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10)

나는 파렴치한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연신 손사래를 쳤다.

“아냐, 진짜야. 나 방금 왔어.”

“……진짜?”

내 억울하다는 표정에 아르한이 의심스레 미간을 좁혔다.

“그렇대도.”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문득 드는 의문에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근데 넌 왜 여기서 갈아입고 있었어?”

“윗옷을 밖에 빠뜨리고 왔어.”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며 아르한이 툴툴거렸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그래.”

어쩐지 분위기가 조금 어색했다.

큼큼,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고개를 돌렸다. 손이 자동적으로 뒷목으로 향했다.

“왜 자꾸 그렇게 목을 긁어? 모기 물렸어?”

“아? 아, 아무것도 아냐.”

괜히 찔려서인지 내가 들어도 무척 수상한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선배가 내 목을 만졌는데 그게 자꾸 생각난다고 사실대로 답할 수는 없잖아.

“자, 여기.”

벤치에 걸터앉은 아르한이 제 겉옷을 벗어 벤치에 깔았다.

“오, 고마워.”

나는 조심스레 겉옷 위에 앉았다.

바람이 선선해서 좋았고, 우리는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참, 너 혹시 글로리아 선배 알아? 같은 학부잖아.”

검술학부는 같이 훈련하고 대련하는 경우가 많아서 다른 학년끼리도 접점이 많았다.

“어, 유명하니까 당연하지. 대련해 본 적 있는데 죽을 뻔했어.”

아르한이 옅게 진저리를 치며 대답했다.

“저런, 내가 혼내 줄까?”

“누나가?”

내가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말에 아르한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자식이.

“아는 사이야?”

“응, 같은 동아리.”

“엥?”

물을 마시던 아르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물을 꿀꺽 삼킨 그가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졌다.

“같은 동아리라고? 독서 토론부? 그 선배가?”

“알아, 좀 안 어울리지. 그런데 잘 하셔.”

글로리아 선배는 보기와는 달리 성실한 편이었다. 마냥 껄렁한 줄 알았는데 늘 책도 잘 읽어 오고 감상평도 잘 말했다.

“와, 의외네.”

붉은 눈동자가 잔뜩 찌푸려졌다.

“왜 하필? 검술 동아리도 있는데.”

“글쎄, 나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조금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르지만, 글로리아 선배가 나한테 죽고 못 사는 건 사실이니까. 윽, 이상하게 들려.

“조금 독특한데 재밌는 선배야.”

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었다.

그에 아르한이 눈가를 찡그리며 비음을 흘렸다.

“흐음.”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아르한의 얼굴을 꼬집으며 묻자 그가 엄살을 부리며 뺨을 문질렀다.

“그냥, 경쟁자가 늘어난 것 같아서.”

“뭐래, 저 선배랑 논다고 내가 너랑 못 놀아 주는 것도 아니고.”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아르한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야, 아까 봤는데 저쪽 후원에 새가 있더라고.”

아르한의 어깨를 두드린 나는 포르르 날아가 버린 파랑새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어렸을 때 기억나? 네가 새총 갖고 놀다 둥지 맞혀서 아기 새 다리가 부러졌는데, 우리가 울면서 마을까지 데리고 간 거. 그 새도 파랑새였는데.”

아르한이 시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잊겠어.”

“결국 우리 할머니가 고쳐 주셨잖아.”

한번 물꼬를 트니 어린 시절 이야기가 계속 나왔다.

“있잖아.”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아르한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누나만 괜찮으면 가끔 여기서 만날래? 우리 마주치는 주기가 너무 불규칙적이야.”

“아, 그래. 난 동아리 날마다 여기 지나가니까.”

“남자 탈의실 앞을?”

눈을 가늘게 뜬 아르한이 되묻자 나는 눈알을 굴리며 볼멘소리를 했다.

“아니, 길이 그런 걸 어째.”

“알았어, 그럼.”

장난스레 웃어 보인 아르한이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봐.”

* * *

아카데미 후원 옆을 지나고 있으면 꼭 왕족이라도 된 기분이 든다.

아카데미 복도 중에서 가장 화려했고, 바로 옆에 보이는 후원은 귀족 저택 정원만큼 관리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손에 든 책을 끌어안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혀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때.

어딘가 엷고 가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기가 칭얼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짐승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소스라치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에잇.”

어디서 환청이 들리나.

나는 귀를 후비며 인상을 썼다. 별것 아닐 것이다.

그런데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시 소리가 들렸다.

……설마.

나는 아카데미에 전해져 내려오는 괴담을 떠올렸다.

옛날에 학생 하나가 후원 연못에 빠져 죽은 적이 있는데, 혼자 후원을 지날 때면 그 학생의 원혼이 나타나 연못 속으로 끌고 간다나 뭐라나.

물론 연못이 사람이 익사할 만큼 깊지 않은 데다 귀신 같은 걸 믿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 그냥 웃고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괴담을 떠올리자마자 등골이 오싹했다.

애써 무시하고 지나가려는데,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다만 이번에는 소리의 출처가 확실했다.

“야옹.”

“……고양이?”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재빠르게 달려갔다.

고양이 한 마리가 수풀에서 나와 꼬물거리고 있었다. 흙이 조금 묻은 털은 하얀 색이었다.

“어유, 어쩌다 여기에 왔니, 너처럼 예쁜 애가?”

조심스레 다가간 나는 자그만 고양이를 건드릴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하고 가만히 쪼그려 앉아 있었다.

샛노란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고양이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어딘가를 향해 도도도 걸어갔다.

그곳엔 지나가던 노아 선배가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뭐야, 언제 왔어. 어째 요즘 자주 마주치는 것 같네.

“야옹.”

고양이는 선배의 다리에 몸을 친근하게 비비더니 꼬리까지 살랑였다.

나는 얼빠진 얼굴로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선배? 아는…… 고양이예요?”

“……아니. 처음 봐.”

그것도 잠시, 선배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능숙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고양이가 골골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노아 선배를 바라보았다.

지난번 우리 영지에 왔을 때도 그렇고, 동물을 다루는 데 익숙한 것 같은데 길러 본 적이 있나?

“능숙하시네요.”

“어렸을 때 여동생 고양이를 돌봐 준 적이 있어.”

“아아.”

난 강아지는 몰라도 고양이는 조금 대하기 어려운데.

나는 어정쩡하게 쪼그려 앉아 고양이와 선배를 바라보았다.

바짓단에 몸을 비비며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와 그걸 부드럽게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는 노아 선배.

“……귀엽네요.”

나는 곧바로 황급히 덧붙였다. 내가 말해 놓고서도 조금 부끄러운 탓이었다.

“고양이가요.”

“만져 볼래?”

“엇, 괜찮을까요?”

한참 머뭇거리던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보송보송한 솜털에 손가락 끝이 닿으려는 그 순간.

“하악!”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얌전하던 고양이가 사납게 하악질을 함과 동시에 손등이 아릿했다.

“아야, 습.”

나는 인상을 쓰며 손을 내렸다.

상처가 깊지는 않았지만 아픔과는 별개로 조금 서러웠다.

너 사람 차별하니. 선배한테는 그렇게 애교를 부리더니만.

다른 학생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앙큼한 고양이는 수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쪼그려 앉은 채 당황하던 우리 둘 중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노아 선배였다. 선배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 손을 잡고 날 일으키더니 양호실로 데려갔다.

선배는 나를 치료해 주려는지 약 여러 개를 집어 들었다.

“아, 괜찮은…….”

괜찮은데.

그렇게 말하려던 나는 선배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딱 봐도 죄책감 장난 아닌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양호실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손을 내밀고 있으니 상처 위로 소독약이 흘러내렸다. 나는 밀려오는 아픔에 신음하며 한손으로 시트를 미친 듯이 두드렸다.

“흐윽.”

약을 붓던 손길이 잠시 멈췄다. 그 바람에 소독약이 줄줄 흘러 팔까지 적셨다.

“……아, 미안.”

머지않아 정신을 차린 노아 선배는 허둥지둥 선반에서 천을 들어 내 팔을 닦아 주었다.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기까지, 나는 필사적으로 신음을 참았다.

어려운 문제를 푸는 것처럼 심각한 낯을 하고 내 손에 붕대를 감는 선배에게 차마 굳이 붕대까지 감아야 할까요, 하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 바람에 내 손은 붕대가 칭칭 감겨져 부풀어 오른 모양새가 되었다. 펜은 간신히 잡을 순 있을 거 같으니 다행이었다.

“미안해.”

죄책감 범벅인 얼굴로 노아 선배가 말했다.

“네? 할퀸 건 그 고양이인데 왜 선배가 사과를 하시나요.”

“만져 봐도 된다 한 건 나니까……. 순한 줄 알았어.”

나는 조금 당황스럽게 침을 삼켰다. 과보호를 받는 기분이었다.

진짜 괜찮은데.

살다 보면 넘어져서 상처 날 수도 있고 계단에서 구를 수도 있다. 그리고 난 그걸 다 겪어 봤다. 고양이가 좀 할퀸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긴, 선배는 대귀족가 도련님이니까 이런 게 큰 부상으로 보일 수도 있겠네.

“상처가 신경 쓰이면 플로라한테 가 보는 것도 좋아.”

선배는 아직도 걱정이 되는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아, 그랬지. 플로라 선배는 신성 능력자였다. 그런데 그 대단하다는 신성력을 고양이 할퀸 상처에 쓰긴 좀…….

나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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