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리아 선배는 거의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나도 모르게 그녀가 웃는 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따지자면 선배는 무척 차갑고 도도한 얼굴이었다.
“……!”
무표정, 아니, 다 부숴 버릴 듯 살벌한 표정을 한 글로리아 선배가 문가에 서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분노로 일렁거렸다.
항상 웃던 선배가 지은 무서운 표정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꼭, 꼭 그 책에서 보았던 다른 글로리아 선배를 보는 것만 같아서.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서릿발 같은 기세에 선배가 오러를 쓰고 있나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건 방 안의 모든 다기들이 동시에 얼어붙은 채 쨍, 하고 깨짐으로서 사실로 드러났다.
“꺄악!”
조각이 튀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어느새 방 안의 온도가 추울 정도로 내려가 있었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던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황급히 옷을 여몄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얼음 송곳들이 날아와 벽에 박혔다. 오금이 저릿했다.
이게 뭐야. 나 여기 있는 거 안 보여요, 선배?
내 볼과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간 얼음을 본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방어 마법진을 펼쳤다. 그러자 다갈색 머리의 선배가 내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아, 좁으니까 좀 비켜요.”
“시, 싫어!”
그녀가 파래진 얼굴로 내 옷깃을 부여잡았다. 글로리아 선배가 어지간히 무서웠나 보다.
나는 간신히 그녀를 뿌리치고 글로리아 선배에게로 가는 데 성공했다.
“……누가 이랬어?”
내 손목에 붉은 자국이 생긴 것을 본 그녀가 내 팔을 잡고 으르렁거렸다.
나는 이미 저 선배에게 대들어 버렸고, 글로리아 선배는 내 편이다. 그리고 글로리아 선배는 저 선배보다 지위가 높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내가 눈을 꾹 감고 갈색 고수머리 선배를 가리켰다.
“저 사람이요.”
그러자 곧장 방 안에 휘잉, 하고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다갈색 머리의 선배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너?”
“히익!”
“한 번만 봐 줍시다, 한 번만!”
나는 광견병 걸린 미친개를 달래듯 글로리아 선배를 뒤에서 꽉 끌어안고 말렸다.
안 그러면 선배가 이 방은 물론 사람까지 다 작살을 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백 허그?”
“좀!”
내가 소리치자 헛기침을 몇 번 한 글로리아 선배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갈색 머리의 선배를 쏘아보았다.
“아, 너 걔구나? 전에 봤던, 그, 음…… 이름이 뭐더라.”
글로리아 선배가 과장되게 고개를 갸웃하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교 클럽 소속일 정도면 꽤나 이름 있는 가문일 텐데.
분명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다갈색 머리의 선배가 얼굴을 붉혔지만, 제 잘못을 알긴 하는지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런데 네가 무슨 일로 얘를 불렀어? 그것도 애 팔에 자국 날 정도로 세게 잡고.”
그 선배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그, 그냥 차 한잔하자고 부른 거야! 같은 학교 학생끼리 그 정도도 못 해?”
글로리아 선배 뒤에 딱 붙어 있던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야, 이거 기막히네. 금방이라도 날 독살할 것 같은 분위기였으면서, 뭐라고?
“그래? 나도 그냥 이러는 건데. 기분 개같아서.”
“무, 무슨!”
선배가 백금색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리더니 삐뚤게 웃었다.
“음, 이제 기억났다. 린다, 맞지? 린다 에르셀.”
아, 에르셀 백작가.
감히 그녀의 명찰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몰랐는데, 에르셀 백작가는 나도 들어 봤을 정도로 이름 있는 가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글로리아 선배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린다, 아버님께 전해 드려. 에르셀 백작가와의 교역은 끝이고, 내가 후작 돼서도 거들떠도 안 본다고.”
“너, 너! 그걸 네가 뭔데 멋대로 정해!”
린다라고 불린 선배가 얼굴이 희게 질린 채 소리쳤다.
“너 난리 치고 여기 부순 거 다 말할 거야. 이러고도 멀쩡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너 내가……!”
“응, 린다야. 안 들려!”
그걸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글로리아 선배가 해맑게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세상에!”
린다 선배가 비틀거리며 모욕감으로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앞으로 나한테 할 말 있으면 직접 말해. 애먼 애 잡지 말고, 치졸하게 그게 뭐니?”
매서운 기세로 경고하며 내 어깨를 잡고 방을 나서려던 글로리아 선배가 몸을 돌려 좌중에 대고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아, 깨진 것들 비용은 우리 집으로 청구하던가.”
그러고는 상냥해진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가자.”
선배…… 무서운…… 진짜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나는 입 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앞으로는 개기지 말아야겠다.
조용히 입을 다문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배 뒤에 붙어 방을 나왔다.
글로리아 선배는 방에서 나오자마자 내 어깨를 붙잡고 정신없이 사과를 했다.
“괜찮아? 내가 아직 오러 사용이 미숙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살기를 담고 있었던 청안은 원래의 다정함을 되찾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 우리 선배구나.
줄줄 이어지던 사과의 말이 어느 순간 갑자기 뚝 끊겼다.
“……너 울어?”
“네? 아뇨, 아뇨, 이건 그냥 생리적인…….”
나는 어느새 찔끔 맺혀 있는 눈물을 닦으며 버벅거렸다.
“……무서웠어요.”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선배는 어쩔 줄 모르는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울지 마.”
글로리아 선배가 나를 꽉 끌어안고 더듬거렸다.
“안 울어요.”
나는 조금 화끈거리는 눈가를 세게 문질렀다.
선배가 사과할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나를 구해 주었다. 내가 지레 겁먹은 것일 뿐.
“케이틀린!”
익숙한 목소리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아 선배가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복도를 달려왔는지 안경은 삐뚤어지고 은색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글로리아 선배 앞에서 눈가를 붉힌 채 서 있는 나를 본 노아 선배가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기자, 나는 숨을 훅 들이켰다.
“너 뭐 했어.”
노아 선배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그렇게 말하자 동시에 나를 끌어안은 몸이 잘게 진동했다.
“난 그냥……!”
그에 항의하려 소리치던 글로리아 선배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미안해.”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러니까 놔 주셔도 돼요.”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노아 선배가 나를 놔주었다. 나를 끌어안았던 게 머쓱했는지 긴장되어 있던 선배의 팔에 힘이 풀렸다.
“……미안.”
선배의 품에서 빠져나온 나는 괜히 팔을 벅벅 긁었다.
“세상에, 무슨 일이야! 케이트 울었니?”
내가 복도에 빠뜨리고 온 과자를 들고 뛰어오던 플로라 선배가 나를 보곤 화들짝 놀라 과자를 전부 떨어뜨렸다.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저, 저거, 얼음……!”
사교 클럽 방 문고리가 얼어 있는 걸 본 플로라 선배가 얼빠진 표정으로 내 등을 두드렸다.
“사교 클럽 애들이 케이트를 끌고 갔어. 저건 내가……오러 조절이 안 돼서.”
질린 얼굴로 그렇게 대답한 글로리아 선배가 내게 물었다.
“걔들이 뭐라던?”
“글로리아 선배를 사교 클럽에 데려오래요.”
나는 코를 문지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로리아 선배가 얼굴을 잔뜩 구겼다.
“하, 뻔하네.”
선배들은 나를 동아리 교실로 데려가 앉혔다. 자꾸 보건실에 데려가려는 것을 겨우 말렸다.
“정말 보건실 안 가도 돼?”
내게 담요를 덮어 준 플로라 선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네, 괜찮아요.”
우울하게 과자를 씹던 내가 대답했다.
계속 축 쳐져 있는 나를 본 노아 선배가 글로리아 선배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니까 조절도 못하는 힘을 왜 써. 케이틀린이 놀랐잖아.”
“아니……미안하다고.”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고 대들었을 글로리아 선배가 기가 팍 죽은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괜찮아요.”
그것보다는 다른 게 더 걱정이었다.
에르셀, 에르셀 백작가라니. 어떡하지, 나. 아빠 미안해…….
내가 불안한 얼굴로 손톱을 깨물고 있자, 글로리아 선배가 나를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 난리 좀 쳤으니 린다 걔도 알아들었겠지.”
내 어깨를 꼭 쥔 선배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언니가 다 알아서 할게. 걱정하지 마.”
* * *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나는 멍한 얼굴로 침대에 앉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글로리아 선배가 도와주겠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자꾸 도움만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참 그렇네.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던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노아 선배랑 포옹을 했다. 상황이 상황이었고 일방적이었지만 어쨌든 내가 선배 품에 안겼다.
분위기가 그래서 미처 자각하지 못했는데, 지금까지 했던 것 중에 가장 짙은 스킨십이었다.
나를 안은 팔이 탄탄했고 셔츠로 감싸인 몸도 그랬다. 겉으로는 호리호리해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마냥 그런 것도 아니었다. 허리가 낭창했는데 가슴은 또 넓었다.
은색 머리카락에서 풍기던 향긋한 재스민 냄새를 기억했다.
참 따뜻한 품이었지. 다음에는 나도 마주 안아 보고 싶다.
그만 엄한 상상을 해 버린 나는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미쳤어.
“야, 너 괜찮아?”
내가 갑자기 이불에 발길질을 시작하자, 놀란 도라가 그렇게 물었다.
“……아니.”
나는 아마도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얼굴을 가리며 웅얼거렸다.
정말 하나도 안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