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10)

노아스는 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꽤 먼 거리였지만 분명히 보였다.

입술이 닿았다.

케이틀린을 끌어안고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글로리아가 입을 뻐끔거렸다.

‘뺏긴다고 그랬잖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자신이 감히 이런 기분을 느낄 자격이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염치없게도 가슴이 아팠다. 속상하고 질투도 났다. 속이 울렁거렸다.

모두 추악하기 그지없는 감정들이었다.

이러면…… 이러면 안 된다. 부담 주고 싶지 않은데.

“가만히 서서 뭐 하냐? 내 생일 선물 내놔.”

가만히 벽에 기대선 노아스에게 글로리아가 신나게 과자를 씹으며 다가왔다. 어째 강도 같은 대사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생일이었던가. 방해를 받아 찌푸려진 금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선물 줘, 선물.”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던 글로리아가 포기했는지 쯧, 하고 혀를 찼다.

“하긴 네가 생일빵이나 안 때리면 다행이지.”

노아스는 늘 그랬듯 글로리아가 쓰는 영문 모를 단어를 무시하고 대꾸했다.

“……나중에 줄게.”

“이열.”

글로리아가 의미 없는 탄성을 지르고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노아스가 눈알을 굴려 건조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둘이 무슨 사이야.”

뭐라는 거야?

뜬금없는 말에 잠시 두 눈을 깜빡거리던 글로리아가 입가에 묻은 과자 가루를 핥으며 알아들었다는 듯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흐흐흥.”

붉은 입술이 사악하게 찢어졌다.

“네가 케이트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래?”

“…….”

“아주 그냥 푹 빠졌네, 푹 빠졌어.”

노아스가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자, 글로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 이왕이면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좀 알려 주지 않을래? 내가 유학 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비켜.”

차갑게 일갈한 노아스가 자신을 지나쳐 걸어가자, 아쉽게 입맛을 다시던 글로리아가 쯧쯧 혀를 찼다.

“짠한 놈.”

그래도 내 예쁜이가 싫다는데 어쩌겠니. 어디 한번 열심히 해 봐.

어깨를 한번 으쓱한 그녀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걸음을 옮겼다.

* * *

나는 얌전히 책을 읽다 말고 동아리 교실 문가를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로 은색 뒤통수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고 있었다. 노아 선배는 키가 커서 다 보였다.

뭐 하는 거지?

나는 황당한 얼굴로 일어서 문가로 다가갔다.

인사는 해야겠지. 지난번에 조금 당황스럽게 헤어지긴 했지만.

“안녕하세요.”

내가 교실 문을 열자 선배는 지상에 올라온 생선처럼 몸을 파드득 떨었다.

“아, 안녕.”

아, 안녕?

왜 말을 더듬지?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선배가 들어올 수 있도록 뒤로 물러났다.

나를 쌩 지나쳐 자리에 앉은 선배는 평소와는 달리 내 눈도 못 마주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기분이 이상하지.

고개를 돌리는데 노아 선배와 눈이 딱 마주쳤다. 입을 몇 번 뻐끔거리던 선배가 결심했다는 듯 말을 꺼냈다.

“저, 실례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글로리아랑……무슨 사이야?”

불편하면 대답 안 해도 돼.

선배가 황급히 덧붙였다. 황금색 눈은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뭔 소리람?

내 얼굴이 어쩔 수 없이 일그러졌다.

“그냥 선배…… 친한…… 선배죠.”

떠듬떠듬 대답해 놓고서야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나는 뜨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설마 제가 글로리아 선배랑, 그, 그런 관계인 줄 아셨던 거예요?”

글로리아 선배가 내 볼에 입 맞춘 걸로? 그건 여학생들끼리는 할 수 있는 장난 아냐? 아닌가? 고위 귀족들은 안 그러나? 아니, 그럼 글로리아 선배는?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가는 가운데 조금 풀어진 얼굴의 노아 선배가 입을 열었다.

“……아니었구나.”

“굉장히…… 편견 없으시네요. 근데 아니에요.”

나는 노아 선배를 흘끗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저는…… 남자가 좋아요.”

“…….”

아, 아. 왜 이래, 제발.

꼭 고백하는 것 같은 투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노아 선배는 아, 하고 어색한 침음을 흘렸다.

나는 슬쩍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렸다.

어떡해, 좀 찌질한데 귀여워.

나도 참 중증이네.

나는 신발 밑창으로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응, 알겠어.”

노아 선배가 활짝 웃었다. 그것도 엄청 활짝. 활-짝. 따뜻한 색의 눈동자가 반달로 접혔다.

나는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노아 선배가 그렇게 활짝 웃는 모습은 처음 본 데다, 선배의 웃는 얼굴이 봄꽃처럼 청순하면서 여름날 분수처럼 청량했기 때문이다.

크윽, 볼 때마다 세상의 불공평함을 깨닫게 되는 얼굴.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고개를 돌렸다.

어째 요즘 노아 선배의 몰랐던 부분을 많이 알게 되는 것 같다.

마법 책만 파게 생겨서 로맨스 소설을 좋아한다거나, 단것도 좋아한다거나, 은근히 맹한 구석이 있다거나.

상당히 귀엽다.

짝.

나는 내 양 뺨을 가볍게 내리쳤다.

야, 정신 좀 차려.

“후우.”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눈알을 굴려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선배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상대방을 생각하는 만큼 상대방도 나를 생각해 주길 바란다.

불공평하잖아. 내 머리는 온통 선배로 가득 차 있는데 선배는 아니라는 게.

선배도 내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내가 1년이 넘도록 짝사랑을 하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과연 선배와 내 사이에 가망이 있긴 할까?

지인으로야 뭐 그럭저럭 지낼 수 있겠지만,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연인으로는 좀 아닌 것 같다. 싫다는 게 아니라 급이 맞지 않는다는 거다.

노아 선배는 수도의 명문가 자제, 나는 변두리 지방 영주의 딸. 우리의 신분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선배가 황궁 마법사 자리에 내정되어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이면 아카데미 졸업하면 우린 떨어지게 될 테고.

만약 우리가 잘돼서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해도 아마 나는 가문을 이어야 할 텐데, 선배 같은 사람이 우리 집안에 데릴사위로 오려고 할까? 유리엘 후작가에서 나랑 결혼하는 걸 허락하긴 할까?

……아, 너무 설레발 쳤다. 나 지금 뭐하니, 단념한다고 했으면서.

나는 머쓱하게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나 지금 선배랑 결혼 생각까지 간 거냐. 스스로도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때마침 다른 선배들이 들어왔고 나는 금세 잡념들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 * *

요즘 플로라 선배가 부쩍 기분이 좋아 보인다. 애인이랑 사이가 많이 좋은가 보다.

남자친구의 손을 잡고 멀어져 가는 플로라 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내가 몸을 돌렸다.

언젠가 슬퍼할 그녀를 생각하면 조금 안타깝기도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새다…….”

아카데미 안까지 날아온 건가. 예쁘게 생겼네.

나뭇가지에 앉은 파랑새는 내가 무섭지도 않은지 도망가지 않았다.

“깜짝이야.”

바로 옆에 서 있는 노아 선배를 마주친 내가 몸을 흠칫 떨었다. 언제 와 있었대?

그것도 잠시, 나는 침착하게 고개를 돌렸다.

“안녕.”

“선배도 새 보고 계셨어요?”

“응.”

“동물 좋아하시나 봐요.”

“그런 편이야.”

그래, 동물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지.

속으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새가 나뭇가지에서 포르르 날아오르더니 노아 선배 어깨에 앉았다. 그러더니 삐이 삐이 지저귀기 시작했다.

“우와! 뭐예요, 마법이에요?”

아니면 동물도 예쁜 사람을 알아보고 오는 건가.

내가 어쩔 줄 모르며 선배에게 다가가자, 새는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앗…….”

아쉬운 얼굴로 새가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던 그때.

“!”

문득 셔츠 안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뭐가 들어온 건지, 안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파드득 몸을 떨었다.

“뭐. 뭐예요? 벌레예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 뒤에 서 있던 노아 선배에게 물었다. 그에 선배는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냥 나뭇잎이야.”

“휴우.”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벌레인 줄 알고 노아 선배 앞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윽.”

나는 셔츠 안에 들어간 나뭇잎을 빼내려 팔을 등 뒤로 뻗었다. 그러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젠장, 내 팔이 이렇게 짧았다니.

“빼…… 줄게.”

내 팔 길이에 절망하며 버둥거리고 있는 내게 노아 선배가 다가왔다. 긴장한 듯 평소보다 호흡이 불규칙적이었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았냐면 내 목가에 선배 숨결이 닿았기 때문이다. 간질간질한 자극에 솜털이 오소소 돋았다.

으악, 살려 줘. 나는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나 지금 목까지 빨개졌으면 어떡하지?

선배의 손가락 끝이 내 뒷목에 닿았다.

온몸의 근육이 긴장된 채 목석처럼 서 있는데, 몇 초 지나지 않아 내 옷에서 나뭇잎을 빼낸 노아 선배가 멀어졌다.

아무래도 내가 나뭇잎 위치를 헛짚은 모양이었다. 목깃에 붙어 있었던 건가.

“저, 전 이만 가 볼게요!”

선배에게 인사를 하고 급하게 돌아선 나는 뒷목을 벅벅 긁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르…….”

남자 탈의실을 지나던 중, 익숙한 붉은 머리가 보여 인사를 하려던 나는 어색하게 손을 내렸다.

어째 옷이…… 왜 옷을 덜 입고 있지?

그랬다. 아르한은 윗옷을 덜 입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씻은 다음 옷을 갈아입던 참이었는지 단추 여러 개가 풀려 옷깃이 벌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맨살과 깊게 파인 쇄골이 드러났다.

어, 어우.

덜 마른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아르한이 이쪽을 보더니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악!”

방금 엄청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괜히 헛기침을 하며 서 있는데, 뒤돌아서서 옷 단추를 잠근 아르한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봤지?”

“아, 아냐. 진짜야.”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나는 말을 더듬었다.

아르한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선 추행이라도 당한 듯 두 팔로 제 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자기가 옷을 아예 벗고 있었을 때부터 봤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꼭 치한이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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