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리아 선배는 좋은 사람이었다.
참 통도 크고 잘 웃고, 고위 귀족답지 않게 털털한 면도 있다.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이럴 때는 정말 불편해 죽을 것 같았다.
“얘야, 얘! 완전 귀엽지?”
나는 내 어깨동무를 하고 자신이 제일 아끼는 후배라며 웃는 글로리아 선배의 눈을 피했다.
나를 향한 3학년 선배들의 눈길이 따가웠다.
아카데미는 작은 사회나 다름없었다. 소위 급이 맞는 사람들끼리 뭉쳐 다녔으며 대부분은 자기 주제를 알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 그래……?”
제국 유일 공작가의 영애는 아직 입학 전이고 노아 선배는 차남인 지금, 글로리아 선배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귀족이었다,
그런데 글로리아 선배가 웬 듣도 보도 못한 애를 이렇게 대놓고 편애하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그동안 아는 애들과만 어울리며 있는 듯 없는 듯 평범하게 지내 왔던 나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너무 괴롭히는 거 아니야? 애 표정 좀 봐, 싫어하잖아.”
그렇게 말하며 나를 가리키는 한 선배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분명 입꼬리는 웃고 있는데, 참 신기했다.
“너도 참, 우리가 얼마나 친한데. 그렇지, 케이트?”
“네에…….”
다행히 내게 쏠려 있던 관심은 금방 거두어졌다.
“그나저나 너 계속 그 독서 동아리에 있을 거야? 그다지 득 될 것도 없어 보이는데.”
연갈색 고수머리를 한 선배가 글로리아 선배의 손을 덥썩 잡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선배도 이죽거리며 거기에 동참했다.
“그래, 책 읽고 감상평이나 쓰는 게 재밌어?”
뭐라고.
나는 보일락 말락 미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내 동아리에 엄청난 애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동아리 부원으로서 무시하는 말을 들으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나보다 지위 높은 선배한테 덤비는 건 자살행위였으므로 반박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흥, 자기들은 사교 활동이랍시고 허구한 날 차 마시고 수다나 떨면서.
“지금이라도 사교 클럽 들어오지 않을래? 플로라 걔는 탈퇴한다고 하면 들어줄 것 같은데? 착하잖아, 걔.”
역시 이게 목적이었군.
조용히 관전만 하던 나는 불편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글로리아 선배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설마 의리 없게 진짜로 동아리 옮기지는 않겠지?
내 걱정과는 달리 글로리아 선배는 눈 깜짝 하지 않고 방글방글 웃으며 답했다.
“내가 거기 들어가서 더 득 볼 건 있고?”
“어, 어?”
글로리아 선배가 어깨를 으쓱하며 눈알을 굴렸다.
“그렇잖아, 난 거기 누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데.”
완곡한 거절이나 다름없었는데도, 그 선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설득하려 입을 열었다.
“그래도 친구 더 사귀면 좋잖아.”
그에 고개를 갸웃한 글로리아 선배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모습에 비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뭐, 굳이……?”
그런 별 볼 일 없는 애들 사귀어봤자 뭐 해.
아마 그런 뜻이겠지?
순식간에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글로리아 선배는 싸해진 좌중에 대고 천진한 얼굴로 다시 한번 폭탄을 날렸다.
“아, 그런데 너 이름이 뭐였더라?”
“……!”
방금까지만 해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던 그 선배의 입꼬리가 완전히 허물어졌다.
“어, 너희 표정이 왜 그래?”
글로리아 선배가 영문 모른다는 듯 한마디 하자 순식간에 선배들의 얼굴이 다시 펴졌다. 하지만 전부 어딘가 썩어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슬며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무서운 사람.
* * *
정정한다. 글로리아 선배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내 앞에서는 발톱을 숨기고 애교나 부리더니, 알고 보니 맹수였다.
“신경 쓰지 마.”
그 무리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나서, 글로리아 선배가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파티만 나가면 엄청 들러붙던 애들이야.”
“아.”
수도의 사교계에 대한 괴담은 나도 알음알음 들어본 적 있었다.
나는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그런데 저는 왜 데리고 가셨어요.”
“무서워서. 걔네 눈에 독기 품은 거 봤지?”
그것보다 선배가 더 무서웠거든요.
되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던 글로리아 선배가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니, 너랑 있는데 걔들이 먼저 말 걸었잖아.”
그건 그렇지.
선배랑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다가오길래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3학년 층도 아닌데.
“그리고 오늘 내 생일이잖아. 하루 종일 같이 있어 주기로 했으면서.”
그것도 그랬다. 반강제였지만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걱정 마. 누가 널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있는데?”
“느끼하네요…….”
선배의 윙크에 황당하게 눈알을 굴리던 내가 그녀에게 무언갈 내밀었다.
“아, 이거 드리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짙은 파란색 양장 노트였다. 가게에서 가장 좋은 걸로 고른 거였다.
“생일 축하해요.”
“얘는, 됐대도! 야, 근데 진짜 예쁘다. 고마워.”
글로리아 선배가 공책 표지를 만지작거리며 활짝 웃었다.
“이건 또 언제 샀어?”
“어제 잠깐 시간이 나길래 다녀왔죠.”
미리 알았다면 더 좋은 걸 준비했을 텐데.
아카데미 바로 옆에 있는 문구점에서 급하게 산 공책이 조금 부끄러웠다.
선배는 훨씬 좋은 선물을 많이 받았겠지?
“그런데 왜 아무도 축하 안 해 줘요? 아까 그 선배들도 그렇고.”
나는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걔넨 내 생일에 관심 없어. 아마 오늘이었다는 것도 모를걸.”
내가 안 알려 준 것도 있지만.
공책을 소중히 품에 끌어안은 글로리아 선배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올해 내 생일에 선물 준 건 너랑 플로라뿐이야.”
“아…….”
“아, 생각해 보니까 이 자식은 왜 안 주냐?”
글로리아 선배가 별안간 중얼거리며 침음을 흘렸다.
“으음, 노아스한테 선물이나 뜯으러 갈까.”
“그래도 좀 만만하게 보고 계시는군요.”
“뭐, 걔가 싸가지가 없는 거지 본성이 나쁜 건 아니니까?”
아닌가.
그녀가 곧바로 고개를 갸웃했다.
뭐예요.
“있잖아, 그럼 내가 도와줄까?”
“네?”
“마음 접고 싶다며. 내가 도와줄게.”
글로리아 선배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마냥 즐거운 얼굴로 씩 웃었다.
붉은 입술이 매끄러운 미소를 그렸다.
“……?”
“이상하다, 이러면 안 넘어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내가 아무 반응 없이 가만히 서 있자 그녀가 당황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입가를 가리고 킥킥 웃었다.
“선배 지금 제가 한 13살 때 읽던 연애 소설 남주인공 같아요.”
“오, 로맨스 소설 남주인공? 나 멋있다는 거야?”
“듣고 싶은 것만 골라듣지 마시고요.”
“너무하네.”
내 일침에 입이 댓 발 튀어나온 글로리아 선배가 툴툴거렸다.
“그래서 어떡할래?”
“뭘 어떻게 하신다는 건데요.”
“플로라가 그랬거든, 나랑 놀면 아무 생각도 안 난다고.”
좋은 거 맞아요?
나는 의심스레 미간을 좁혔다.
“그냥 놀자는 거 아니에요?”
“어, 들켰다.”
선배가 내 볼을 쿡 찌르며 웃었다. 마냥 밝고 해사한 웃음이었다.
“알았어요. 놀아 드릴게요.”
“아싸.”
내 목을 끌어안은 글로리아 선배가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너네 반에 놀러가도 돼? 매점 같이 갈까?”
“네네, 사 주시려고요?”
선배에게 이끌려 복도를 걷고 있는데 저만치서 노아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파앗, 나를 본 선배의 얼굴이 반가움으로 물들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으윽.
어쩐지 눈부셔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야, 내 선물 내놔!”
“안녕.”
“저거 내 말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거 봐.”
글로리아 선배가 성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노아 선배에게 어정쩡하게 까딱 고개를 숙여 보였다.
“흐음.”
옆에서 글로리아 선배가 무언가를 고민하는 소리가 났다.
노아 선배에게 인사를 제대로 다시 해야 하나 고민하며 가만히 서 있던 그때.
쪽.
별안간 뺨에 차가운 입술이 닿았다.
“?!”
뭐, 뭐야.
나는 황급히 볼을 문지르며 옆을 돌아보았다. 글로리아 선배가 씨익 웃고 있었다.
아, 뭐야. 또 장난인가.
이 선배의 기행에 익숙해진 나머지 이젠 내 볼에 뽀뽀를 해도 그다지 놀랍지 않다.
내 어깨를 끌어안은 글로리아 선배는 히죽 웃으며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엔 노아 선배가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
“……!”
나와 눈이 마주친 노아 선배는 흠칫 놀라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다가 기둥에 부딪혔다.
“이크.”
“끄흡.”
걱정스러운 표정의 나와는 달리 글로리아 선배는 배를 잡고 꺽꺽대며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아까는 그래도 미미하게 실실대기만 했는데, 지금은 한 옥타브 올라간 소리로 까악까악, 까마귀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웃긴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웃음 포인트가 뭐지?
“꼴좋다, 크흡.”
흐느끼다시피 웃어서 새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닦으며 그녀가 중얼거리는 사이, 노아 선배가 어쩐지 비틀거리는 동작으로 멀어져 갔다.
“자, 저 멍청이는 신경 쓰지 말고 우리끼리 놀자.”
“선배, 뭐 하신 거예요? 왜 저래요?”
나는 혼란한 기분으로 글로리아 선배를 돌아보았다.
선배는 늘 그렇듯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답했다.
“그보다 언니라고 한번 불러 볼래? 언제까지 선배라고 부를 거야?”
“네?”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뭐예요, 왜 갑자기 말을 돌리고 그러세요, 불안하게.”
“응? 아니야. 그냥 생각나서. 얼른 언니라고 불러 줘어. 내 생일이잖아.”
나는 노아 선배가 부딪혔던 기둥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노아 선배는 괜찮을까요.”
“걱정 마. 당분간은 너한테 말도 못 걸 거야.”
내 말을 글로리아 선배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흘렸다.
“내가 결계를 쳐 놨지.”
그녀가 내 뺨을 문지르며 능글맞게 웃었다.
와…… 느끼해.
나는 차게 식은 얼굴로 그런 선배의 팔을 끌어당겼다.
“네네, 매점이나 가요, 언니.”
“언니? 언니?! 방금 언니라고 한 거야? 와, 나 소원 성취했어.”
그 뒤에 들려오는 소리는 무시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