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사교 클럽 얘기 들었어? 동아리 교실 작은 데로 옮긴대. 예산도 줄어들고.”
“진짜? 무슨 일이래, 갑자기.”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복도를 지나던 나는 괜히 귀를 후비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글로리아 선배가 힘을 좀 쓴 게 맞는지,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내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린다라는 선배는 그날 이후 마주친 적 없었다. 애초에 학년이 달랐으니까.
다만 같은 학년의 사교 클럽 소속 애들을 몇 번 마주친 적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내 눈을 피하며 몸을 수그리기 일쑤였다.
조금 부끄럽지만 그럴 때면 나는 은근히 의기양양해지곤 했다.
간혹 내게 글로리아 선배가 그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뭐?! 가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넌 내게 소중한 사람이고 난 그런 널 지키고 싶을 뿐이야.”
……보다시피 선배가 노발대발하기에 깨끗이 잊어버렸다.
하여튼 사교 클럽 일은 잘 해결되었다. 그보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날 이후로 노아 선배를 제대로 보기가 힘들다는 거였다.
“헉!”
복도를 걷다가도 익숙한 은발이 보이면 숨기 바빴다.
“떨어져라, 좀.”
내게 어깨를 붙잡힌 도라가 경고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녀보다 키가 작아서 다행이었다.
겨우 도라 뒤에 숨어 노아 선배의 눈을 피해 건물을 나간 나는 기둥에 기대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까진 멀쩡하더니만 갑자기 왜 그래?”
“이건 달라. 전적으로 내 문제야.”
나는 인상을 쓴 채 심장을 거칠게 움켜쥐며 도라의 물음에 대답했다.
노아 선배를 볼 때마다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다. 지나가다 재스민 냄새만 맡아도 움찔한다. 재스민 향수 쓰는 사람이 노아 선배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케이틀린…… 이 구제 불능 변태야.
“아으으.”
“왜 저래.”
내가 머리를 쥐어싸매고 신음하자 도라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 떠나갔다.
진정하자, 진정. 이런 파렴치한 생각은 하면 안 돼.
나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으며 머리를 좀 비울 목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가 당도한 곳은 아르한과 가끔 만나기로 했던 남자 탈의실 앞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여기 못 왔네.
“안녕, 오랜만이다 야!”
마침 그 앞에 아르한이 서 있길래 인사를 했는데, 팔짱을 낀 채 짝다리로 서 있던 그가 대뜸 앙칼지게 한마디를 던졌다.
“안 놀아 주는 거 맞잖아.”
“어?”
“누나 요즘 계속 나랑 안 놀아 줬잖아.”
내가 어벙하게 되묻자 그가 퉁명스럽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는 입가를 가리고 웃으며 아르한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뭐야, 삐졌어? 내가 잘 안 와서 삐졌어?”
아르한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 말 없이 내 눈을 피하고 있는 걸 보니 심통 난 게 맞았다.
아르한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 화난 점이 있어도 절대로 먼저 이야기 안 해서 화 풀어 주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미안해, 화 풀어. 응?”
“화 안 났어.”
내가 아르한의 볼을 꼬집으며 말을 늘이자 그가 볼멘소리로 웅얼거렸다.
“거짓말.”
나는 킥킥 웃으며 그의 볼을 쿡 찔렀다. 그러자 아르한은 붉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 서운했어.”
“알았어, 알았어. 미안. 앞으로 자주 올게.”
나는 그의 팔에 달라붙어 장난스레 웃었다.
“알았어. 내가 어떻게 누나한테 화를 내겠어.”
아르한이 피식 웃으며 표정을 풀었다. 입꼬리가 흐물흐물해져서는 갈 곳을 못 찾고 있었다.
“흐흥,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왠지 뿌듯한 기분으로 실실 웃으며 벤치에 앉았다.
환하게 비치는 햇살 사이로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가 보였다. 나는 감은 눈꺼풀 사이로 햇빛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누나 그 소식 들었어? 사교 클럽이…….”
“아, 그거 나 때문.”
아르한이 입을 열자마자 그의 말을 끊은 내가 손가락을 들어 내 가슴을 가리키자 아르한의 붉은 눈이 커졌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나는 괜히 머쓱해져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게 말이다…….”
사교 클럽에 끌려갔다 온 내 이야기를 들은 아르한이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뭐, 그래서 그 선배 때문에 그 동아리 예산도 줄고 부실도 바뀐 거라고?”
“그렇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헛웃음을 흘리는데, 놀랍다며 혀를 내두르던 아르한이 나와 눈을 맞추었다.
“누나, 무섭진 않았고?”
“무서웠지.”
그래서 노아 선배가 안아 줬……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나는 턱을 괸 채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야, 넌 누굴 보는데 그 사람을 안고 싶은 생각이 든 적 있니?”
아르한이 노아 선배를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고민을 털어놓게 된다. 아무래도 편한 상대라서 그렇겠지.
“글쎄.”
건성으로 대답한 아르한이 잠시 고민하는 듯 턱을 쥐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가라앉은 붉은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금?”
“……엉?”
“응, 지금.”
예상치 못한 답변에 나는 당황스레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이면, 나를? 아하, 이 귀여운 놈.
나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팔을 벌렸다. 이러면 도망가거나 질색하겠지.
“그래, 어디 한번 안아 볼래?”
“안는다.”
“어?”
반쯤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그렇다고 말할 틈도 없이 아르한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시야에 붉은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쿵, 쿵 하는 심장 박동 소리가 몸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애가 검술을 해서 그런가, 생각보다 강한 힘에 숨이 막혔다.
“켁.”
내가 신음하며 아르한의 어깨를 치자, 뱀처럼 나를 휘감고 있던 팔이 떨어져 나갔다.
“얘가 왜 이렇게 힘이 좋아.”
겨우 무지막지한 힘에서 벗어난 나는 그렇게 투덜대며 몸을 꿈틀거렸다.
반면 아르한은 무언가 대단한 것을 발견해 냈다는 듯 제 손을 보고 중얼거렸다.
“이제 알겠어.”
“뭘, 네 팔 힘을?”
내가 얼얼한 어깨를 주무르며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
왜 저래.
나는 눈썹을 내려뜨리며 슬금슬금 몸을 옆으로 뺐다.
아르한은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제 손을 만지작거리며 헤실헤실 웃었고 나는 그가 왜 그렇게 웃는지 알 수가 없었다.
* * *
아르한과 헤어진 나는 연무장을 향해 걸었다.
연무장이 가까워질수록 짙게 날리는 흙먼지에 나는 작게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어으.”
“어, 케이트 왔어?”
“네에.”
글로리아 선배가 이마에 맺힌 땀을 문질러 닦으며 반가운 얼굴을 했다. 하나로 묶은 백금색 머리카락이 찬란히 빛났다.
연습 중이었나. 그런데 왜 검이 없지?
“오러 연습 하시는 거예요?”
“으응.”
어쩐지 냉기가 풀풀 풍긴다 했다. 뭐, 여름인데 시원하고 좋네.
글로리아 선배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으며 나무에 박힌 얼음 조각을 뽑아냈다.
“어쩌다 또 그런 일이 일어나면 곤란하니까…….”
그 일을 다시 떠올렸는지 조금 의기소침해진 선배가 중얼거리며 애꿎은 얼음 조각을 발로 밟아 부쉈다. 날이 더워서인지 얼음은 금방 녹아 흙바닥에 스며들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땐 당황해서 가만히 있던 거예요. 만약에 또 선배가 폭주하면 제가 마법 써 드릴게요.”
어떤 봉인 마법진이 좋으신지 골라 보세요.
내가 그렇게 맞받아치자 선배가 헛웃음을 흘렸다.
“음, 내가 조절하려고 노력해 볼게…….”
“힘내세요.”
나는 벤치에 앉은 흙먼지를 털고 그 위에 앉았다. 글로리아 선배도 잠시 쉬려는 듯 나를 따라 앉았다.
“사교 클럽 일, 선배가 한 거죠.”
내가 진중한 목소리로 묻자 글로리아 선배가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응.”
“흠,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고맙습니다.”
놀란 듯 푸른 눈을 크게 뜬 채 선배가 말했다.
“의외네.”
“왜요?”
“너라면 치졸한 짓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흐트러진 앞머리를 후후 불던 나는 머리를 이리저리 흩뜨리며 대답했다.
“절 끌고 가서 협박한 사람들한테까지 인정 베풀 만큼 착하지는 않아서요.”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짜증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못됐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엄청 통쾌했다.
“옳지, 잘했다.”
글로리아 선배가 내 머리를 마구잡이로 쓰다듬자,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흐트러진 앞머리를 다시 정리했다.
“어, 고마워. 아, 맞다.”
글로리아 선배가 내가 건넨 물을 마시다 말고 코를 긁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노아스가 너 찾던데.”
“……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 안 돼.
“말하지 마세요……. 제발 비밀로 해 주세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내가 제 팔을 붙잡고 애원하자 글로리아 선배가 걱정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또 무슨 일 있어?”
“……그게.”
보이면 자꾸 안고 싶어져서 참을 수가 없어요.
나는 두 눈을 꾹 감고 실토했다.
“아하하하, 걔한테 안긴 것 때문에 얼굴 보기가 힘들다고? 뭐, 볼 때마다 안고 싶어져?”
글로리아 선배가 배를 잡고 웃었다.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이를 꽉 사리물고 억눌린 발음으로 말했다.
“……웃지 마세요.”
“알았어, 알았……큭.”
품 큰 셔츠를 입은 선배의 어깨가 잘게 들썩였다.
나는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하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거 뭐……. 내가 학교를 다니는 건지, 로맨스 소설을 읽는 건지.”
찔끔 나온 눈물을 닦으며 글로리아 선배가 중얼거렸다.
“제삼자 입장에서 너희가 얼마나 웃긴지 알아?”
“글쎄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던 그녀가 체념한 얼굴로 하하 웃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봐. 이거 재밌어지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