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10)

이번 책의 내용이 조금 쉬워서인지 오늘은 동아리가 조금 일찍 끝났다.

어차피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기에 그때까지 동아리 교실에 있다 가기로 했다.

“아, 선배. 전에 말씀드렸던 거요.”

나는 플로라 선배에게 내가 샀던 캐러멜 한 봉지를 건넸다.

“우아, 고마워.”

내가 준 캐러멜을 입에 넣은 플로라 선배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글로리아 선배에게 말했다.

“어, 이거 리아 네가 전에 사 왔던 거 아니야? 맛있어서 기억하고 있었지.”

“맞아. 내가 한번 케이트한테 줬는데 맛있다고 하더라고.”

“와, 둘이 그새 많이 친해졌나 봐? 잘됐다!”

“아, 그럼. 우린 서로 비밀도 공유했는걸.”

내 어깨를 감싼 글로리아 선배가 건너편에 앉은 노아 선배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노아 선배의 고운 미간이 미미하게 구겨지는 게 보였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비밀? 뭔데?”

“비밀이야.”

글로리아 선배의 대답에 플로라 선배가 서운한 얼굴을 했다.

“뭐야, 뭔데. 나도 알려 줘, 궁금해.”

“미안. 좀 개인적인 일이라.”

“아, 알겠어.”

글로리아 선배가 시무룩한 표정을 한 플로라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 평화로웠다.

문득 이쪽을 빤히 바라보던 노아 선배와 눈을 마주쳤다.

“뭘 봐?”

내 어깨동무를 한 글로리아 선배가 시비를 걸었다. 그에 노아 선배가 드물게 가시 돋친 투로 답했다.

“너 안 봐.”

그에 글로리아 선배는 애교가 철철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용은 전혀 애교스럽지 않았지만.

“그럼 눈깔을 돌리던가.”

살벌하구먼.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플로라 선배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지 그냥 허허 웃고만 있었다. 어쩐지 해탈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렇게 사이가 안 좋은데 글로리아 선배가 노아 선배를 좋아한다고 오해했던 과거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역시 편견은 나쁘다.

그런데 둘은 왜 저렇게 서로를 싫어하지.

나는 눈을 굴려 두 선배를 흘끗 바라보았다.

노아 선배가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가만히 있으면 조금 차가운 느낌이고, 글로리아 선배는 말할 것도 없이 냉미녀지.

이를테면 동족 혐오 같은 건가? 비슷한 계열의 미인이라 그런가?

턱을 괸 채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비 종이 쳤다.

“어, 가야겠다.”

글로리아 선배는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끼고 문으로 이끌었다.

나도 따라가려는데 노아 선배가 뒤에서 어색하게 내 어깨를 잡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미묘한 감촉을 남기며 떨어졌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리곤 글로리아 선배를 향해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넌 빠지고.”

“먼저 가세요, 선배.”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펄펄 뛰기 시작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곤 노아 선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요한 복도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꾹 다문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종이 언제 칠까 불안해하고 있는데 노아 선배가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네?”

저게 무슨 소리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무슨 소린지 이해하려 애쓰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왜 그렇게 느끼셨는지 잘 모르겠네요.”

노아 선배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자꾸 내 눈을 피하니까…….”

“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선배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다시금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그 캐러멜.”

노아 선배가 분홍색 입술을 달싹였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내가 그걸 왜 줬다고 생각해?”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었다.

진정해, 진정. 평소처럼 대답하면 돼.

곧이어 슬쩍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들곤 자신 없는 투로 대답했다.

“선배는 친절하시니까요……?”

“……고마워.”

잠시 멍한 얼굴로 서 있던 노아 선배가 뺨을 슬며시 붉히며 어색한 답변을 내놓았다.

혹시 친절하다는 것도 칭찬이라고 좋아하는 건가.

“네.”

계속 서 있자니 어째 점점 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아파 오는 다리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문득 드는 의문에 입을 열었다.

“저, 혹시 글로리아 선배랑 사이가 많이 안 좋으신가요?”

전부터 둘이 만나면 늘 공기가 살벌해지곤 했다.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으음. 그냥 성격 차이야.”

곤란한 얼굴을 한 노아 선배가 침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하긴 항상 여유롭고 어딘가 가벼운 면이 있는 글로리아 선배와 늘 초연하고 조용한 노아 선배는 궁합이 조금 안 맞았다.

“불편하게 느꼈다면 미안해.”

이어진 말에 나는 선배를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아뇨, 거의 글로리아 선배가 먼저 시작했는걸요, 뭐.”

생각해 보면 먼저 시비를 거는 쪽은 항상 글로리아 선배였다.

뭐, 상성과는 별개로 그만큼 친하다는 거겠지.

웬만한 양아치가 아니고서야 데면데면한 사람에게 시비를 걸진 않을 테니까.

어쩐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 보니 노아 선배가 가만히 서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나는 불안하게 웃으며 물었다.

“뭐 하세요?”

그러자 선배가 입꼬리를 올려 푸스스 웃었다. 청초한 눈꼬리가 사르르 휘어졌다. 내 심장이 덜컹할 정도로 예쁜 웃음이었다.

“네 눈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지금 뭐라고.

나는 열이 올라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금세 손까지 뜨끈뜨끈해졌다.

문득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노아 선배는 늘 그랬듯 선하고 맑게 웃고 있었다.

“……예쁜 건 선배고요.”

선배의 얼굴을 마주한 내 입술이 멋대로 움직이더니 저런 소리가 나왔다. 죽고 싶었다.

나는 두 눈을 질끔 감았다 떴다.

“아…… 고마워.”

선배가 수줍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과 동시에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에 홍조가 돌았다.

아, 망했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너무 예쁘다.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혹시 선배한테까지 들리면 어쩌나 불안하면서도 단둘이 있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 * *

“두 분은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나요?”

“응?”

“노아 선배랑요.”

내 질문을 들은 글로리아 선배는 눈을 깜빡이더니 별안간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아, 그거? 하하하!”

“웃지만 마시고요.”

나는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입을 삐죽였다.

글로리아 선배가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별거 아냐. 우린 어릴 때부터 이랬어. 첫인상을 완전히 망쳤거든.”

선배가 등받이에 늘어진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도 걔도 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 때문에 혼담이 조금 오가는 사이였는데…….”

글로리아 선배가 말하다 말고 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우리 둘 다 아무 감정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 네.”

애초에 그런 생각은 안 했다. 둘이 만나기만 해도 그렇게 싸워 대는데 다른 감정이 있을 리가.

“하여튼 그렇게 처음 만났는데, 차 따르자마자 뭐라는지 알아? 글쎄, 자기는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거야. 자기가 가져온 책 읽으면서.”

그 되바라진 꼬맹이.

글로리아 선배가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웃기지, 웃기지.”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내 상상을 방해하지 못했다.

어린 노아 선배.

지금보다 키도, 덩치도 작았을 거야. 이목구비도 더 앳되고, 변성기도 안 와서 목소리도 달랐겠지.

나는 몽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귀여워.”

순간 글로리아 선배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래, 이미 낀 콩깍지를 내가 어떻게 벗기겠니.”

자조적인 투로 중얼거리던 선배가 물었다.

“그런데 마음 접으려는 거 맞아? 그런 것치곤 아직 미련이 많아 보이는데.”

“……윽.”

사실이라 할 말이 없다.

나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보기엔 아주 그냥 푹 빠진 것 같은데.”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선배가 한 손으로 들고 있던 목검을 빤히 내려다보던 내가 화제를 돌려 보려 입을 열었다.

“음, 선배는 그럼 아예 검술 쪽으로 가시는 거예요? 황실 기사단?”

글로리아 선배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성기사단.”

“성기사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간에 알려진 성기사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성기사단은 신전의 병력으로, 신성국을 수호하고 여신을 모시는 고결하고 숭고한 집단이다.

나는 다시 글로리아 선배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고결, 숭고……?

“흰 제복은 잘 받으시겠네요.”

결국 내가 도출해 낸 결론이었다. 사실이다. 지금도 그냥 하얀 셔츠 차림인데 저렇게 빛나지 않는가.

“와, 너 너무한 거 아니니.”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글로리아 선배가 투덜거렸다.

“진짜예요. 제복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어머, 그래?”

글로리아 선배는 볼을 붉히며 실실 웃더니, 갑자기 정색을 했다.

“잠깐, 오늘이 며칠이더라?”

“8월 4일이요.”

“오, 그렇네.”

내가 엉겁결에 대답하자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 손가락을 꼽은 선배가 말했다.

“나 내일모레 생일이다.”

“어, 진짜요?!”

나는 식겁하며 벤치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떡해, 몰랐어요. 선물 뭐 드릴까요?”

“됐어, 나도 네 생일선물 안 줬는데, 뭐.”

“그래도…….”

내가 울상을 짓자 선배는 연신 괜찮다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선물은 정말 괜찮아.”

글로리아 선배가 내 머리카락 한 움큼을 가져가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 대신.”

“네?”

“그날 나랑 하루 종일 있어 주기, 알았지?”

짙푸른 눈이 내 모습을 담고서 가늘게 휘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