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10)

“케이트 오늘 노아 선배랑 데이트하고 왔댄다.”

빵을 찢어 수프에 담그던 내 손이 멈추었다.

나는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대하는 얼굴들에다 대고 일갈했다.

“데이트 아냐. 그냥…… 잠깐 차 마시면서 뭐 좀 도움 받고 온 거야.”

“으흐흥.”

“그게 데이트지 뭐.”

음흉한 웃음소리와 심드렁한 일침에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선배가 뭐라고 했어? 내가 그렇게 꾸며 줬는데 예쁘단 말 한마디 없었으면…….”

도라가 흉흉한 기세로 주먹을 휘둘렀다.

“내 입술이 예쁘대.”

“뭐? 순 변태 아냐?”

도라가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구기자 나는 그녀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런 느낌이 아니었거든.”

“어머, 케이트가 데이트를 했다고?”

익숙한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글로리아 선배가 접시를 든 채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글로리아 선배는 에코를 보고 잠시 흠칫 몸을 굳히더니 이내 다시 하하 웃었다.

친구들은 의아해 보였지만 메리골드 추모식에 억지로 끌려갔다 온 나로서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들어 버렸네. 안녕, 케이트 친구들.”

“안녕하세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정말? 뭐래? 욕 안 해?”

글로리아 선배가 장난스레 깔깔 웃었다.

“아뇨, 재밌는 분이라고 했어요.”

“케이트가 좋은 친구들이 많네.”

나는 넉살 좋게 미소 짓는 그녀에게 손짓해 보였다.

“앉아서 같이 드실래요?”

“네, 저흰 괜찮아요.”

“아냐, 밥은 친구들이랑 먹어야지.”

나중에 데이트 얘기 다 해 주기다.

내 귀에 속삭인 그녀가 내 접시에 후식으로 나온 쿠키를 놓아 주고 윙크하며 떠나갔다.

“야, 저 선배 멋지다. 이왕이면 많이 친해져.”

“너의 인맥은 곧 우리의 인맥.”

“…….”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포크를 놀렸다.

글로리아 선배가 거물인 건 맞지만 어차피 아카데미 졸업하면 끊어질 인연일 텐데.

……아닌가? 선배가 나를 좀 많이 좋아하긴 하는데.

“뭐야, 신문 읽어? 듣기로는 신문부장 바뀌었다던데.”

“진짜? 어쩐지 별로더라. 내용도 별 시답잖은 것들밖에 없고.”

학교 신문을 내팽개치듯 내려놓은 맬러리가 다시 스푼을 들었다. 그녀가 내 접시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야, 수프 다 식는다. 얼른 먹어.”

“어…….”

나는 멍한 얼굴로 수프를 한 술 뜨다 말고 글로리아 선배가 주고 간 쿠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여기저기서 음식을 받아먹은 모양인지 포동포동해진 고양이가 햇볕 아래 누워 있었다.

자태가 어쩐지 좀 거만해진 것 같기도 했다.

이게 돼진지 고양인지.

혀를 쯧쯧 차며 쪼그려 앉아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글로리아 선배가 장난기가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놀리려는 의도가 아주 다분해 보였다.

“마음 접는다면서. 헤에, 데이트? 설명 좀 해 줘.”

“노아 선배한테 도움 받으라고 한 건 선배잖아요.”

나는 쪼그려 앉은 채 고양이를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그래서 어땠어, 어땠어?”

“……선배가 예뻤어요.”

“…….”

내 대답에 글로리아 선배가 질린 얼굴을 했다.

하지만 사실인걸.

노아 선배를 싫어하는 티가 팍팍 나는 그녀도 선배의 외모로 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닌가? 내 착각인가?

“그리고 손이 닿았어요…….”

나는 아련한 얼굴로 내 손을 들어 보였다.

“따뜻했죠.”

“와, 정말 지독하구나 너. 아니, 지독한 건 그놈인가.”

팔짱을 낀 채 근처 기둥에 기대 서 있던 글로리아 선배가 갑자기 쪼그려 앉아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럼 나랑도 데이트하자.”

“네?”

선배의 얼굴이 갑자기 쑥 내려와 당황하던 내가 어벙하게 되물었다.

내가 눈만 껌뻑이고 있자 글로리아 선배는 내 어깨에 매달려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데이트, 데이트 해 줘! 데이트으.”

“아, 좀 조용히……!”

무슨 장난감 사 달라고 떼쓰는 애도 아니고.

나는 이쪽으로 시선이 쏠릴까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았다. 본인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지만, 그녀의 사회적인 평판을 위해서였다.

바로 그때였다.

할짝.

“으악 미친!”

나는 축축해진 손바닥을 마구 털며 식겁했다.

허리에 양손을 얹고 캭캭거리며 웃던 글로리아 선배가 일순간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그래서. 대답은요, 아가씨?”

답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웠다. 나는 괜히 귀를 후벼 파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시죠.”

“아싸.”

짙은 바다색 눈동자가 기분 좋게 반달로 휘어졌다.

* * *

최애한테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받아들여졌다.

내 첫 번째 소원이 언니 소리 듣기였는데 그건 이뤘고, 두 번째 소원이 데이트였다.

후, 딱 기다려. 내가 부잣집에서 태어난 건 전부 오늘을 위함이었으리.

“큭큭큭.”

나는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지갑을 꺼냈다. 금화가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룸메이트의 시선도 이제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 * *

“데리러 왔습니다, 아가씨.”

“…….”

방문을 여니 말끔히 차려입은 글로리아 선배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침부터 봉변을 당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식겁할 만큼 큰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아니 그것까지는 견딜 만했다. 글로리아 선배의 기행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지만 사람 통행이 많은 기숙사 복도에서 이러는 건 다른 문제였다. 덕분에 시선이 몽땅 이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인생.

“와, 멋지신데요?”

갑자기 등장한 도라가 눈치 없이 칭찬을 했다.

“그러니?”

글로리아 선배가 씩 웃으며 그에 답하듯 머리를 한번 흔들자, 하나로 묶은 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파란 겉옷이 눈동자 색과 무척 잘 어울렸고 하얀 셔츠는 청량해 보였다.

죽여 줘.

그에 대비되게 황망한 얼굴로 문가에 서 있던 내가 마른세수를 했다.

아마 모레쯤이면 쓸 거리 떨어진 신문부에 의해 학교 신문에 실리게 될지도 모른다. 기숙사에서의 화끈한 프러포즈, 뭐 이딴 제목으로.

그럼 나는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학교 신문에 실릴 바에야 어제 저녁으로 나온 수프에 코 박고 죽는 게 차라리 나았다.

나는 원치 않은 관심 받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단 말이다. 그것도 저렇게 창피한 이유라면 더더욱!

“예쁘네요.”

“내가 정리해 둘게.”

내가 텅 빈 얼굴로 꽃다발을 바라보며 흐리게 웃자, 도라가 윙크와 함께 꽃다발을 받아 갔다.

“자, 가자.”

글로리아 선배가 내 팔짱을 끼고 나를 끌어당겼다.

걸음을 옮겨 교문을 나서자 도자기 인형 같은 피부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선배는…… 안 창피하세요?”

“응? 뭐가?”

내가 머뭇거림 끝에 묻자 글로리아 선배는 태연하게 웃었다.

하긴, 내가 괜한 걸 물어봤구나.

나는 하하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엥? 안 가세요?”

“응, 타!”

나는 교문 앞에서 대기 중인 마차를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우리 가문 마차와는 비교도 안 되게 고급스러웠다.

“……이게 뭐예요?”

마차 문을 연 선배가 내 볼을 쿡 찌르며 대답했다.

“뭐긴 뭐야, 마차지요.”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나는 기가 죽어 그대로 굳어 머뭇거렸다.

지금 저랑 데이트한다고 마차를 빌린 건가요, 선배.

“뭐라 해야 할지…… 엄청나네요.”

마차, 그것도 이렇게 큰 걸 대여하는 건 얼마나 비쌀까.

나는 그녀의 배포에 혀를 내두르며 마차에 올라탔다.

“점심은 제가 살게요.”

“아냐, 아냐. 내가 데이트해 달라고 떼쓴 건데.”

“아니, 마차도 빌리셨는데…….”

“아냐, 내가 살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사는 게 도리였지만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아 관뒀다.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와, 그나저나 비싼 마차라 그런지 승차감이 장난 아니네. 완전 편안해.

나는 푹신한 좌석에 감탄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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