 말을 더듬으며 치마 주머니를 뒤졌다.
“……이젠.”
선배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먹먹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물기 어린 금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기다란 속눈썹에 이슬처럼 눈물이 맺혀 있었고, 예쁜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젠 내가 싫어?”
“네, 네?”
이런 상황에서도 선배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예뻐서, 나는 당혹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뒷걸음질 쳤다.
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