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10)

“너 어디 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과자를 먹던 도라가 주말인데도 내 말끔한 차림새를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는 머리를 매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어, 나…… 노아 선배가 뭐 도와준대서.”

“너 그렇게 입고 좋아하는 사람 만나러 가는 거라면 오늘부터 너랑 연을 끊겠어.”

내 옷차림을 본 도라가 눈을 홉뜨고 그렇게 쏘아붙였다.

나는 새로 세탁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셔츠는 새것처럼 하얬고 치마도 깨끗했다.

따라서 그녀가 저렇게 분개할 이유는 없었다.

“그 정도야? 이게 뭐 어때서.”

교복이 깔끔하고 좋구먼.

나는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도라의 시선을 피했다.

“나도 그 선배가 썩 탐탁지는 않다만…… 그건 아니지, 교복은 아니지! 평일도 아니고 주말이잖아!”

절규하며 과자 부스러기 묻은 손을 털어 낸 도라가 내 목덜미를 잡아챘다.

“적어도 우리랑 놀 때 정도로는 입어라. 이리 와.”

“자, 잠깐. 너무 신경 쓴 티는 안 나게 해 줘.”

본능적으로 그녀가 뭘 할지 알아차린 내가 애처롭게 애원했다. 그러나 도라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너무 나만 꾸미면 좀 그렇잖아.

급기야 내 얼굴까지 손을 대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 * *

바람에 하얀 치맛자락이 살랑거렸다.

나를 청초의 끝판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도라의 말대로, 내가 조금 예뻐지긴 했는지 사람들 몇몇이 이쪽을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괜히 민망해져 손에 든 가방을 꾹 쥐고 고개를 흔들었다.

도라 얘는 내 입술에 뭘 바른 거야.

자기네 상단에서 새로 나온 화장품이라며, 내 입술에 짙게 발라 주던 도라를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묘한 답답함에 입술을 문지르니 나랑 안 어울리는,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분홍이 손가락에 묻어 나왔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가게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곱슬거리는 노란 머리카락의 여자애가 초록색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일 보는 내 얼굴인데 뭔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좀…… 예쁜가?

아, 뭐래.

괜히 내 얼굴을 더듬어 보던 내가 민망함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일찍 나왔네.”

뒤에서 노아 선배의 목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고개를 돌린 나는 인사를 하며 선배의 옷차림을 살폈다. 사복이었다.

낮게 묶은 청순한 은색 로우 포니테일 머리에……. 와, 검은 셔츠는 의왼데 또 잘 어울렸다.

와, 교복 입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고맙다 도라.

홀린 듯이 몽롱한 얼굴로 노아 선배를 바라보던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안녕하세요.”

노아 선배의 시선이 내 옷차림으로 향했다.

“옷이…….”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아, 절대 막 꾸미고 나온 게 아니라 제가 이따 저녁에 또 약속이 있어서…….”

“입술이 분홍색이네. 예쁘다.”

“아?”

선배가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나는 어벙한 침음을 흘렸다.

내 입꼬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손이 멋대로 다시 입술로 향했다. 손가락에 또 분홍색이 묻어났다.

도라야, 고마워.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고 있었다. 거리가 제법 가까운 것 같은데, 들리면 어떡하지.

“약속?”

가슴께에 손을 얹고 있는데 노아 선배가 작게 중얼거렸다.

“좋겠네.”

누굴 만나는지는 몰라도.

무슨 말이지? 내가 좋겠다는 건가, 내가 만나는 사람이 좋겠다는 건가.

……후자였으면 좋겠다.

나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얼굴을 붉혔다.

“들어갈까. 오래 서 있어서 피곤하겠다.”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

우리는 같이 카페에 들어가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예쁜 분홍색 커튼 사이로 들어온 여름 햇살에 괜스레 가슴이 설렜다.

이러니까 꼭 데, 데이트 같다.

달콤한 코코아가 담긴 잔을 기울이던 내가 괜히 얼굴을 붉히며 눈알을 굴렸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오늘 선배는 유달리 예뻤다. 평소에도 예뻤지만 오늘은 특히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창가에 앉은 탓에 어깨 위로 늘어진 선배의 다이아몬드 같은 은발이 반짝반짝 빛났다.

기다란 속눈썹이 나비처럼 아찔하게 팔랑임과 동시에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겨우 진정시켰던 심장이 다시 야단이었다.

조만간 의사에게 찾아가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어도 되는 건가.

그런 내 맘도 모르고 차를 홀짝이는 선배의 모습은 참 고왔다. 새삼 그 책의 내용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그래, 뭐 선배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기는 개뿔. 부럽다. 플로라 선배 엄청 부럽다.

“시작할까요?”

머리를 거칠게 흔들어 떠오르는 잡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지운 나는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노아 선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책을 집어 들었다. 새삼 긴장되는 것 같았다.

다행히도 작업은 수월하게, 그리고 담백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런데 여기 문자 배열하기에 공간이 조금 부족하네요.”

“이걸로 대체하면 될 것 같아. 여긴 이 수식을…….”

노아 선배가 펜을 쥔 손을 이쪽으로 뻗는 것과 동시에 내 손에 온기가 느껴졌다.

차가울 줄 알았던 손은 의외로 따뜻했다. 손가락도 길쭉길쭉하고 참 하얗고 예쁘고 부드럽고…….

나는 숨을 멈추고 황급히 손을 뒤로 뺐다.

이 무슨 삼류 로맨스 소설 같은 전개야.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나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수식에 집중했다.

“다 됐다!”

얼마 후, 나는 완성된 수식과 문자들로 꽉 찬 공책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르다, 아차 하고 노아 선배에게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뭘.”

희미하게 웃어 보인 선배가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우리 영지의 유일한 마법사는 나였다. 다른 마법사도 마도구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나는 마법을 전부 독학으로 배워야 했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저희 영지에는 마법사가 저밖에 없어요. 그래서 처음 아카데미에 와서 다른 마법사들이나 마도구를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다니까요.”

물론 선조들 중에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 가문은 제법 오래되었고 나는 선조들에 대해 전부 외울 정도로 성실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마법이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하고 싶어요.”

나는 남은 코코아를 마저 홀짝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 그걸 지금 왜 말했지. 멋진 척한 것 같잖아.

말해 놓고서도 조금 부끄러워서, 나는 코를 만지작거리며 선배를 흘끗 보았다.

“멋지다.”

노아 선배는 이번에도 맑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직 부족하죠, 뭐.”

“있잖아.”

선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자, 나는 괜히 심장이 간질간질해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네.”

“괜찮으면 다음 약속 갈 때까지 조금만 더 있을래?”

“그럴까요?”

냉큼 대답해 놓고서도 좀 민망해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달다.

나는 다 마신 코코아 잔을 다시 입에 가져다 대며 괜스레 입맛을 다셨다.

* * *

저녁은 아카데미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노아 선배와 밖에서 저녁까지 먹는 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지만, 플로라 선배의 눈치가 보인달까.

해가 쨍하게 저물어 갈 무렵 우리는 아카데미까지 걸어갔다.

“저 이제 들어가 볼게요. 오늘 감사했어요.”

기숙사에 도착하자 나는 인사와 동시에 몸을 돌렸다.

“거짓말했구나.”

“네?”

갑자기 들린 노아 선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내가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선배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약속 없잖아.”

“!”

그제야 내가 자연스럽게 기숙사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맞다, 난 저녁에 약속 있는 사람이었지. 아, 설정을 잊어버리다니.

나는 고뇌 끝에 입가를 가리고 변명했다.

“어……네, 중간에 보니까 제가 날짜를 착각했더라고요.”

“그래?”

선배가 조금 풀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난 또. 내가 너무 오래 잡아 둔 줄 알고 미안했네.”

“아니에요. 더 있겠다고 한 건 전데요, 뭐.”

노아 선배의 손이 내 머리에 묶인 리본 자락을 스쳤다. 괜히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어 은색 머리카락이 작게 흔들렸다.

선배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곱게 묶은 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붉었다.

“그럼 나 만나려고 이렇게 입고 왔다고 생각해도 돼?”

“……!”

암요.

분위기와 선배의 미모에 휩쓸려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하여간 입이 방정이라니까.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인정하기는 너무 부끄러워 고민하던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사실…… 친구가 억지로 입혔어요.”

막, 제 얼굴에 뭘 바르고 입히고.

“……그랬구나.”

나는 머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걔가 저희 사이를 조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어떻게 오해하는데?”

선배가 진중한 얼굴로 물어왔다.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는 하늘거리는 원피스 소매를 꼭 쥐고 고개를 들며 웃었다.

“……저, 조금 피곤한데 이만 들어가 봐도 될까요.”

노아 선배는 거기서 더 캐묻거나 따지지 않았다.

“그래.”

그냥 여상히 웃으며 잘 가라 배웅할 뿐이었다. 안경알 너머의 금색 눈동자는 여느 때처럼 다정하고 예뻤다.

그런데 그 모습이 더 눈에 밟히는 건 왜일까.

“에잇.”

정신 차려.

가만히 서서 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내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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