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10)

* * *

우리는 온 시내를 다 돌며 하늘이 붉게 물들 때까지 놀았다. 길거리 음식을 하도 먹어서인지 저녁을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불렀다.

“이렇게 늦게까지는 처음 있어 봐요.”

“그래? 피곤해? 갈래?”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주말이고.”

나는 노점에서 산 꼬치를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여기 묻었다.”

글로리아 선배가 두 눈을 휘며 내 입가를 문질렀다.

자기도 묻혀 놓고선.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선배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 주었다. 내가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빨아먹자 글로리아 선배는 벙찐 얼굴로 서 있었다.

“왜 그러세요?”

내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선배는 제 입가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저기 가게 기둥 하나 뽑고 싶어져서.”

“네? 그러면 안 돼요.”

“알아.”

왜 갑자기 파괴 욕구가 든다는 거지.

고개를 갸웃하며 길을 지나는데, 한 노점 안에서 무척 귀여운 곰 인형이 보였다. 털은 금색이었는데 무척 크고 푹신해 보였다.

“귀엽다.”

보아하니 새총으로 저 인형을 맞추면 주는 것 같았다. 아, 나 저런 거 잘 못 하는데.

내가 눈독 들이던 인형을 흘끗 본 글로리아 선배가 물었다.

“갖고 싶어?”

“네, 저 한번 해 볼래요.”

나는 주인아저씨에게 돈을 내고 노점 앞에 자리 잡았다.

조그만 새총은 커다란 곰 인형을 맞추기에 조금 어려워 보였지만 뭐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엥.”

그런데 이게 웬걸, 인형을 겨냥하고 쏜 조그만 돌멩이는 인형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뭐야, 이거 사기 아냐?

“줘 봐.”

내가 실망스러워하는 걸 보고 아저씨에게 동화 하나를 건넨 글로리아 선배가 비장한 기세로 새총을 들었다.

선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인형을 겨냥하자, 몇 초 뒤 인형이 옆으로 픽 고꾸라졌다.

“와!”

잠깐, 저게 뭐야.

인형 근처에 언뜻 푸른빛이 비치자 나는 감탄하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선배 오러 썼어요?”

“어…….”

글로리아 선배가 어물쩍 웃으며 침음을 흘리는 사이, 나는 눈을 부릅뜨고 인형을 꺼내려는 아저씨에게 소리쳤다.

“사장님……!”

“에헤이.”

내 입을 막은 글로리아 선배가 실실 웃었다.

“으읍……!”

“솔직히 저거 사기야. 새총이 너무 작잖아. 그리고 인형도 접착제 같은 걸로 붙여 놓은 것 같던데?”

“……그래요?”

의심스러운 표정을 하던 내가 그제야 몸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홍보도 되잖아.”

그러고 보니 선배가 단박에 성공하자 노점에 사람이 조금 몰리는 것도 같았다. 나는 여전히 찜찜한 얼굴로 받은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글로리아 선배가 다소 머쓱한 얼굴로 물어 왔다.

“넌 저런 거에 마법 안 써?”

“당연하죠.”

“그래, 넌 그럴 것 같았어.”

글로리아 선배가 다소 자조적으로 중얼거리자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은 내가 그녀를 슬며시 올려다보았다.

유치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곰 인형을 갖게 돼서 기분이 좋은 탓이었다.

“……선배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어린이가 장난감을 사 준 엄마에게 하듯 고마움과 약간의 기분 좋은 아부를 담아 그렇게 말했는데.

“허어어어.”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낸 선배가 별안간 나를 꼭 끌어안았다. 백금빛 머리카락이 내 목가를 간지럽히며 눈앞에 흩어졌다.

왜 이러지?

선배의 팔 힘에 숨이 막혀 켁켁거리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귀여워. 가로수 뽑고 싶어.”

“……에휴. 잡혀가요, 그럼.”

난 또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젠 귀엽다는 말도 지겨울 지경이다. 자랑하는 거 아니고 정말로.

선배가 따 준 인형을 들고 마차에 탔다가,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기숙사에 도착한 나는 그걸 책상 위에 고이 올려놓았다.

내 체력은 책 넘기기와 펜 들기에 맞춰져 있었기에 나는 녹초가 되어 바로 침대에 엎어졌다.

* * *

동아리 시간, 플로라 선배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그녀가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말했다.

“동아리 인원이 4명 이상이라 이번에 우리한테 예산이 주어졌어.”

“오, 진짜요?”

우리 동아리는 축제에도 참가하지 않고 딱히 비용 들 데도 없는 소규모 동아리라 그동안은 예산이랄 게 없었다.

좋은 일이긴 한데, 갑자기 생긴 예산을 어디다 쓰지? 책 사나? 도서관을 두고 굳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내 의문은 금방 풀렸다.

“그런데 책은 이미 다 도서관에 있고, 딱히 쓸 데가 없어서 그냥 다 같이 과자나 사 먹으려고 하는데 어때?”

그렇게 설명한 플로라 선배가 물어 왔다.

과자 좋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것 같아요.”

“나도.”

“그럼 누가 사 올지 가위 바위 보로 정하자.”

글로리아 선배가 제안한 대로 우리는 가위 바위 보를 했고, 나 혼자 보를 내서 졌다.

“다녀올게요.”

“나도 같이…….”

노아 선배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지만 나는 단호하게 막았다.

“아뇨, 제가 졌는걸요. 다녀올게요.”

플로라 선배가 뒤에서 소리쳤다.

“너 먹고 싶은 걸로 사 와!”

나는 돈이 든 주머니를 짤랑이며 매점으로 향했다.

보기에 맛있어 보이는 과자와 내가 좋아하는 품목들을 골라 담고 나니 박하사탕이 보여서 그것도 샀다. 충분히 샀는데도 플로라 선배가 건네 준 돈의 절반이 남았다.

그렇게 품에 과자 한 아름을 들고 한산한 복도를 지나던 바로 그때였다.

“야, 쟤 맞지?”

“맞네.”

한 무리 학생들이 나를 향해 수군거리는 것이 들렸다.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복도에는 나와 그들밖에 없었다.

뭐지, 무슨 일이지?

저들끼리 소곤거리며 나를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애써 무시하며 지나가려는데 학생 하나가 다가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야, 너.”

“네, 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나를 붙잡아 세운 사람은 명찰 색이 파란 걸 보아 3학년 선배였다.

게다가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전에 글로리아 선배와 함께 있었을 때 봤던 사람이었다.

글로리아 선배를 자기 사교 클럽에 데려가려고 우리 동아리를 마구 씹어 대던.

아무래도 좋게 끝난 만남은 아니었기에 나는 바짝 긴장했다.

“우리 구면이지?”

“아, 네…….”

나는 다소 떨떠름한 얼굴로 어물쩍 대답했다.

“잠깐만 우리랑 같이 가자.”

“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내 손목을 우악스럽게 쥐고 끌어당겼다.

손목이 아려 와 빼려고 했지만 다른 쪽 손도 잡혀 버렸다. 과자가 바닥에 힘없이 뒹굴었다.

아, 안 돼.

나는 과자를 향해 팔을 휘적이며 버둥거렸다.

“저 동아리 가야 하는데요…….”

그리고 내 미약한 저항은 완벽하게 씹혔다.

나는 허망한 얼굴로 복도를 질질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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