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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사교 클럽으로 납치당했다.
액자에 책장에 티 세트까지, 방이 무슨 귀족 부인의 살롱 같았다. 과연 예산을 가장 많이 지원받는 동아리다웠다.
분명 고급스럽고 비싼 의자일 텐데 이렇게 불편할 수가.
나는 겁에 질려 두 다리를 다소곳이 모으고 앉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다리가 벌벌 떨렸다.
나 왜 여기 있지? 저 사람들이 내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한 학생이 억지로 쥐여 준 찻잔을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려 붉은 찻물에 파동이 일었다.
입 안이 바짝 말랐지만 차를 마실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내가 너무 떨고 있자 한 학생이 입을 열었다.
“너무 괴롭히면 교수가 뭐라 한다. 쟤 공부 잘하잖아.”
“괴롭히다니, 내가 뭘 했다고?”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다갈색 고수머리의 선배가 억울하다는 듯 대답하자, 나는 헛기침을 하며 붉게 자국이 남은 손목을 문질렀다. 다름 아닌 그녀가 만든 자국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결국 내가 참다못해 선배를 불렀다.
“저기, 저는 왜 여기 있죠. 동아리 가야 하는데…….”
“아, 할 말이 좀 있어서 불렀어.”
불러? 불러어어? 누가 이걸 그냥 불렀다고 해요?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 선배는 한 술 더 떠 두 눈을 휘며 말했다.
“이해 좀 해 줄 수 있지?”
말도 안 돼,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거짓말처럼 머릿속에 아빠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교 클럽 가입 조건은 백작가 이상, 그것도 정계에 진출한 가문 출신이어야 한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가, 아카데미 밖이었다면 내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신분이라는 거다.
여기서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는 나만 큰일 나는 게 아니라 우리 가문까지도 피해가 가는 수가 있었다.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찻잔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차 더 줄까?”
“아니요…….”
한 입도 안 먹어서 잔이 가득 차 있구먼, 지금 누구 놀리나.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좋아, 이제 말할게.”
갈색 고수머리의 선배가 눈웃음을 쳤다.
“사교 클럽은 아주 유서 깊은 동아리야. 여러 명문 귀족들이 소속된. 독서 토론부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지.”
또, 또 저러네. 우리 동아리가 뭐 어때서.
아, 그러고 보니 선배들이 과자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가 늦어지면 찾으러 와 주겠지?
나는 속으로 기도하다시피 빌었다.
그나저나 과자는 어떡하지. 복도에 널브러져 있을 텐데, 누가 가져가는 거 아냐?
“그리고 루피너스 후작가 자제들 또한 대대로 사교 클럽 소속이었지.”
“아, 그렇구나.”
“하여튼 우리가 루피너스 후작가가 조금 필요하거든.”
“아아…….”
나는 대충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맞장구를 쳐 주자 그 선배는 조금 콧대가 높아진 것 같았다.
좋댄다…….
그나저나 글로리아 선배가 아니라 루피너스 후작가가 필요하다, 라.
“너도 별다를 거 없잖아.”
“네?”
“지난 주말에 너랑 걜 봤는데, 의상실에서 나오더라? 거기 되게 비싼 건 알지?”
다갈색 머리카락의 선배가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암요, 암요. 다 사겠다는 거 말리느라 내가 얼마나 진땀을 뺐는데.
“어차피 너도 걔 옆에서 단물 좀 빨 생각 아니었어?”
“아닌데요.”
나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무척이나 불쾌했다. 그건 나를 아껴 주는 글로리아 선배에게도 나에게도 무례한 말이었다.
“오, 내숭 떨 거 없어.”
나름 진지하게 한 말인데 방 안의 사람들은 다들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키득거렸다.
사람이 다들 자기 같은 줄 아나.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걔는 왜 너를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걜 구워삶은 무슨 비법이라도 있어?”
누군가가 그렇게 물었다. 정말 궁금하다기보다 무슨 저급한 수를 썼냐는 조롱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 궁금하다. 알려 줘. 가르침이라도 받게.”
그 선배가 환생했다는 사실을 아는 게 저밖에 없어서요.
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찻잔 손잡이를 깨 버릴 듯 꽉 잡았다.
그렇게 말했다가는 비웃음만 사겠지.
“그냥 뭐…….”
사실 답은 너무나도 자명했다. 글로리아 선배가 매일같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잖은가.
결국 나는 체념한 뒤 두 눈을 질끈 감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귀여……워서요.”
“풉.”
좌중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곧이어 방 안이 실소로 가득 찼다.
“야, 얘 재밌는 애네.”
다갈색 머리의 선배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뭐지. 요 전까진 귀엽다는 말이 지겨웠는데 지금은 왜 이 비웃음이 기분 나쁠까.
나는 속으로 곱씹으며 인상을 썼다.
“어쨌든 네가 글로리아한테 한번 잘 말해 줄 수 있을까? 사교 클럽으로 오라고.”
그녀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내가 절대로 거부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듯했다.
“생각해 봐, 너한테도 나쁠 건 없어. 원한다면 너도 끼워 줄게.”
굉장히 선심 쓴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글로리아 선배를 데려온 뒤 어떻게 될지 벌써 눈에 훤하다.
여기 들어와 봤자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따돌림 당하다 자발적으로 나가겠지. 물론 가입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결국 글로리아 선배 주변인들 중에서는 내가 가장 만만하다는 거군. 플로라 선배나 노아 선배 대신 나를 데려온 걸 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건가.
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아,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은데…….”
“다시 말해 볼래?”
“네? 어, 그건 어려울 것 같…….”
“다시.”
미련하게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사람들, 내가 알겠다고 할 때까지 날 보내 줄 생각이 없구나.
결국 나는 속으로 울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그…… 한번 말해 보기는 할게요. 그런데…….”
“그런데?”
“아마 거절하시지 않을까…….”
“왜?”
……물음표 살인마!
나는 남몰래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목을 가다듬은 내가 입을 열었다.
“하여튼, 어려울 것 같아요. 제가 그럴 자격도 없고, 본인이 싫다는데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흐음.”
선배가 차가운 실소를 흘리더니 싸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눈치는 조금 있는 애인 줄 알았더니.”
내 명찰을 흘끗 내려다본 그녀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 성이 블레어였던가?”
“!”
“야, 그게 어디에 붙어 있는 거더라?”
그녀가 딱딱하게 웃으며 다른 학생에게 물었다.
“아마 남쪽일걸.”
“뭐야, 완전 촌 동네 아냐.”
그 순간, 억눌러 왔던 가슴 속 무언가가 폭발했다.
더는 못 참겠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차는 이미 다 식어 버려서 마실 수도 없었기에 거침없는 동작이었다.
“정말 최악이시네요, 선배님.”
“……뭐라고?”
나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점점 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글쎄요. 다른 건 모르겠고, 왜 글로리아 언.니.가 여길 안 들어오려 했는지는 아주 잘 알겠어요.”
저질렀다.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나는 눈을 꼭 감았다 떴다.
후폭풍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하고 싶었던 말을 하니 속이 다 시원했다.
“허!”
고개를 슬쩍 드니 다갈색 머리의 선배가 얘가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너, 내가 가만 안 둘 줄 알아.”
분에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분통을 터뜨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두려워서 죽을 것 같았지만 나는 매서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노려보았다.
나는 잘못이 없었으니까.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저쪽이다. 여차하면 마법까지 쓸 각오도 하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마음을 다잡은 바로 그때였다.
쾅,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다갈색 머리의 선배가 당황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것과 동시에 나도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문이 경첩이 빠져 헐렁거리고 있었다. 꼭 누군가가 너무 세게 열어 망가진 것처럼.
으, 저거 비쌀 텐데. 내가 다 아까웠다.
열린 문 사이로 다 풀린 백금색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단박에 그게 누군지 알아본 나는 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글로리아 선배! 와 줬구나!
그리고 글로리아 선배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선배가 웃지 않는 모습을 내가 처음 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