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10)

노아스는 손바닥에 쥔 사탕을 가만히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였다.

아껴 먹어야지. 아니, 그냥 고이 갖고 있어야지.

살포시 웃은 그의 사탕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자 기숙사에서 뭐 하냐? 변태야?”

복도를 지나던 글로리아가 하품을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가 노아스의 손에 들린 사탕을 보더니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탕은 빨리빨리 먹지 왜 들고 있어, 징그럽게?”

“받은 거야.”

“뭐래.”

노아스의 짤막한 대답에 인상을 구긴 글로리아가 낮게 뇌까렸다.

한 손에 아주 소중하게 꼭 쥐고 있는 모양새가 낯설었다.

“잠깐, 누가 줬는데?”

순간 드는 의문에 고개를 팩 돌리며 글로리아가 물었다.

“케이틀린이 줬어.”

“뭐?”

의외였는지 글로리아의 얼굴이 마구 구겨졌다. 그녀가 한 손을 슬쩍 내밀며 말했다.

“……하나만 줘.”

“싫어.”

“어쭈. 야, 쪼잔하게 그러지 말고.”

징징거리다 철저히 무시당한 글로리아는 눈알을 굴리며 빈정거렸다.

“아, 그래. 너 다 먹어. 난 나중에 또 달라고 하면 되니까.”

“둘이 친해?”

건조한 표정의 노아스가 넌지시 물었다.

“아, 그럼. 너보다 훨씬 친하지. 무려 비밀까지 나눈 사이인걸.”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글로리아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답에 고운 이마가 잠시 구겨졌다. 곧이어 노아스는 태연한 얼굴로 보란 듯이 사탕 하나를 까 입에 넣었다.

“아, 너 진짜 짜증 나.”

자신을 신경도 쓰지 않고 멀어져 가는 노아스의 뒷모습에 대고 글로리아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 * *

내 교복 치마 주머니에는 캐러멜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양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다른 애들과 나눠 먹으려고 챙겼는데, 그래도 남았다.

노아 선배 통이 엄청 크구나.

햇볕이 좋아 다음 수업까지 쉬려고 야외 벤치에 앉았다.

따사로운 햇살에 머리카락이 뜨겁게 달궈질 무렵, 쇠붙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아, 여기가 연무장 근처였구나.

소음이 심한 편도 아니었고 노곤함에 손끝 하나 움직여지지 않았기에 자리를 옮길 생각은 없었다.

“어.”

학생들 사이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한 내가 작게 신음했다.

하나로 묶은 백금색 포니테일은 흙먼지 가득한 연무장에서도 선연히 눈에 띠었다.

요 며칠간 글로리아 선배와 나는 부쩍 친해졌다.

친해졌다기보다는 그녀가 내게 말 걸고 웃어 주는 빈도가 훨씬 잦아졌다고 할 수 있다.

친구들이랑 같이 있는 데서 그녀의 윙크를 받았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 자체가 성격 좋고 호탕한 사람이라 나는 금방 경계를 풀었다.

이상한 소리를 가끔 하긴 하지만 그 책의 내용을 안다는 시점에서 나름의 내적 친밀감도 생긴 상태였다.

뭐, 친한 선후배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이?

“어, 케이트다.”

어느새 나를 발견한 글로리아 선배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한참 훈련 중이었는지 품이 큰 셔츠에 편한 바지 차림이었다.

그녀가 벤치에 앉아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씩 웃었다. 그 모습이 솔직히 좀 멋있었다.

“안녕하세요.”

내가 마주 인사를 하자 선배는 내가 쓴 안경을 톡톡 건드렸다.

“오늘은 안경 쓰고 왔네?”

“네, 수업 듣고 오는 길이라.”

“어쩜 안경도 이렇게 귀여운 걸 써?”

선배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완전 동그래!”

저기, 안경은 원래 동그래요. 뭐 네모난 안경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여하튼 제 건 그렇다고요.

식은땀이 났지만 나는 애써 웃었다.

멋있다고 느낀 게 방금 전인데.

“수업까지 조금 남았지? 나랑 놀래?”

“그럴까요?”

어차피 딱히 할 것도 없었던지라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째 이야기 주제가 자꾸 노아 선배 쪽으로 흘렀다. 결국 나는 체념하고 모든 것을 술술 불었다.

글로리아 선배는 꽤 좋은 이야기 상대였고, 모든 걸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인 데다 어쩐지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라 나쁘지 않았다.

“허! 고백을 했었다고?”

“네…….”

“걔가 널 찼고?”

“그런 셈이죠.”

이…… 등신.

내 말을 들은 글로리아 선배가 낮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거 저한테 하신 말씀인가요?”

내가 공격적으로 묻자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냐. 혼잣말이야.”

“흐음.”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글로리아 선배가 입을 열었다.

“아, 그보다 나도 사탕 주라.”

“사탕이요? 여기요, 많이 드세요.”

나는 주머니에서 캐러멜 한 움큼을 꺼내 선뜻 건네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양이 좀 많았는지 캐러멜을 건네받은 선배가 말을 더듬었다.

“뭐야, 이거 내가 준…… 왜 이렇게 많아?”

“누가 통으로 줬거든요.”

“흐음.”

뱁새눈을 뜨고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던 그녀가 픽 웃었다.

“아, 진짜. 세상 유치하기는.”

“네?”

“아냐, 잘 먹을게.”

훈련하느라 힘들었는지, 글로리아 선배는 한번에 몇 개를 까서 입에 집어넣었다.

캐러멜을 녹여 먹느라 한참 동안 입술을 오물거리던 선배가 입을 열었다.

“케이트, 노아스랑 무슨 사이?”

“네, 네?”

내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자 글로리아 선배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그냥 선후배 사이는 아니란 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응?”

아니라고 부정했는데도 추궁 비슷한 것이 이어지자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제가 어떻게 플로라 선배 연을 뺏어요.”

어떻게 그 선하고 착한 사람한테 그런 짓을 해. 내가 뭐라고.

“그게 예언서가 맞는다면 둘은 어떻게든 이어진다는 거 아니에요. 지금 노아 선배가 저한테 보이는 관심……이 언제까지 갈지 누가 알아요.”

나는 괜히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침울하게 말을 이었다. 입맛이 썼다.

“그리고 노아 선배는 원래 좋은 사람이니까요, 다정하고.”

글로리아 선배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내 말을 듣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뭐, 걔가?”

“네?”

“콩깍지가 단단히 꼈, 아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글로리아 선배가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케이트는 자존감이 좀 낮은 것 같아. 누구나 반할 만큼 예쁘고 귀여운데 말이야.”

말을 말자.

“그보다 음…… 뭐, 네가 그렇다면야 그런 거지.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꼭 나한테 말해 주기.”

한참 더 말할 것 같던 글로리아 선배가 말끝을 흐리자, 나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거기서 끝인가요?”

“응, 내가 그랬잖아. 노아스한테 네가 아깝다고.”

무엇보다 걔한테 널 뺏기면 너무 심심하고 슬플 것 같아서 말이지.

푸른 눈이 요사스럽게 휘어졌다.

선, 선배가 왜 슬픈데요.

내가 당황으로 시선을 어디 둘 줄 몰라 하자 글로리아 선배가 웃으며 내 볼을 쓰다듬었다.

“귀여워.”

그놈의 귀여워, 귀여워. 귀에 딱지가 얹을 지경이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계속 듣다 보니 조금 창피했다.

“자꾸 왜 그러세요.”

나는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선배의 손이 닿은 뺨을 만지작거렸다.

글로리아 선배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뭘?”

“귀엽다고 놀리시잖아요.”

“진짜 귀여워서 그러는데.”

글로리아 선배가 생글생글 웃으며 벤치 등받이에 턱을 괴었다. 백금색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너 설마 네가 귀엽다는 걸 모르는 거니? 정말 귀엽다.”

이거 미치겠네.

귀엽다는 칭찬이야 듣기 좋지만 저렇게 예쁜 사람이 나를 거의 찬양하듯 하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글로리아 선배는 거기서 한 술 더 떴다. 화단에서 메리골드를 꺾어 내 머리카락에 꽂더니 흐뭇한 표정을 했다.

나는 잠시간 눈을 깜빡거리며 멀뚱히 서 있다가 순간 어떤 사실을 깨닫고 피가 싸하게 식는 것을 느끼며 글로리아의 손을 잡아챘다.

“……도망가요.”

“뭐?”

“거기 원예부 화단이었다고요. 에코가 봤으면 선배고 뭐고 없어요.”

화단에서 충분히 멀어진 뒤, 나는 여전히 어리벙벙한 표정의 선배에게 설명했다.

에코는 원예부 소속인데, 화단을 정말 지극정성으로 가꿨다.

그 권태롭고 태평한 얼굴에 일말의 열정이 보일 때는 오직 식물을 가꿀 때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걸 건드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작년에 어떤 남자애가 장난으로 장미꽃 화단을 밟았다가 에코한테 잔디 손질용 가위로 머리를 잘릴 뻔했거든요.”

그리고 실제로 몇 가닥 잘렸지. 가관이었다.

나는 그 난장판을 추억하며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가 오랜만이라 모르고 있었네.”

내 말을 들은 글로리아 선배가 머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신학교는 동아리도 없더라고.”

고개를 끄덕인 나는 선배에게 당부했다.

“어쨌든 다음부턴 그러지 마시고, 초록색 머리에 귀가 뾰족한 2학년 여자애 피해 다니세요.”

“응.”

글로리아 선배는 내 귀에 꽂았던 메리골드를 만지작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의외네. 조금…… 귀여운가?

아잇, 뭐라는 거야.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방금 든 생각에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도 이건…… 감사해요. 잘 받을게요.”

나는 선배의 손에 들려 있던 메리골드를 도로 가져왔다. 하늘하늘한 꽃잎이 제법 예뻤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선배가 씩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또다시 귀엽다는 찬양이 이어졌고, 나는 익숙하게 귀를 닫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 교실에서 만난 에코는 메리골드 화단 망친 놈 잡으면 죽이겠다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한 손에 흙이 묻은 모종삽을 든 채.

묻어 버리겠다는 뜻인가.

나는 조용히 그녀의 눈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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